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로라 여행자의 일기 #17

아내의 자작나무

by 오궁

아내의 버킷리스트 가운데 하나는 자작나무 숲에서 오로라를 보는 것이었다. 아내는 늘 자작나무와 오로라를 이야기했고 나는 그 말을 허투루 듣지 않았다. 그 소원이 결국 우리 부부를 옐로나이프까지 오게 해 주었다. 물론 아내의 말에는 핀란드가 생략되어 있었지만 너무 추워서 추위를 견디는 것 말고는 다른 걸 생각할 수 없는 곳이라면 아무래도 좋다고 했다. 그래도 빠질 수 없는 것은 자작나무였다. 아내는 유달리 자작나무를 좋아했다. 아내의 자작나무 사랑에 나는 좋아하는 나무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았다. 바로 떠오르지 않았다. 나무를 좋아하는 대상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곰곰이 생각을 해보아도 소나무, 참나무 정도가 떠올랐지만 그 이유를 댈 수가 없으니 좋아하는 나무는 아니었다. 아내는 좋아하는 나무가 있다니 신기해서 왜 자작나무가 좋냐고 물었다.


“강인하지만 따뜻한 나무라서 좋아. 그 추운 델 살아도 언제나 따뜻한 느낌이 들잖아. ‘자작’하는 그 어감도 얼마나 경쾌한데. 추위가 아무리 강해도 내리누르고 있어도 ‘자작’하면 가볍게 뚫고 나가는 느낌이야”

나무한테 그런 느낌을 가질 수가 있구나. 아내는 가끔 생각지도 못한 지점에서 나를 놀라게 한다. 나보다는 한 수 위라고 생각할 때가 많다. 우리나라에도 강원도 인제군 인제읍 원대리에 자작나무 숲이 있다. 몇 번 지나치긴 했지만 가보지는 못했다. 미룬 이유가 있었다. 자작나무가 자라는 환경에 따라 진짜와 가짜가 어딨겠냐만 아내는 자작나무만큼은 꼭 북유럽 같이 춥고 추운 곳에서 보고 싶다고 했다. 그 소원을 옐로나이프에서 맘껏 풀었다.


옐로나이프는 자작나무 천지였다. 자작나무만 가득한 숲도 좋았고 상록수인 스프러스와 어울린 자작나무도 운치가 있었다. 하얀 눈밭 위에 회색도 아니고 은빛도 아닌 오묘한 색으로 하늘로 뻗어 있는 자작나무는 뚱뚱하지도 날씬하지도 않았다. 척박한 환경에서 생존을 위해 가장 최소한으로 필요한 것들만 갖추고 있었다. 군살 하나 없이 온전히 근육으로만 이루어진 잘 빠진 야생의 동물을 보는 것 같았다. 여름 내내 무성하게 푸르렀던 나뭇잎을 다 떨구어내고 앙상한 가지로만 버텨야 하는 겨울에도 의연함을 잃지 않았다. 자작나무는 북구의 겨울의 상징이자 선주민들의 삶과 마찬가지였다. 방수, 방충 기능이 있는 자작나무는 그 쓰임새가 다양하다. 배나 가구를 만드는 목재로 쓰이는가 하면 얇은 껍질은 불을 붙이는 불쏘시개로 사용한다. 메이플 시럽만 유명한 줄 알았더니 자작나무 시럽도 그 향과 맛이 독특했다. 기념품 가게에도 자작나무로 만든 공예품이 다양했다. 로지 아줌마의 텐트에서 자작나무 촛대를 본 아내의 자작나무 사랑은 더 깊어졌다. 작은 조각이라도 좋으니 “진짜” 자작나무를 가져가고 싶어 했다. 오로라빌리지 티피 옆에는 장작불을 피워놓는 곳이 있는데 마침 그 나무더미에서 자작나무를 장작을 발견했다. 잘 마른 자작나무는 소리도 경쾌했다. 고유의 냄새도 좋았다. 아내는 그 자작나무에 눈독을 들이고 있었고 마침 옆에 있는 오로라 빌리지 오너의 아들 프랭크에게 기념품으로 가져갈 수 있는지를 물었다. 밑져야 본전이었다. 옐로나이프 부의 반을 갖고 있다는 그 아들은 가져갈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가져가라고 한다. 부잣집 아이들이 착하다더니, 과연. 관대한 프랭크에게 땡큐를 연발하며 버스에 실었다. 호수에서 물고기를 잡아 가족들이 기다리고 있을 집으로 향하는 아비의 심정으로 어깨에 둘러메고 버스에 올랐다. 이제 드디어 캐나다산 “진짜” 자작나무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며 아내는 좋아했다.


하지만 호텔로 돌아와서 막상 트렁크에 넣어 보니 입체적 대각선으로 넣어도 들어가지 않았다. 10센티미터 정도 차이였다. 주방칼은 두 개나 가져왔지만 톱은 가져오지 못한 걸 어이없이 안타까워했다. 주방에 톱니가 있는 빵칼이 있어서 희망을 갖고 잘라보았다. 땀을 흘리며 10분을 잘랐는데 1센티미터도 들어가지 않았다. 웬만하면 잘라보려 했으나 포기해야 했다. 자작나무 장작은 제 자리에 다시 가져다 놓았다. 아쉬워하며 자작나무를 다시 오로라 빌리지에 가져다 놓았다. 갖고 싶어서 갖기 직전까지 갔지만 갖지 못해서 아내의 자작나무 사랑은 더 깊어졌다. 너무도 아쉬워하는 아내에게 언젠가 고향 마을 주변에서 본 자작나무를 떠올리고는 그걸 잘라다 주겠다고 했다. 기왕이면 우리 선산에 있으면 좋으련만 내가 아는 한 우리 산에는 자작나무와 비슷한 은사시나무뿐이다. 꼭 자작나무여야 한다고 하니 고향집에 내려간 길에는 자작나무를 찾아온 산을 다 뒤질 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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