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케를 돌려드릴 날까지 약 10일 전. 하지만 나는 아직 향초를 만들지 않았다. 향초 만들기를 더 이상 미룰 수도 없다. 재료는 거의 다 준비했다. 딱 한 가지를 제외하면.
갖고 있는 재료는 소이 왁스와 오일, 그리고 향초를 녹일 용기와 굳힐 용기. 소이 왁스와 오일은 웹소설 작가님께 받아왔고, 향초를 녹일 용기로 햇반 그릇, 향초를 굳힐 용기로는 적당한 사이즈의 테이크아웃 컵을 준비해 뒀다.
아직 구비하지 못한 한 가지는 '심지'다. 향초 재료 3대장인 왁스와 오일과 심지 중에 심지가 없다. 심지가 정말 딱 하나만 있으면 되는데 하나만 팔지는 않는다. 혹시나 인터넷보다 적은 양으로 좀 더 싸게 파는 사람이 있을까 중고 마켓도 뒤져봤지만, 거래에 필요한 차비까지 생각하니 배보다 배꼽이 크다.
한편, 기왕이면 장식용이 아닌 사용까지 가능한 향초를 드리고 싶다. 그런데 부케 향초를 태우려면 데코한 꽃들을 빼고 태워야 한단다. 데코한 꽃들에 불이 붙어 화재 위험에 노출될 수 있기 때문이란다.
'향초를 태울 때는 그 예쁜 꽃들을 다 빼고 구멍 숭숭한 못생긴 향초를 쓰란 말이야?'
그건 내가 싫다. 최대한 오래도록 예쁜 향초를 드리고 싶다. 데코한 꽃들 때문에 화재 위험이 있다는 말을 뒤집어 '장식할 꽃들을 심지와 먼 겉면에만 두르면 최대한 오래 볼 수 있겠네?' 생각했고 '어차피 안쪽 부분은 꽃이 필요 없다.'까지 생각이 미치자, 다이소에서 파는 향초가 떠올랐다. 그대로 몰드로 사용할 테이크아웃 컵을 들고 다X소로 향했다.
'이건 안 들어가네… 이건 너무 꽉 차. 적당히 여유 있는 사이즈 없나….'
심지 겸 꽃이 필요하지 않는 안쪽 부분을 담당해 줄 향초를 고르기 위해, 테이크아웃 컵에 여러 사이즈의 향초들을 넣었다 빼보며 적당한 사이즈의 향초를 골라냈다. 이제 향초의 색과 향을 고를 차례. 색상도 보고 냄새도 맡아보며 고르고 있던 그때, 누군가 나를 반갑게 불렀다.
"무지렁 씨!"
'나를 아는 사람이 없을 텐데?' 움찔 돌아보니 숲해설가 매니저 선생님이 계셨다. 선생님도 마침 수업 재료를 사러 다이소에 오셨다가 나를 알아보시고 말을 붙이신 것이었다. 약간의 대화를 통해 부케 향초 재료를 사러 왔다는 말을 들은 선생님께서 마침 수업을 위한 꽃들을 사놓으셨다며 곧장 나를 공방으로 데려가 꽃을 나눠주셨다.
한 번 해봤으니 두 번은 쉽다. 선생님께 받은 꽃들도 재빠르게 손질 후 옷걸이에 묶어 빨래 건조대에 널었다.
이번에도 꽃들은 약 1주일 만에 예쁘게 말라주었다. 결혼식으로부터 99일째 되는 날, 향초 만들기에 돌입했다.
향초 만드는 법을 알아보기 위해 인터넷 서칭하며 자연스럽게 다른 사람들의 작품들도 보았다. 업체에서 만든 향초들은 당연히 고급스럽고 우아했지만, 일반인들이 만든 향초는 상대적으로 어딘가 엉성한 구석이 있다. 그래서 레퍼런스를 찾으며 자주 웃었다.
하지만 막상 내가 만든 향초를 보고 있자니 다른 사람들의 향초를 보고 웃을 처지가 아니었다. 다른 사람들은 그래도 말린 꽃이라도 보였는데, 내가 만든 향초는 그냥 전부 침수다. 옆면도 그렇고 윗면도 그렇고 제대로 보이는 것이 하나도 없다. 심지어 울퉁불퉁 난리도 아니다.
다시는 남의 결과물을 보고 함부로 웃지 않아야겠다고 다짐했다. 내 결과물은 더 처참할 수도 있다는 것을 배웠고, 겪어보니 어떤 일이라도 결과를 만드는 과정에 들어가는 노력만으로도 충분히 대단한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향초 재료를 주신 작가님과 꽃을 나눠주신 공방 선생님의 성의와 선물 받으실 새 신부님을 위해서 여기서 끝낼 수는 없는 일. 끝날 때까지 끝난 것도 아니다.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렇게 나는 인터넷을 뒤졌고 '헤어드라이기로 녹여주면 울퉁불퉁한 표면도 매끄럽게 정리할 수 있고 꽃도 조금 더 드러난다'는 정보를 찾아냈다.
'살려보자.'
드라이기로 향초를 녹여냈다. 줄줄줄 줄줄. 향초가 땀을 뻘뻘 흘리며 꽃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옆면도 당연히 매끄러워졌다. 침수되어 있던 고대 신전을 발굴하는 작업 같다. 꽤 많은 양의 향초를 녹여내고 드디어 그럴듯한 향초가 만들어졌다. 역시 나만 포기하지 않으면 끝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다시 한 번 배웠다.
그렇게 100일째 되는 날, 새 신부님에게 부케 액자와 향초를 전해드렸다. 향초를 전한 저녁, 남은 재료로 좀 더 만든 향초에 불을 붙였다. 꽤나 영롱하다. 말린 미니장미로 윗면이 꾸며져 있고 옆면에는 유칼립투스가 감겨있다. 겉은 투명하고 속에는 핑크빛이 비친다.
일렁이는 촛불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정말이지 사소한 선의로 시작했었다. 그런데 그 작은 선의에 또 다른 선의가 붙으며 스노우볼이 굴려지기 시작했다. 이것만 해도 크다고 생각했었는데 화룡점정으로 하나의 선의가 더 모였다. 그렇게 거대한 선의 스노우볼이 완성되었다. 작은 선의에 선의와 선의가 붙어 마법이 일어난 것이다.
작은 선의에 붙은 마법은 비단 선물 받으실 분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나 보다. 나를 위한 마법도 함께 일으켜줬다.
액자와 향초를 전달하고 며칠 후, 활동하고 있는 커뮤니티에서 '향기 챌린지'가 시작되었다. 향기 챌린지에 일정 횟수 이상 참여하면 꽃다발을 받을 수 있다고 한다. 마침, 향초 만드는 방법도 공유할 참이기도 했고, 꽃을 좋아하시는 웹소설 모임장님에게 선물하면 좋을 것 같아 향기 챌린지에 참여하기로 결정, 꽃다발을 받을 수 있는 요건도 채웠다.
향초를 태우는 사진이 꽤 로맨틱했던 것인지 향초를 만드느라 고군분투한 것이 웃겼는지 부케 액자에 이어 부케 향초도 '지금 인기 있는 이야기'에 선정되어 메인에 걸렸다. 그렇게 부케 관련으로 쓴 글들 덕분에 커뮤니티 메인에 걸려보는 영광을 두 번이나 누려볼 수 있었다.
8월 중후순에는 챌린지 참여 경품으로 꽃다발이 왔다. 그런데 낯익은 꽃들이 보인다. 리시안셔스와 한 줄기에 두 가지 색의 꽃이 피는 신기한 꽃. 신기한 꽃은 최근 꽃을 사러 갔다가 한눈에 반해 이름을 외워두려 했는데, 화학 용어 같은 데다가 명칭도 길어서 외우지 못했던 꽃이다.
꽃다발 사진이 찍힌 카드도 같이 왔다. 카드를 뒤집어보니 QR코드가 찍혀있다. QR코드를 찍으면 꽃 이름을 알 수 있을 것을 본능적으로 느껴 핸드폰을 들었다. 역시. QR코드를 찍으니 꽃다발 설명 페이지가 펼쳐졌다. 내가 반했던 신기한 꽃의 이름은 블루 옥시페탈륨. 그리고 꽃다발의 의미는 우울함을 치료하는 꽃다발, 이름은 해피어거스.
자꾸 기분이 가라앉는 내게 도움이 되는 꽃다발이다. 예쁜 꽃을 보고 덕분에 나도 기분이 좋아졌다. 해피어거스를 모임장님께 전해드리고 마침 고민 중이던 여동생의 생일 선물도 꽃다발로 정했다. 처음에는 탐탁지 않아 했던 동생도 막상 택배가 도착하자 엄청 만족하며 꽃다발 사진을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으로 사용해 줬다.
부케 말리기가 나를 위해 걸어준 마법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커뮤니티의 매거진과 인스타 홍보에 부케 향초 사진이 활용되며 마지막까지 화려하게 장식해 주었다.
부케 말리기는 새 신부님께서 조금이라도 더 행복하시길 바라며 시작했고, 만드는 방법 공유는 좋은 정보를 공유하고 싶어 작성한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향기 챌린지 참여는 모임장님을 위한 것이었고. 그런데 그 모든 행위가 돌고 돌아 나한테도 닿은 모양이다.
선의는 마법을 만들어낸다. 남을 위해서도, 나를 위해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