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라는
새로운 세계가 열릴 때

by 김진빈




돌이켜보면 사는 동안 매 순간이 그랬다. 몇십 년을 단단하게 지켜온 내 삶에 누군가를 들여놓는 일은 나의 어떤 부분을 양보하고 상대의 일부분을 배려받는, 서로를 위한 마음로 인해 지속됐다. 몇 년을 지속해왔던 관계도, 더는 내 마음이 양보하고 싶지 않거나 더는 상대의 마음이 배려하고 싶지 않아 진 위태로운 관계가 되면 늘 불안이 따랐다. 그리고 그 관계는 끝이 뻔했다.


꼬박 10년. 그동안 우리 사이에는 '우리'라고 규정 지을 수 있는 단단하고 작은 세계가 생겼다. 물론 결혼을 하고 함께 살면서 매일 같이 전혀 새로운 세계가 열린다. 10년이나 가장 가까운 사이였던 우리가 이렇게나 다른 사람들이었구나 깨달을 때면, 우리가 어떻게 결혼할 수 있었을까 생각할 때가 있다. 그때마다 결론은 하나다. 우리가 우리로서 함께 하는 시간 안에는 언제나 서로의 가치관과 시간을 배려하고 나를 양보하는 마음이 깃들어 있다.


사실 내가 가진 마음보다 남편의 것이 크다고 느낄 때가 많은데, 이를 테면 이런 식이다. 비교적 출퇴근 시간이 규칙적인 남편은 집으로 퇴근한 뒤에도 여전히 사무용 테이블에 앉아 울상을 짓고 있는 재택근무자를 발견하는 일이 잦다. 그 즉시, 그러니까 귀에 꽂힌 에어팟을 빼는 일도 잊은 채(어쩌면 잊어버린 척을 하며) 그대로 방문을 쾅 닫아버린다. 밥을 먹고 일을 좀 더 하면 된다는 나와 몇 번의 실랑이 끝에 그가 내린 특단의 조치로, 남편이 저녁을 준비하는 사이 노심초사하며 몇 번이고 주방을 들여다볼 프로 눈칫밥 야근러를 위한 양보이자 배려다.


밥 짓는 냄새가 닫힌 문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면, 그제야 정말 퇴근을 해야겠다는 이성이 나를 찾아온다. 문이 열림과 동시에 남편은 신이 난 목소리로 "이제 밥 먹을까? 준비됐어?"라고 묻는다. 그럴 때마다 그의 표정에서 산책을 가자는 말에 득달같이 채비를 마치는 친구의 강아지가 떠오르기도 한다. 그 뒤로 입으로는 밥을 먹고 귀로는 남편의 이야기를 듣는 나와, 하나의 입으로도 여러 일을 멀끔히 해내는 남편의 시간이 있다. 수다는 수다를 낳고, 그런 시간을 보내다 보면 이따금 내 야근이 잦을 때 이 사람은 어떻게 이 많은 수다를 참아낼까, 하는 물음표를 그리곤 한다. (물론 유난히 일이 많아 야근이 잦아지는 달이면 마감 끝에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며 꾹꾹 눌러둔 말을 저 멀리서부터 흩뿌리며 달려오는 남편이 있다. 그의 전생은 분명 강아지였을 테다.)


하루는 카페에 나란히 앉아 각자의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나는 책과 메모지, 펜을 챙겼고 남편은 맥북과 아이패드와 에어팟, 그리고 몇 개의 외장하드와 SSD를 챙겼다. 카페와 삶을 대하는 자세 또한 사뭇 다르다. 내가 책 한 권의 한 파트를 읽어 내려가는 사이 남편의 관심사는 영상 편집 프로그램에서 유튜브로, 다시 친구가 물어본 어떤 브랜드의 홈페이지에서 구글 어스로 이동했다. 잠깐 집중력이 흐트러졌을 때 구글 어스로 전 세계를 여행 중인 그에게 슬쩍 무엇을 하는지 물었다. 기다렸다는 듯 다짜고짜 우리가 살았던 호주 시드니 채스우드의 아파트먼트를 확대해 보여주는 탓에 나도 모르게 엄마 같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 역시 물어보길 잘했지!) 남편은 내 웃음의 의미를 모르겠다는 듯 왜, 하고 되물어왔다.


"도대체 어떤 사람들이 이걸 이용하는가 했더니, 내 남편이네."


그 후로 자신이 왜 구글 어스로 이런 것들을 찾아보는지 구구절절 설명해낸다. 나는 또 그게 신기해 이야기 속을 헤집고 이유를 찾는다. 늘 편집자적 마인드로 세상의 모든 일을 한 발자국 떨어져 관전하듯 대하는 나와는 달리, 남편은 모든 것의 주체가 된다. 새로운 것들을 빠르게 경험하며 자신의 의견을 내놓는 그를 보면서 어쩌면 새로 출시되는 모든 것이 남편 같은 사람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일까, 하는 얼토당토않은 결론을 내리기도 한다.


한참 뒤 책의 어느 한 구절이 마음에 닿아 멍하니 다음으로 넘어가지 못하던 나는 '급' 따가운 시선이 느껴져 옆을 봤다. 물음표를 그리며 내 행동을 곁눈질로 훔쳐보는 남편이 있다. 왜, 하고 물었더니 내가 넘어가지 못했던 문장을 한 번 따라 읽고는 배시시 웃는다. 그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는 사람처럼 다시 구글 어스의 세계로 돌아가버렸다. 잠시 무척이나 신기한 사람이다, 라는 생각을 했다. 호기심 가득한 성미에 내가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궁금해 참기 어려우면서도, 그 시간을 방해하진 않을까 염려하는 일종의 배려라는 결론에 닿았다. (그가 하는 모든 배려가 내게 들키지 않은 것처럼 모른 척해주는 일 또한 나의 배려다.)


그 후로 다시 책 속에 빠져 집으로 가기로 약속한 시간을 넘겼을 때였다. 옆에 앉은 이가 온몸을 쓰며 무언가 하고 있었고, 덕분에 책 속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곧바로 온 카페 사람들이 쳐다볼 정도로 빵 터져버렸다. 남편은 집에 가기 위해 맥북 전원을 끈 지 오래였고, 아이패드를 만지작 거리다 라이다 센서의 성능이 궁금해졌단다. 커다란 아이패드로 어느 끝 지점과 지점을 연신 잇고 있는 해괴망측한 포즈를 한 그를 발견하고 빵 터지자 민망했는지 스펙표 상의 수치가 정확한지 측정해보고 있었다고 덧붙였다. 그때가 남편이 책에 빠진 나를 버려두고 혈혈단신으로 구글 어스와 함께 호주 시드니와 퍼스, 네팔 히말라야의 안나푸르나, 미국 뉴욕의 타임스퀘어를 다녀온 뒤였다.


우리는 이렇게나 다른 사람이다. 다른 점들을 나열하라고 하면 몇 날 밤을 새울 수 있지만, 다르다는 사실이 불편하지 않다. 오히려 이제는 서로의 다름을 궁금해하고 신기해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우리의 영화는 점점 더 로맨스보다는 시트콤에 가까워지는 듯하다.) 이렇게 될 수 있었던 데는 서로를 존중하고 내 것을 양보해 상대를 배려할 줄 아는 단단한 마음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 사실을 깨닫는데 우리도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누군가 오랜 연애의 비결이나 오랜 연애 끝에 결혼한 비결을 묻는다면 누군가 나의 세계에 들어와 우리라는 새로운 세계가 열릴 때 상대를 받아들일 준비를 하라고 말해주고 싶다. 내 것을 모두 포기하라는 말이 아니다. 그저 상대의 것도 나만큼 큰 것임을, 우리라는 세계에는 나와 네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이해하라는 뜻이다. 그리고 그의 세계를 같이 헤매 줄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밤에는 잠들기 전 나사 사이트에서 목성에 관한 자료를 봐야겠다. 오늘 오전, 남편이 목성의 위성 중 하나인 '이오'의 화산 활동에 대해 카카오톡을 보내왔기 때문이다.


즐거운 오늘의 숙제, 즐거운(?) 오늘의 산!





2020년 11월 26일 때때로 신혼일기

Written, Photographed by @Jimbeen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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