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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젓가락과 훈제란 두 알

그 남자의 요리생활

by 오궁

그럴 계획이 애초에는 없었다. 마음에 드는 헬멧을 산 기념으로 가볍게 안양천길을 따라 자전거를 탈 생각이었다. 그런데 나이가 들면 내 마음이 생각하는 체력을 믿으면 안 된다. 몸이 늙는 속도를 마음은 당연히 따라가지 못하니 50대의 몸을 갖고도 30대처럼 몸을 마음대로 부릴 수 있다고 착각하기 마련이다. 오랜만에 자전거에 얹혀서 물길 따라 달리니 기분이 좋았다. 잘 정비된 도로 위에서 자전거의 바퀴는 부드럽게 굴러 마치 흐르는 듯했다. 허벅지에 힘이 불끈불끈 들어가서 일이 십분 달리기는 아까웠다. 안양천 하류 방향으로 내려가 한강과 만나는 곳에서 잠시 쉬었다. 엉덩이의 통증이 느껴지기 시작했지만 잠깐 쉬니 없어진 느낌이었다.


거기서 돌아와야 했다. 몸의 신호에 답했어야 했지만 마음은 달랐다. 여기까지 온 김에 여의도까지 한 번 가보자. 자전거 한창 탈 때 종종 다녔던 곳이니까 이번에도 괜찮겠지. 그게 10년도 더 된 일이었다는 것은 생각하지 못했다. 허벅지와 엉덩이의 아픔을 이길 만큼 자전거를 타고 달리는 한강변은 좋았다. 해 떨어질 즈음의 적당한 밝음과 어두움, 굳은 다짐 하나쯤은 마음에 품고 달리는 사람들, 나무 그늘 아래 돗자리를 깔고 어깨를 기댄 다정한 젊은 연인들, 목줄이 팽팽하도록 주인을 재촉하는 강아지들, 물이 올라 잔뜩 초록을 내뿜기 시작한 나무와 풀들, 강너머 펼쳐진 도시의 풍경, 소품처럼 정박해 있는 요트들. 도시의 정경은 내가 달리는 속도만큼 달리지고 다가왔다. 그것 봐, 나오길 잘했다.


목적지인 여의도에 다다르자 또 다른 새로운 세상이 펼쳐졌다. 서울 사람들 다 여기 와 있구나. 벚꽃축제 즈음이라 그런지 마포대교 지난 샛강역 주변 한강공원은 조금 전 지나쳐왔던 평화로운 사진 같은 풍경과 달리 2배속으로 상영되는 영화같이 부산하고 분주했다. 자리를 이미 잡은 사람들은 뭘 먹느라 바빴고, 자리를 갓 잡은 사람들은 배달 존에서 주문한 음식을 기다리고 있고, 이제 막 도착한 사람들은 자리를 찾았다. 푸드트럭에서는 붉을 밝히느라 발전기 돌리는 소리와 음식 냄새가 뒤섞였고, 내외국인 할 것 없이 사람이 가득 가득한 이곳은 무슨 박람회장 같았다. 마포대교 아래서 버스킹 공연을 하는 젊은 가수들은 날이 좀 쌀쌀해서였는지 원래 실력이 그런지 모르겠지만 음정이 종종 틀렸고 MR을 뚫지 못했다. 그럼에도 꿋꿋하게 앉아 기념사진과 동영상을 찍는 관객들을 뒤로 하고 드디어 (누구처럼 군사를 도모하지도 않았지만) 자체적으로 여의도 회군(!)을 했다.


돌아오는 길은 봤던 영화를 거꾸로 돌려보는 격이라 재미가 없는 편이다. 아름다웠던 풍경은 이미 짙게 내려앉은 어둠에 다 가려졌다. 목적은 단 하나. 집으로 빨리 돌아가는 것. 마음은 빨라졌지만 이미 체력이 급격히 떨어졌다. 등에서 밀어주던 바람이 이번에는 나를 위로 밀어내고 있었다. 집에까지 쉬지 않고 완주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기정사실. 컵라면이라도 하나 먹고 가야 한다는 정당성은 충분히 확보되었다. ‘고속도로 입구까지 마지막 주유소‘에서 기름을 넣는 느낌으로 집까지 가는 길 마지막 편의점에 빨리 뛰어들었다. 컵라면(정확히는 컵우동이지) 하나를 집어들고 뜨거운 물을 부었다. 급한 마음에 젓가락의 포장을 벗겨 뚜껑 위에 올렸다. 갑자기 몰아친 바람이 젓가락을 들어 바닥에 냉동댕이쳤다. 아무도 안 봤겠지 하고 슥 집어 들었다. 3초를(!)지켰으니 그 젓가락을 쓸 생각이었으니까.


잠시 뒤, 오른쪽에서 새 나무젓가락 하나가 두 배 느린 속도로 느껴지게 슥 하고 들어왔다. ’이거 쓰세요.’ 젊은 남자의 목소리. 옆 테이블에서 라면을 먹던 커플이었다. 날은 춥고, 몸은 지쳐 있는데 겨우 젓가락 하나에 뭉클하다니. 늙고 나약한 마음은 사소한 호의에도 이런다. 얼른 편의점으로 뛰어 들어가 두 알이 든 훈제란 두 개를 샀다. 조금 민망하지 않게 너도 먹고 나도 먹자 싶어. 나도 그가 젓가락을 내민 속도로 그들에게 훈제란 두 알을 건넸다. 고맙다는 말이 오갔다. 그러고는 애써 모른 척 컵라면에 코를 박았다. 그게 끝일 줄 알았지. 나보다 라면을 빨리 먹은 그들은 그 자리를 떠나면서 다시 한 번 ‘잘 먹었습니다’ 하며 깍듯하게 인사를 하더라. 수 천 년 전부터 요즘 애들 뭐 없다는 말이 진리처럼 통용되지만, 다 그렇겠나. 라면을 먹고 체력은 보충했어도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괴로웠지만 뜨뜻한 기운 하나 마음에 품고 가니 좋았다. 나에게 나무젓가락을 건넨 그 청년은 뭘 해도 잘할 것 같지만 그의 앞길에 행운을 비는 나의 마음을 살포시 얹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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