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력 안배도 능력이다

by 무우지렁이

동시에 2가지의 아카데미 수업을 듣고 있는 9월.


각각의 아카데미는 또 각각 2개의 커리큘럼으로 나누어져 있다. 기초 4회와 심화 4회로 이루어진 예비 인력 아카데미와 탐구 5회와 기획 5회로 이루어진 전문가 아카데미로. 그렇게 18개의 강의가 약 2달이라는 시간 안에 어지럽게 뒤엉켜 있다.


나의 아카데미 수강 목표는 크게 3가지다. 첫 번째로 문화예술 강사 시장 진입 방법, 두 번째는 기획서 작성 방법, 마지막으로 기획서 발표 상금이다.


그리고 수업을 듣자마자 세 가지의 목적 중에 '문화예술 교육 강사 시장으로의 진입 방법'이라는 첫 번째 목적이 폐기됐다.


수업 내용이 내가 기대한 것과는 전혀 달랐다. 전문가 아카데미는 물론이고 예비 인력 아카데미조차 이미 강사로 활동하고 있는 사람들을 위한 수업이었다.


'진입 방법을 배우려고 온 건데 결국 배우는 것조차도 기본적인 스펙이 필요하구나….'


또다시 혼자 뒤처진 느낌이 들었다. 그래도 아직은 괜찮다. 기획서 작성 방법과 발표 상금이라는 두 가지 목적이 남아있으니까. 그래, 기획서 작성법이라도 배워두면 제안서를 작성할 때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것이고 상금이라도 탄다면 한 달, 더 살 수 있다.




예비 인력 아카데미 전체 8일의 교육 중 3번째 교육이자 심화 교육 수업의 첫 번째 날인 9월 8일 금요일 저녁.


수업이 끝나자 갑자기 기획 발표를 위한 팀을 결성하란다. 30분 후에 강의실을 폐쇄해야 하기 때문에 제한 시간은 30분이다.


당황스러웠다. 첫 수업 날 오리엔테이션 시간에 돌아가면서 자기소개를 한 번씩 한 것이 전부다. 그 뒤로는 교류할 시간도 없었는데 갑자기 팀을 결성하라니.


당황하고 있는 나와 달리 다른 사람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금방 팀을 이루었다. 결성된 팀들을 둘러보니 대부분이 처음부터 서로 안면이 있는 사람들이다.


개인은 기획 발표 심사 대상에서 제외기 때문에 나도 팀에 소속야 하는데 쉽지 않다. 직접 팀을 꾸리자니 누가 심사 대상에도 해당하면서 팀을 원하지만, 아직 팀을 정하지 못한 상태인지 알 길이 없다. 심사 대상이 되려면 팀원들의 학습 수료 여부가 중요한데 전체 수업이 절반도 지나지 않아 예측할 수도, 확인할 방법도 없기 때문이다.


가장 쉬운 방법으로 이미 형성되어 있는 기존 팀에 합류하는 방법도 있다. 하지만 기존 팀에 합류시켜달라고 말을 할 수 없다. 나는 어필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여태 예술 관련 경험도 전무하고 기획 관련해서도 내가 도움이 될 거라는 자신이 없다.


"시간 다 됐습니다. 모두 나가세요."


어영부영하는 사이 제한 시간이 끝났다. 팀이 결성된 사람들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교실을 나섰다. 결국 혼자가 된 나는,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재촉해 어두운 대로변을 혼자 터덜터덜 걸어갔다.


'기획서 발표 상금'이라는 목적도 폐기되었다. 그렇게 한참을 혼자 걸어 내가 탈 버스 정류소까지 걸어갔다. 그리고 또 한참 동안 기다려 버스를 탔다. 자리에 앉을 수 있게 되자 생각을 환기시키기로 했다.


'어쩔 수 없지, 뭐. 기획서 작성 방법이라도 배우고 전체적으로 다 해보는 경험 쌓는다고 생각하지, 뭐.'




9월 중후순, 대망의 기획서 작성 실습 교육일.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다. 이번에도 나의 예상과는 달리 사례 강의가 이어졌다. 앞서 대부분의 수업이 나의 기대와는 다른 수업일 때에 눈치챘어야 했는데. 미련 곰팅이인 나는 끝까지 희망을 버리지 못한 채 수업에 임했고, 실망감을 넘어 배신감까지 느껴졌다.


'괜히 신청했어….'


그렇게 세 가지 목적이 모두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강사 시장 진입 방법도, 상금도, 기획서 작성 방법도. 무엇 하나 얻지 못했다. 잘못된 판단으로 괜한 시간과 체력과 돈만 날린 것 같다. 그간 들인 노력에 속이 쓰리다.




강의가 끝나고 신경질적으로 가방을 싸고 있는데 갑자기 기획서 발표 심사 대상에 개인 참가자도 포함하기로 했다고 한다. 팀을 이루지 못한 사람들이 나 말고도 많았던 모양이다.


나이스! 모두 죽은 줄 알았던 세 가지 목적 중에 한 가지 목적이 살아났다. 그래, 상금이라도 타보자.


예비반 기획서 발표 수상 대상은 딱 1팀. 2팀이나 주는 전문가반보다는 그래도 예비 인력들을 위한 예비반이 수상 확률이 높을 것 같다. 여기서 1등을 노려보자.


기획서 발표일은 약 3주 후인 토요일지만 기획서는 약 2주일 후인 월요일까지 제출하라고 한다. 짧고 굵게 완성하는 프로젝트라면 해볼 만하다.


'딱 2주일만 고생하면 돼!!'


마음속으로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렇게 집으로 오는 버스 안에서부터 기획서 발표 준비를 시작했다.


우선 혼자 하는 사람의 예산은 최대 100만 원. 그리고 1등을 하면, 기획서 예산에 쓴 금액을 실제로 지원받아 프로그램을 진행해 볼 수 있다.


받은 기획서 양식을 훑어봤다. 기획서와 회차별 교육 내용 그리고 예산 편성표까지 총 3가지 양식이 있다. 훑어보니 기획서에 전체적인 내용을 적고 회차별 교육 내용과 예산 편성표는 기획서에 간단히 적은 것을 상세하게 다시 기술하면 될 것 같다.


기획서 양식부터 자세히 뜯어보기 시작했다. 프로그램명, 추진 기간, 추진 장소, 추진 배경, 추진 목적 및 기획 의도, 주요 내용, 추진체계 및 방안, 중심 키워드, 장르별 분류, 주요 특징, 기대효과, 참여 인력, 성과 유형, 예산.


하나하나 뜯어보니 대부분의 칸에서 어떤 것을 요구하는 것인지 정말 하나도 알 수 없다. '추진 배경'이랑 '추진 목적 및 기획 의도'는 뭘 쓰라는 거지? '장르별 분류'는 또 무슨 말이지? '주요 특징'이랑 '기대효과'도 같은 말 아니야?


양식을 한참 노려봤지만, 도대체 무엇을 넣어야 할지 하나도 모르겠다.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는 부분들은 일단 미뤄두고 아는 부분 중에 쉬워 보이는 부분들을 먼저 채워봐야겠다.




모르겠는 부분들에는 V 표시를 하고 V 표시가 없는 부분들을 훑어보니 그나마 '추진 기간' 및 '장소'가 비교적 빨리 채울 수 있을 것 같다. 이거부터 시작해 보자. 하지만 막상 이 부분을 채우려니 이것도 쉽지 않다. 일단은 이것도 보류. 교육 커리큘럼인 '주요 내용'부터 채우기로 했다.


'주제 의식은 무엇으로, 매개는 뭘로 해보지?'


한참을 고민했다. 아는 게 없다. 할 줄 아는 예술도 없고 내세울 예술 경력도 없다. 아무리 고민해도 콘텐츠가 없다. 나의 근심과는 별개로 시간은 열심히 흘러갔다.




벌써 5일밖에 시간이 남지 않았는데 기획서는 여전히 거의 비어 있다.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팀 단위로 준비하는 사람들에 비해 기획에 대한 절대적인 시간도 부족할 텐데 콘텐츠도 없다. 잠을 다 자면서 기획하기에는 팀 단위로 기획을 하는 사람들을 이길 자신이 없다.


그렇게 잠을 자지 않고 기획하기 시작했다. 제정신이 아니었을 텐데도 밤낮없이 3일 정도 기획서를 붙들고 기획서 양식을 분석하고 연구하고 작성하기 시작했다.


한참 아이디어를 짜내어 주제 의식과 매개는 최근 내가 겪고 배운 것들을 엮어 '꿈 찾기'와 '캘리그래피'를 접목하기로 했다. 그렇게 꿈 수첩 및 힐링 캘리그래피로 기획을 시작했다.


주제와 매개를 잡고 나니 그 뒤는 일사천리였다. 추진 배경부터 추진 목적 및 기획 의도 등등 텍스트로 가능한 부분들이 술술술 채워지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콘텐츠가 나오고 나니 이제 예산을 작성할 차례다. 예산을 짜다 보니 회계 인력으로써 증빙은 기본이다. 증빙자료들을 수집하다 보니 완성 작품 예시도 있으면 좋을 것 같다. 완성 작품 예시 사진도 첨부했다.


또 예산의 인건비 부분을 작성하다 보니 강사 이력 사항도 있으면 좋을 것 같다. 그렇게 예산 증빙은 물론이고 완성 작품 예시와 강사 이력 사항까지 추가되었다.




기획서가 어느 정도 완성되었다. 마지막으로 전체 내용을 종합해서 프로그램명을 정했다.


'나의 꿈, 빛낼 시간

-꿈 수첩 및 힐링 캘리그래피 아크릴 무드등 제작-'


그렇게 얼기설기 양식이라도 다 채운 기획서가 만들어졌다.


모두 마치고 보니 기획서 제출 마감까지 이틀이나 남았다. 아직 시간이 남았다. 완성도를 높이면 더 좋을 것 같다. 생각해 보니 발표용 PPT도 준비하면 좋겠다.


'후회가 남지 않으려면 할 수 있는 데까지는 최선을 다해야지!'


그렇게 발표용 PPT 제작을 위해 이틀 밤을 추가로 더 샜다. 그리고 10월 9일 월요일 새벽 5시 반, 내 정신이 아닌 정신으로 기획서와 발표용 PPT 자료를 제출한 후 기절하듯이 곯아떨어졌다.




10월 10일 화요일, 전문가 아카데미의 2번째 커리큘럼인 기획 과정의 두 번째 수업이자 기획 해커톤 발표를 위한 팀을 결성하는 날이다.


수업이 끝나고 이번에도 팀을 형성해야 하는 시간이 왔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르다. '알아서' 팀을 형성하는 것이 아닌, 초안은 있는 팀 형성이다. 스크린 화면에는 운영진들이 임의로 배정한 조별 리스트가 띄워져 있다. 이번 수업이 있기 전, 사전 조사를 통해 미리 팀을 결성해 준 것이다.


하지만 우리 팀은 나를 제외하고는 출석률을 맞춘 팀원이 없어 이미 심사에서 제외다. 우리 팀의 리더는 심사 대상이 되지 못한다고 해도 괜찮다고 말했다. 팀을 이뤄 기획서를 작성하는 경험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나는 다르다. 상금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최소한 심사 티켓이라도 얻어야 하고, 승률을 올리기 위해 같이 열심히 해줄 팀원이 필요하다. 한참의 고민 끝에 팀에서 빠져나오기로 했다.


그 후 나도 팀을 이루기 위한 몇 번의 헤쳐 모여가 더 있었다. 하지만 열심히 참가할 의지가 있는 사람들로 구성된 팀은 이미 최대 인원이 모두 찬 상태였고, 남은 개인들에게 접근해 보니 원팀과 마찬가지로 수료 기준을 충족하지 못하거나 이름만 올려두고 묻어가려는 사람들뿐이었다.


그렇게 이번에도 혼자가 되었다.




전문가 아카데미의 '기획서 해커톤'을 제외한 마지막 수업 날인 10월 12일 목요일.


적혀있는 커리큘럼 대신 기획서 작성 관련 수업이 진행되었다. 기획서 양식도 예비반 때에 받았던 것에 파란 글씨로 예시까지 추가되어 있다. 그리고 예비반 때에는 교육 프로그램 기획안만 제출할 수 있었지만, 전문가반에서는 연구 기획안도 발표할 수 있다.


사람들에게 들어보니 연구 기획이 진행도 쉽고 성과 제출도 훨씬 수월하다고 한다. 나도 교육 프로그램 기획은 해봤기도 하고 몇 없는 아이디어를 다 짜냈기에 이번에는 연구 기획안을 작성해 봐야겠다. 일단 예비반 기획 발표부터 마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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