이어진 길을 따라 걷고 또 걷고
지방 소도시 혼자 대중교통을 타고 다니는 여행이라는 제법 거창한 타이틀을 붙이고 그 명분으로 가족을 버리고(!) 하루 정도 놀러 다니지만 사실 이런 여행에서 특별히 하는 일이 없다. 교통수단을 타고 이동하고 커피 한 잔 하고 걷고 또 걷는다. 대략 목적지 한 두 군데를 정해놓고 버스 같은 탈것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은 한 걷는 일 말고는 할 것이 없다. 별생각 없이 걷다 보면 때때로 사소한 일에 마음이 갈 때가 있다.
이번 여행에는 새로 산 백팩을 들고 나왔는데 가방과 내가 서로 친해지는 과정이었다. 카메라에 관심을 두다 보면 자연스레 가방에도 눈길이 가게 마련인데, 여러 가지를 놓고 고심한 끝에 장만한 가방이었다. 당연히 카메라를 튼튼하게 수납하되 출퇴근 길에 메고 다녀도 너무 카메라 가방 티가 안 나는 디자인이라는 까다로운 조건을 비교적 잘 충족해야 했다. 이전에는 주로 회사를 오갈 때 들고 다녔는데 그러기에는 좀 아까울 정도로 여행용으로도 적당한 가방일 것 같아서 과연 그러한지를 확인해 볼 수 있었다. 길에서 마주치는 그 누구도 내 가방에 눈길 하나 주지 않겠지만 가방을 만든 사람이 설계한 용도에 맞게 착착 쓰임을 다할 때 저절로 뿌듯해진다. 가령 사이드포켓에 텀블러를 넣을 때 부드럽게 들어가면서 안정적으로 자리 잡고 있다거나, 카메라 용품을 수납하게 되어 있는 공간에 딱 필요한 부속품들을 보관한다거나, 오른쪽 어깨끈을 내린 다음 왼쪽 어깨에만 가방끈을 걸쳐 놓고 옆에 있는 지퍼를 돌려서 커버를 열고 물 흐르듯 카메라를 넣고 꺼내거나, 상단에 있는 수납공간을 원터치로 열어서 선글라스를 스윽하고 불러올 때 가방이 기특해서 저절로 쓰담쓰담하게 된다. 그리고 만든 사람과 쓰는 나의 주파수가 일치했다는 생각이 들며 흐뭇해진다. 이런 생각에 집중하다 보면 걸음걸음에 힘이 덜 들게 된다.
첫 번째 목적지인 대부광산퇴적암층은 탄도항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 대부해솔길 6-2, 7-1코스 이정표를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 야트막한 산길을 따라 오르면 전망이 시원한 꼭대기에 다다르게 된다. 채석장은 호수가 되어 있는데 그 호수를 포함한 대부도 남쪽의 풍경이 훤히 보인다. 아직 얼음이 녹지 않은 호수 너머로는 농지가 펼쳐져 있고 오른쪽으로는 육지와 섬을 가르는 바닷물길이 강처럼 흐르고 있다. 입춘이 지나 봄 풍경을 기대했지만 초봄이라기보다 늦겨울에 가까웠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저 갈색의 대지 아래 봄은 분명히 꿈틀대고 있을 것이다. 언덕 같은 산인지 산 같은 언덕인지 모를 정상에서 내려오면 채석을 하느라 단층이 훤히 드러난 거대한 풍경이 입을 벌리고 있다.
정식 명칭은 안산 대부광산 퇴적암층.
“안산 대부광산 퇴적암층은 중생대 후백악기 7,000만 년 전 전후에 화산 폭발 후 생긴 화산 쇄설물인 응회암질 사암이나 이암으로 구성되어 있다. 1999년 대부광산에서 암석을 채취하면서 초식 공룡의 발자국 1족이 발견된 후 공룡 발자국과 식물 화석 클라도플레비스 등 총 23개가 발견되었다. 퇴적층을 구성하는 많은 층리의 색깔과 두께의 변화를 고려해 볼 때 이 지역이 당시 호수였음을 알 수 있다. 서울 근교에서 유일하게 중생대 지질층과 화산암체를 중합적으로 볼 수 있고 인근 화성시 고정리의 공룡알 화석산지( 천연기념물 제414호)와 관련되어 있어 당시의 식생 및 환경을 판단해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1박 2일에 나온 멋진 장소라 찾아왔더니 뜻밖에 지질학적 의미가 큰 곳이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손녀를 데리고 여행을 온 노부부는 찬바람에 손녀 감기 걸릴까 봐서 연신 옷깃을 여며주고 있었다.
불도방조제에 닿으니 얼추 점심시간이 길가에 늘어선 횟집 가운데 한 군데에 들어가서 바지락칼국수로 점심을 먹었다. 겨우 1인분을 시켰을 뿐인데 세숫대야만 한 그릇에 한가득 나와서 깜짝 놀랐는데 그걸 남김없이 먹은 내가 더 신기했다. 대부도 지도를 들여다보면 구봉도, 선감도, 불도, 탄도라는 지명이 눈에 띄는데 간척사업으로 지금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어서 다 대부도라고 하지만 한때는 각각 분리된 섬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육지로 다리로 연결되어서 대부도 자체도 섬이지만 섬이 아닌데 그 섬 아닌 섬 안에도 또 다른 섬 아닌 섬들이 존재하고 있다.
재미난 섬의 해안선을 따라서 계속 걷는다. 다음 목적지인 동주염전을 향해 쉼 없이 걷는다. 2월 초 대부해솔길에는 걷는 사람이 거의 없다. 제주올레길이 걷는 것만으로도 관광객을 불러들일 수 있다는 걸 보여준 이후에 지자체마다 너나없이 둘레길이라는 이름으로 길도 내고 편의시설도 만들고 표지판도 붙여 놓는다. 해안가를 잇는 대부해솔길은 관리가 조금 아쉬웠다. 차도와 구분이 모호해서 위험한 구간도 제법 있고, 무엇보다 쓰레기 문제가 심각해 보였다. 사람의 왕래가 드문 곳이다 보니 주민들이 버렸는지 관광객이 버렸는지 알 수 없는 쓰레기가 방치되어 있는 곳이 많았다. 인적이 드문 곳이 많으니 눈에 띄지도 않고 관청에서도 애써 치울 행정력이 미치지 못하는 것 같다. 대부도가 관광지로 유명하지만 유명하다는 곳에만 사람들이 잔뜩 몰리다 보니 그럴 것이다.
동주염전을 향해 걷다 보니 선감도를 지나게 되었는데 그곳에는 대부도 펜션촌이라는 재미난 곳이 있었다. 격자로 길을 낸 지역에 펜션들이 몰려 있었는데 줄잡자 수십 채는 되어 보였다. 주말이라 그런지 회사 야유회나 가족모임 때문에 모인 것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왁자하게 오가고 있었다. 몇 시간에 만난 많은 사람들이 은근히 반갑기도 했지만 인사를 나누진 않았다. 피차 이방인끼리 뭐…
그런가 하면, 펜션 말고도 대부도에서는 또 다른 구경거리가 있었다. 전망이나 입지가 좋아 보이는 터에는 각자 나름의 개성과 멋, 실용성을 살린 집들이 곳곳에 가득했다. 길을 걷는 동안 주말에만 이용할 것 같은 별장들을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했는데 나만의 영역을 구축하고 가꾸고 지키고자 하는 사람들의 욕망과 취향이 엿보였다. 특히 크게 지은 집 CCTV나 각종 보안 장치, 굳건한 잠금장치, 높고 튼튼한 담장이 여기는 내 땅이니 결단코 들어오지 마시오 하는 선언처럼 보였다. 내 땅 한 뙈기, 내 집 한 채 없이 분투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한쪽에는 가진 걸 덤으로 더 가지려는 사람들도 있는 게 세상이다. 섬을 ‘섬'이라고 발음해 보면 낭만이 물씬 느껴지기도 하지만 속에서 조금 더 미세하게 들여다보면 결국 여기도 사람이 사는 곳이구나 싶다.
두 번째 목적지인 동주염전에는 오후 3시 정도가 되어서야 도착했다. 줄잡아 4시간 정도는 걸었다. 아직 소금이 나지 않는 계절이라 염전은 쓸쓸했다. 염창은 비어 있었고 어수선한 풍경이 을씨년스러웠다. 염전체험장을 만드는 공사가 한창이던데 그 공사가 마무리되어서 정비가 되고 나면 찾아올 만한 곳이 될지는 모르겠다. 목적지가 인상적이지는 않았지만 많이 걸었고 많이 보았고 많이 느꼈으니 됐다. 얼른 걸음을 재촉해서 드문드문 오는 버스를 놓치지 않기 위해 제일 가까운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