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진빈 Aug 06. 2019

당신의 생에 보내는 편지

#브런치무비패스 송원근 감독 영화 <김복동> 리뷰




영화를 보는 내내 마음이 버거워했습니다.


당신의 생에 대해 생각해보려다, 벼랑 끝에 내몰려서도 몇 번이고 다시 힘을 내야 했던 당신 생의 장면들을 보며 모든 사고가 멈춰버렸습니다. 열여섯 나이에 그 모진 일을 겪고도 꿋꿋하게, 때론 두려움에 떨며 삶을 살아야 했던 당신을 대신해 나는 그만 아이처럼 엉엉 울어버렸습니다.


나와 영화를 보는 젊은 세대가 관객석에 앉아, 그리고 시위 현장 곳곳에서 외로운 외침과 함께 흘린 눈물은 이토록 구슬픈 현실이 비단 당신의 생만이라서는 아니겠지요. 이는 우리가 멈추지 않고 목소리를 내야 하는 이유기도 합니다. 당신이 계신 저 먼 곳으로 유유히 사라져 가는 엔딩 크레디트를 보며 나는 많이 울었고, 많이 부끄러웠고, 이윽고 참담했습니다. 늘 스스로를 증인이자 증거라 칭했던 당신이 몸도 마음도 편안한 곳으로 갔다고 해서 이 말도 안 되는 용서의 항쟁이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지만, 미안하다는 그 한 마디를 듣지 못하고 떠나간 당신을 생각하니 괜히 설움이 북받쳐옵니다.



영화관을 나서면서부터는 장면 장면을 머릿속에서 돌려보며 당신의 생을 어렴풋이나마 다시 그려보았습니다. 영화를 보는 동안 끊이질 않던 슬픔이, 먹먹해진 마음이 쉽게 가시지 않아 창밖으로 추적추적 내리는 빗소리를 벽 삼아 몰래 기대 몇 번의 눈물을 더 훔쳤습니다.


그러다 문득 당신이 아픈 몸을 하고 화해 치유 재단 앞에서 외로이 외쳤던 "하늘도 노여워 눈물을 흘린다"는 말이 떠올라 이미 촉촉하게 젖은 손수건을 부여잡고 바지단을 적셔야 했습니다. 누가 무슨 명목으로 당신을 대신해 감히 화해와 용서, 그리고 치유를 입에 올릴 수 있습니까. 어떻게, 무슨 근거로 그날의 정부는 양자가 싸운 일이 아닌 엄연히 가해자와 피해자가 있는 문제에 화해라는 단어를 올렸을까요. 잘못했다는 그럴싸한 사과 하나 겉으로 드러내는 일 없이 어찌 피해자를 대신해 용서를 논할 수 있었을까요. 그 결과로 인해 도대체 누가 치유받았는지 나는 도무지 알 길이 없습니다.



집으로 돌아와 깊은 한숨으로 흥건한 손수건을 빨면서는 당신의 하루하루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1000번이 넘는 수요 시위, 수차례 이어진 일본을 포함한 해외 순회 시위와 강연. 그 장면들 속에서 매번 스스로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라 소개해야 했던 당신의 마음을 가만가만 매만져봅니다.


한국으로 돌아온 순간부터, 어쩌면 일본에 도착해 수치스러운 신체검사를 받았다던 그 순간부터 당신은 앞으로 살아갈 날을 걱정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지옥 같은 곳에서 벗어나 겨우 조국 땅을 밟은 뒤에도 피해자라는 이름표가 당신을 따라다닐까 노심초사하고 두려워했던 당신 자신을요. 죽음을 코 앞에 둔 지옥 속에 살면서도 삶을 생각하느라 그 외롭고 버거웠을 하루하루의 무게를 나는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습니다. 


결혼을 하고도 아이를 갖지 못해 죄인처럼 살았던 꽃다운 그 시절 당신의 위태로움을, 피해자임에도 죗값을 치르는 마음으로 이를 악 물고 악착같이 버텨온 당신의 고된 시간을, 1992년 평생 홀로 간직해온 아픔을 고백하고 가족들에게까지 외면당했던 당신의 외로운 싸움을, 일본은 그때나 지금이나 절대 헤아리지 못할 것입니다. 일본 정부가 역사를 왜곡하고, 일본의 나와 같은 세대들이 편협하고 왜곡된 역사를 의심하려 하지 않고 그대로 답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영화를 보기 전까지 당신의 외로운 싸움을 무지와 무관심을 방패 삼아 외면했던 나처럼요.



눈물이 당신의 생에 보낼 편지 앞을 막아설 때마다 나는 당신의 생전 사진을 돌려보았습니다.


아흔이 넘어서도 흐트러짐 없이 반듯하게 하루를 살아내는 당신에게 열여섯의 상처는 평생 어떤 짐이었을까, 헤아려보려다 그만두었습니다. 자꾸만 과거의 아픔에 갇혀 무기력한 울음을 삼키기만 하는 나를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울음을 멈춘 뒤 나는, 일본 대사관을 향해 꿋꿋하게 앉아 자리를 지키는 소녀상처럼 당신이 생의 말미에 보인 굳은 의지를 지켜내는 일이 우리 세대가 당신의 생을 기릴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 시절의 당신들이 아픔을 다져 만들어놓은 대한민국에서 마음 편하게 자란 나는, 이제 당신을 대신해 당신 생의 증인이 되려 합니다. 나는 역사를 배웠고, 당신의 생을 알았고, 당신의 길고 길었던 외로운 싸움을 두 눈으로 목격했기 때문입니다. 당신을 대신해 그들에게 용서를 내어주진 않겠지만, 당신을 위해서 끝까지 기억하고 끊임없이 외치겠습니다. 


당신이 평생 그러했던 것처럼

우리 모두는 그날의 역사를 잊지 않았고, 

그저 일본 정부가 피해자 개개인을 향해 마음을 다해 사과하기를 바랄 뿐이라고 말입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우리가 우리일 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