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중순, 대망의 예비반 기획 발표날이다.
기획서 작성과 발표 자료는 정말 최선을 다해서 준비했다. 이제 발표만 잘하면 된다. 긴장을 풀기 위해 1시간 일찍 교실에 도착했다. 괜히 밥을 먹었다가 얹힐까 봐 점심도 굶다시피 하고 교실로 향했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교실에 들어간 순간, 발표자와 정면으로 마주 보는 심사 대형에 몸이 굳었다. 평가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막상 눈으로 보니 공포에 몸이 움츠러든다.
'괜찮아. 괜찮아. 당연한 거야. 평가를 받아야 등수도 매기지. 상 타려고 왔잖아. 일단 자리에 앉자.'
굳은 몸을 달래 간신히 자리에 앉았다. 자리에 앉아 심호흡한 후 스크린에 띄워진 발표 순서를 본 순간, 온갖 생각이 머릿속을 헤집으며 바들바들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발표 순서는 무슨 기준으로 정한 거지?'
나의 발표 순서가 첫 번째였던 것이다. ㄱㄴㄷ 순은 아니다. 내 이름은 꽤나 뒤 순번이다. 개인과 팀 순서도 아니다. 발표 순서만 봤을 때는 특별한 규칙이 보이지 않는다.
'아, 기획서를 잘 만들지 못해서 이미 떨어진 거구나!'
그렇게도 잠이 많은 내가 무려 5일 밤을 꼬박 새워서 만든 작업물인데 이미 탈락이라니.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기 시작했다.
'아, 안돼…!!'
교실을 뛰쳐나왔다. 고장 난 정수기처럼 줄줄 새는 눈물이 볼을 타고 쉴 새 없이 흐른다. 망가진 정수기를 고칠 수는 없으니, 사람들이 없을 곳으로 도망가야 한다. 오랜 외톨이 경력으로, 직감적으로 사람들이 오지 않을 계단으로 뛰어갔다.
'어떻게 만든 건데…. 어떻게 만든 건데….'
계단에 주저앉자 고장 난 정수기가 폭포수가 되어 콸콸 넘치기 시작했다. 그간의 노력이 물거품이 되었다는 느낌과 생계에 대한 절박함이 무너져 내려 뒤엉켰다.
얼굴을 무릎에 파묻고 최대한 소리가 새어 나가지 않게 울었다. 모두의 앞에 나의 바보 같은 기획서를 발표할 생각과 심사 위원들의 날카로운 질문. 그리고 다른 수강생 분들의 웃음거리가 될 공포에 압도되어 몸이 굳는다.
집에 가고 싶다. 집에 가서 편하게 엉엉 울고 싶다. 아니다. 집으로 돌아가기에는 그간 노력한 시간이 아깝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판단이 서질 않는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한참을 울고 있는데 운영진에게 전화가 왔다.
"무지렁 씨 어디 계세요? 발표 5분 전이에요. 빨리 자리로 돌아오세요."
또 시간이 없다. 결단을 내려야 한다. 기운이 하나도 없다. 어차피 떨어진 거, 이 부끄러운 자료를 내가 만들었다고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지도 않다.
눈물을 훔치고 자리로 가 집으로 갈 요량으로 짐을 쌌다. 운영진에게 발표를 하지 않겠다고 말하고 교실을 나서려는 순간, 당황한 운영진이 나를 붙잡았다.
"왜, 왜 발표 안 하시려고 해요?"
"흐끅. 제가 잘 못해서 제일 앞에 발표시키는 거잖아요."
나의 발표 불참 사유를 들은 운영진이 말했다. 그냥 제출 순서일 뿐이라고. 내가 제일 빨리 냈을 뿐이라고.
"준비 잘 해왔는데 발표 왜 안 해요? 안 아까워요?"
그 말을 듣자, 그동안 고생한 시간이 주마등처럼 눈앞을 지나가며 다시 한번 울컥했다. 그래, 노력한 시간을 위해서라도 용기 내보자.
"발표, 해볼게요."
발표 준비를 위해 급하게 화장실로 가 눈알부터 씻고 돌아왔다.
울고 들어간 티는 났겠지만, 발표는 무사히 마쳤다. 발표가 끝나자, 심사 위원들의 질의응답이 있었다. 그런데 질문의 강도가 내게만 유독 날카롭다. 내게는 '어디까지 완벽하게 준비해 왔는가?'에 대한 질문들을 했는데, 다른 사람들에게는 발표에서 다 못 보여준 부분을 보충 설명할 기회를 주는 질문들을 했다.
'역시 잘 못해서 이미 떨어진 거 맞잖아….'
진행요원이 역시 거짓말을 했다는 일종의 배신감이 들었다. 하지만 그 덕에 남들 앞에 서볼 기회를 버리지 않았고, 이번에는 사람들 앞에서 최소한 울지 않고 말이라도 했다. 진행요원 덕분에 한 뼘 성장한 것이었다.
모든 팀의 발표가 끝난 후 심사 위원들이 최종 평가를 하기 위해 자리를 비웠다. 문화 재단의 팀장님께서 간단한 자기소개 후 기획서를 잘 쓰는 방법을 알려주시겠다고 했다.
"기획서 작성 및 발표는 설득의 과정입니다. 기획서를 잘 쓰는 방법을 알려드리기에 앞서 한 가지 먼저 말씀드릴 부분이 있습니다. 제가 이 분과 개인적인 친분이 있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만"
팀장님께서 한 번 뜸을 들이시고는 말씀을 이으셨다.
"가장 처음 발표하신 분이 작성하신 기획서가 페이퍼 상으로는 만 점짜리 기획서입니다. 아마 텍스트를 다루는 직업을 가지신 분 같습니다."
'기획서라는 것 자체를 처음 써보는데 내 기획서가 기존에 텍스트를 다루는 사람이 쓴 기획서 같다니? 게다가 설득은커녕 말도 못 하는 내가?'
어벙벙해 있는 사이 팀장님께서는 말씀을 이으셨다. 그러고는 내가 기획서 양식을 분석한 것과 기획서를 작성할 때 고려했던 부분들을 모두 말씀하셨다. 마지막으로 페이퍼 작성을 할 때에는 내가 쓴 기획서를 참고해서 쓰면 된다고까지 말씀해 주셨다.
그다음으로 발표 준비에 관한 말씀을 하셨다. 발표 준비는 매번 엄청난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고. 시간과 노력으로 준비해야 하는 영역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렇게도 듣고 싶었던 기획서 작성 방법을 발표까지 끝난 후에야 들을 수 있게 되다니. 조금은 어이가 없었지만 그래도 정답을 들을 수 있어 기쁘다. 게다가 내가 고민하고 내린 방법이 완벽하다는 말씀까지. 팀장님의 말씀을 필기하면서 행복 회로를 돌렸다.
'혹시 나 1등인 건가? 그럼, 이 지원금으로 예술 강사로 첫발을 내딛는 건가!!'
처음에는 상금을 받으면 생활비로 충당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기획서를 준비하며 그 생각은 사라진 지 오래다. 준비하다 보니 정말 프로그램을 진행해 보고 싶어졌다. 꿈과 희망을 전하면서 생계도 이어갈 수 있다면 참 좋겠다고도 생각했다.
팀장님의 말씀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평가 결과가 나왔다.
"원래는 한 팀만 드린다고 했습니다만, 총 세 팀이 수상하게 되었습니다. 1등 두 팀과 2등 한 팀입니다. 2등 팀의 경우에는 상금의 절반을 지원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하나, 둘, 셋, 넷…. 세어보니 총 12팀이 발표했다. 12팀 중에 3등 안에만 들면 된다. 상위 25% 이내에 들면 된다는 소리다. 아주 못하는 영역이 아니고는 대충 해도 상위 25% 안에는 대부분 들었다. 이 정도면 아무리 못해도 순위권 안에는 들었겠지. 기대하며 내 이름이 호명되는 것을 기다렸다.
"우선 2위를 수상한 OOO 팀!! 축하드립니다!!"
2위를 수상한 팀이 호명되었다. 하지만 그 팀에 내 이름은 없다. 설마 내 절박함에 1위인 걸까. 쿵쾅대는 심장을 애써 내색하지 않으며 내 이름을 기다렸다.
"1위를 수상한 팀은 OOO 팀과 OOO 팀!! 축하드립니다!!"
기대와는 달리 내 이름은 끝끝내 불리지 못했다. 내가 보기에 유력한 수상 후보였던 팀도 상을 받지는 못했다. 모든 발표가 끝나고 사람들이 우루루 내게로 와 위로해 줬다.
"나는 무지렁 씨가 1등 할 줄 알았는데 말이죠."
"저는 OOO 님이 수상하실 줄 알았는데 호명되지 않으셔서 꽤 놀랬네요."
"우리 눈이랑 심사 위원분들께서 보시는 시선이랑 뭔가 다른가 보네요."
교실에서 심심한 위로를 주고받고 함께 건물을 나왔다. 그리고 가까운 버스 정류소에서 다른 사람들을 모두 배웅한 뒤에야 억지 미소를 풀 수 있었다. 고개를 푹 숙이고 나의 버스 정류소까지 먼 길을 걸어갔다. 아까 하도 많이 울어서 그런지 이제는 눈물도 나지 않는다.
'어떻게 먹고살아야 하지…. 전문가반은 자신 없는데…. 이제 살 만큼 살았으니까 죽으라는 말인가….'
예비 인력 발표는 끝났지만 잠시도 쉴 틈이 없다. 약 9일 후인 10월 중후순까지 전문가 해커톤 발표를 위한 기획서 초안을 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미 다 털린 멘탈과 콘텐츠로 인해 준비하고 싶지 않다. 아니, 더 이상 할 기력도 콘텐츠도 없다.
'예비반 때에도 안 됐는데 전문가반에서 퍽이나 되겠다. 안 되는 거 알았으니까, 이번에는 진짜 그냥 하지 말까?'
생각은 하지만 역시 수료 기준을 맞추기 위해 들인 시간과 노력이 너무 아깝다. 아직 컨디션도 돌아오지 못했고, 멘탈도 다 터진 상태지만 열심히 만든 기회를 그냥 흘려보낼 수는 없다. 제일 먼저 해커톤이라는 용어의 정의부터 찾아봤다. 해커톤이라는 말이 정확히 어떤 뜻인지는 몰라도 즉석에서 무언가를 해내는 일인 듯싶다.
'일단 초안만 내고 당일에 완성해도 된다는 말인가 보네?'
다행이다. 일단 뼈대만 대충 적어서 제출하고 수면을 좀 보충한 후에 살은 당일에 붙이자. 그렇게 연이어 두 번째 기획에 돌입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콘텐츠가 더 없다. 고민할 시간도 더 없다. 콘텐츠는 정말 없지만 참가는 하고 싶다.
결국 정말 꺼내고 싶지 않았던 '자살'을 주제로, 숲해설가 양성 과정을 접목해 '숲'을 매개로 뼈대를 작성했다. 그렇게 이번에도 마감 기한에 맞춰 기획서 초안을 제출했다.
기획서를 제출한 다음 날, 운영진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아무리 해커톤이라지만 당일에 완성하기는 힘들 거예요. 이틀 후인 목요일까지 80%는 해오세요.“
어쨌든 당일까지 완성만 할 수 있으면 된다는 말이고, 나는 아직 컨디션이 돌아오지 않아 조금이라도 더 쉬어야 한다. 기획에서 가장 어려운 부분이 주제랑 매개인데 그 부분도 정해졌다. 나머지는 당일에 충분히 할 수 있다.
그리고 10월 말, 해커톤 당일. 앉은 자리에서 기획서를 전부 작성하고 최종 제출을 했다.
제출이 끝나자마자 바로 발표가 이어졌다. 그런데 막상 발표를 하자니 약간의 문제가 있었다. 아직은 죽고 싶은 생각이 약간은 남아있는 내가 많은 사람들 앞에서 '과거에 자살 기도를 했었다'는 말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내 차례가 오기 직전까지 고민했다. 이 이야기를 하지 않고는 발표를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번 기획서를 작성하는 데에 투입된 시간은 예비 인력 기획 발표를 준비하는 데에 들어간 시간보다 훨씬 적다. 하지만 이번 기획은 내가 그간 살아내기 위해 애쓴 시간을 배경으로 한다. 나와 나의 수업을 들어줄 많은 사람의 내일을 목적으로 한다. 목적,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의 목숨을 위해 용기 내야 한다. 그렇게 다시 한번 용기를 내기로 결심했다.
나의 발표 차례가 되었다. 과거의 자살 시도들을을 담담히 말하고 싶었지만 아직은 눈물이 날 것 같다. 살고 싶다고, 살려달라고, 상금을 달라고 소리 지르고 싶기도 하다. 그 많은 울먹임을 참고 간신히 제한 시간에 맞춰 발표를 끝냈다.
이번 질의응답에서는 날카로운 질문 대신 지금의 기획에 대한 보완 관련 피드백을 받았다. 그리고 마지막에 덧붙은 한마디.
"이번에 지원 대상이 되지 못하더라도 이 기획, 실행에 옮겨보시면 좋겠어요."
직감했다. 이번에도 떨어졌다는 사실을. '역시. 아직 많이 부족하구나.' 이번에는 발표가 끝나자마자 바로 지원 대상이 결정되었다. 그리고 예정대로인 딱 두 팀만이 지원 대상이 되었다. 당연하게도 나는 그 두 팀에도 들 수 없었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노력만으로 되지 않는 일들이 있다. 이번 경험도 그러했다.
"이번에는 안 울었네요."
내 어깨가 축 처져있었나 보다. 편안한 분위기와 열정을 동시에 지닌 한 수강생 분께서 어깨를 툭 치며 미소 지어주셨다.
"아…. 하하…."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모든 절차가 끝난 후 망연자실한 내게 문화재단 팀장님께서 제주도에 사는 어느 작가님을 말씀해 주시며 응원해 주셨다. 이 기획, 계속해 보라고.
'그래요. 레퍼런스가 쌓이면 언젠가 지원받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나는 당장의 생계가 급해요.'
생각은 하지만 입 밖으로 말을 꺼낼 수는 없었다. 징징댄다고 달라질 것은 없으니까. 대신 두 가지 배운 점이 있긴 하다. 뜬금없지만 TPO에 관한 것이 일단 하나. 그리고 발표 연습도 많이 해야 한다는 것이 둘.
예비 인력 기획서 발표회 때에는 다들 잘 차려입고 왔는데 나만 편하게 입고 갔었다. 예비 인력 때에 다들 잘 차려입고 온 모습을 보고 전문가 기획서 발표회에 때에는 나도 열심히 차려 입고 갔다. 하지만 이번에는 반대로 차려입고 온 사람이 나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었다. 다들 편한 복장으로 왔었다.
상대적으로 레퍼런스가 부족하다고 판단되었을 예비 인력 때에는 옷차림에서라도 전문성을 보여야 했고, 이미 전문가로 기정사실화되어 있는 곳에서는 옷차림에서 전문성보다는 개성을 보여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팀장님께서 말씀하셨다. 수많은 제안 발표 경력이 있는 본 교육을 제안한 대표님조차 새로운 제안 발표 때마다 수백 번의 발표 연습을 하고 온다고 말이다. 처음에는 듣지 않았다. 제안서를 완벽하게 작성하는 것만 해도 시간이 꽤 많이 드는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알게 되었다. 제안서도 중요하지만, 제안 발표도 중요하다는 사실을.
그래, 아주 얻어 가는 것이 없지는 않았다. 그거면 되었다. 그래도 최선을 다한 덕에 건져 갈 수 있는 것들이 있었다. 그래, 그거면 충분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