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예술교육 기획과 전시 준비가 한창이던 10월 말, 수업을 듣기 위해 평생학습관에 갔다가 전광판의 '오늘의 수업' 리스트에서 '시니어 모델 수업'을 발견했다.
'시니어 모델? 굉장하다. 나랑은 다르게 자신감이 엄청나신 분들이시겠지.'
수업을 들으시는 분들이 부럽기도 하고 멋지다고 생각하다 전광판 밑에 있는 전단지를 발견했다. 평소 같았으면 지나쳤을 전단지 더미인데 오늘따라 이상하게 눈에 밟혔다.
'이게 뭐지….'
가까이 가서 확인해 보니 연말에 강연할 구민을 모집한다고 한다. 선정이 되면 개인별 강연 코칭 후 연말 특강의 기회가 주어진다. 코칭도 받고 연말에 강연도 할 수 있다니. 관심이 생겨 포스터를 자세히 들여다봤다.
모집 분야
1순위 인생 이야기, 감동, 지식, 삶의 지혜
2순위 자격증, 취미, 문화, 스포츠 등 나눔이 가능한 분야
신청 방법
신청서와 10분 강연 영상 파일을 담당자 이메일 제출
쭉 읽어 내려가다가 영상에서 딱 걸렸다.
'강연 영상? 그것도 무려 10분이나 되는?'
말도 잘 못하고 외우는 것도 잘 못하는 내가 10분이나 되는 영상을 찍을 수는 없을 것 같다. 하지만 멘토링은 탐이 난다. 그래, 멘토링을 받고 나면 사람들 앞에서 말할 수 있을 만큼 말을 잘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접수를 위해 여기저기 문의도 해보고 이전의 강연들도 찾아봤지만, 자료가 별로 없다. 생각해 보니 최근 끝난 문화 예술교육 기획의 후유증도 아직 가시지 않았고, 시작이 임박한 전시 준비에도 박차를 가해야 한다. 지금 이미 충분히 무리하고 있는 것 같다. 더 이상 일을 벌이지 말자. 포기하자.
강연 접수 하루 전날인 11월 중순, 숲해설가 수업의 매니저 선생님께서 오랜만에 연락을 주셨다.
"무지렁 씨, 오랜만이에요. 구에서 강연자 모집하던데 무지 씨도 한 번 지원해 봐요. 공짜로 멘토링도 받을 좋은 기회 같아요."
강연에도 멘토링에도 미련이 남아있던 내게 매니저님의 말씀은 운명같이 느껴졌다. 홍보지도 책상 위에 그대로 있다.
'그래, 일단 접수만 해보자. 해보고 되면 하고 안 되면 그만이지. 내가 선택하지 말고, 운명에 맡겨보자.'
그 길로 접수를 위한 강연 기획에 착수했다. 강연 시간은 알아본 1시간에 맞춰, 대주제 하나에 소주제 3개로 잡고 기획했다. 보내야 할 강연 파일은 10분이니 영상은 인트로만 따서 보내기로 한다. 10분 분량의 대본을 작성한 후 잠에 들었다.
접수 마감일 오전 11시 , 녹화를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아."
고작 인사 한마디 우렁차게 내지르고 황급하게 정지 버튼을 눌렀다. '안녕하세요.' 이 다섯 글자조차 어색하다니. 조금 놀랐지만, 시간이 없다. 재빨리 녹화 버튼을 다시 눌렀다.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 드디어 너무 이상하지는 않을 만큼의 '안녕하세요.'가 구사되었다.
"안녕하세요! 살아야 합니다. ……뭐였지? 아, 다시."
인사 부분만 잘 넘기면 그 뒤는 쉬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그렇게 다시, 그리고 또다시. 녹화를 누르고 핸드폰에게 살라는 말까지만 내지른 후 종료 버튼을 누르는 짓을 반복했다.
그렇게 다시, 다시, 그리고 또 다시. 녹화와 종료 버튼 사이에서 고장 난 카세트테이프처럼 몇 번이고 핸드폰에게 꿉뻑꿉뻑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그렇게 수십 번의 반복과 개선이 있고 난 뒤에야 드디어 너무 싫지 않은 자기소개 한 줄이 만들어졌다.
"안녕하세요! '살아야 합니다. 당장 죽을 것처럼, 영원이 살 것처럼'의 강연을 맡은 무.지.렁. 입니다."
시계를 보니 벌써 3시가 다 되어간다. 마감 시간이 적혀있지는 않았지만 5시, 못해도 6시에는 접수를 마감할 것 같은데. 녹화해야 하는 분량이 아직 까마득하다. 어색한 말투와 행동 교정에 대한 부분은 포기하고, 10분짜리 녹화에 집중하기로 했다. 하지만 긴장한 탓인지 자꾸 중간 중간 말문이 막혔다. 그렇게 다시, 또 다시 녹화했다.
한편, 길어진 녹화 덕에 녹화가 끊길 때마다 녹화를 확인하는 시간 또한 길어졌다. 그렇게 녹화 텀이 점점 늘어났다. 그리고 나의 모습을 보는 시간이 길어지는 만큼 나의 바보 같은 언행을 보는 시간도 늘어났다.
'내가 저렇구나….'
스피치 수업을 통해 알고는 있었지만 역시 나의 말투, 억양, 목소리 등등등. 전부 최악이다. 아직 10분을 꽉 채운 영상도 없는데 바보 같은 나의 모습에 벌써 힘이 다 빠진다. 나의 존재 자체가 부끄러워 미칠 지경이다. 지쳐 침대에 벌렁 드러누웠다. 하늘에는 벌써 해가 뉘엿뉘엿 지기 시작했다.
이미 6시는 지났다. 어쩌면 제출 기한이 오늘 자정까지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혼자 자정까지로 마감 기한을 늘렸다. 하지만 마감 기한을 늘린들 이미 체력과 의지도 바닥난 지 오래다. 혼자서는 더 이상 녹화를 이어갈 수 없을 것 같다.
그렇게 여태 하지 못했던 '혼자 하기 힘들다면 도움받을 줄도 알아야 한다.'는 당연한 사실을 이번에는 요청해 보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막상 도움을 요청하려 하니 부산에는 마땅히 도움을 요청할 만한 지인이 없다. 결국 생뚱맞다는 걸 알지만 웹소설 작가 오픈채팅방에 도움을 요청했다.
'혹시 오늘 시간 되시는 분 계실까요? 핸드폰으로 동영상 찍는 것 좀 부탁하려구요. ㅠㅠ'
마침, 근처에서 글을 쓰고 계시던 모임장님께서 도와주시기로 했다.
심장이 벌렁거린다. 나의 바보 같은 모습을 찍는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수치스러운데 이제는 실시간으로 지켜보는 사람도 생겼다. 괜히 부탁한 것 같다는 생각도 잠깐 들었지만, 이제는 정말이지 이판사판이다. 만약 선정된다면 더 많은 사람 앞에서 말해야 한다. 그걸 생각하면 한 사람 앞에서 못 할 것도 없다. 그렇게 촬영에 임했다.
첫 녹화가 끝나고 모임장님께서 찍어주신 영상을 봤다. 여전히 엉성한 나지만 그래도 내가 찍은 것보다 퀄리티가 높은 영상 덕분일까, 아주 못 들어줄 정도는 아닌 것 같다. 가능성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 다시 할게요."
녹화를 끊고 시계를 보니 벌써 11시 45분이다. 금방 끝날 줄 알았던 녹화가 많이 길어졌다. 자꾸 한 번 이상씩 말을 저는 나 때문이다. 이제 남은 시간은 단 15분. 촬영 시간에 메일을 보내는 시간까지 고려하면 이번 촬영이 마지막이다.
"마지막으로 하, 한 번만 더요!"
그렇게 마지막 녹화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녹화가 절반 이상 지났을 무렵, 또 한 번 말을 절어버렸다. 그렇게 마지막 촬영이 끝났고 결국 나는 완벽한 영상을 보낼 수 없게 되었다.
아주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그래도 이만하면 여태 찍은 영상 중에 그나마 가장 나은 것 같다. 바로 메일함을 열어 영상을 첨부하고 메일을 전송한 후 보낸 메일함을 확인했다. 전송시간, 11시 59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