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다시 용기를 내

by 김진빈




이따금 혼자라는 고요 속에 갇힐 때면 글로 쓰지 않아 사라질 위기에 처한 감정들을 꺼내 곱씹는다. 머릿속에서 갈 길을 잃은 채 간신히 연명하고 있는 기억의 끄트머리를 부여잡고 그때의 마음들을 헤집기도 한다. 선명하지 않은 어느 날의 기억은, 기억처럼 이렇다 할 형태조차 남아있지 않은 그때의 감정은, 시간을 타고 흘러 이미 절반이 무의식의 세계로 떠나가버렸다. 딱 절반만큼의 기억과 감정에 의지한 채 헤집어 놓은 마음들에서 나는 또 그때와 같거나 전혀 다른 형태의 기억을 주워 조각조각 이어 붙인다.


이 시간과 저 감정을 가져다 붙이면 그 세계 안에 사는 나와 누군가는 그 감정으로 살아가고, 그것이 다시 나의 기억이 된다. 철 지난 기쁨은 지난하다 여겨지고 당시의 환희는 환과 희 중 절반이 사라져 수그러들기 일쑤다. 슬픔은 더 깊어지거나 잊히고 애틋한 마음은 나를, 나의 세계 안에 사는 또 다른 누군가를 함부로 보듬는다. 슬픔과 기쁨이 충돌할 때는 늘 전자를 가라앉히고 후자를 택하는 일로 아픔에 안녕을 고한다. 내게 남아 있는 건 고작 조각 기억뿐이고, 절반에 의지한 채 입맛대로 상상해 이야기를 채워나가야 할 때면 글로 써 두지 않아 휘발된 절반만큼의 마음들이 못내 아쉽다.


홀로 감정의 소용돌이 안에 갇힐 때면 다른 사람의 마음에도 부지런히 기웃거린다. 책이나 영화, 드라마에서 누군가의 삶을 만난다. 혹은 주변 사람의 삶에 성큼 들어가는, 조금 뜬금없는 질문들로 상대를 당황시키기도 한다. 때때로 목적지만 정한 채 무작정 집을 나서는 날도 있다. 고작 한 시간 남짓한 거리를 아주 느린 속도로 쫓으며 거리에, 지하철에, 버스에 흐트러진 누군가의 시간들을 줍는다. 음악이 흘러나오지 않는 이어폰을 끼고 가끔씩 눈이 부신 건너편 창 너머에 시선을 둔 채 누군가의 목소리에서, 표정에서, 건너편 사람이 읽는 책 표지에서 오늘의 장면들을 수집한다. 그들의 삶과 내 것을 저울질하며 원인을 알 수 없었던 어떤 마음의 사유를 찾곤 한다. 반대로 내 것을 꺼내 그들의 삶에 대입해보며 말이나 글의 형태로 전달되지 않은 상대의 마음을 가늠해보기도 한다.


무의식의 세계로 사라져 가는 기억에서, 혹은 하루의 삶 중 어딘가에서 만난 누군가의 시간에서 어떤 마음들이 발현되고 곧 증발되는 장면을 목격할 때면 나는 이상한 책임감을 느낀다. 기억은 섬광 같은 것이라고. 내 안에 사는 쓰는 병에 걸린 또 다른 이가 잊기 싫은, 애틋하게 여기는 순간들이 늘어갈수록 의미를 알 수 없는 끄적거림으로 채워진 책과 노트는 쌓여가고, 아이폰 메모 앱은 사진 앱이 그러하듯 정리할 수 없을 정도로 매일의 마음들이 꽉 들어차 있다.


그리하여 나는 쓴다. 나와 누군가의 마음들을 잊지 않기 위해 애쓰고, 마음 창고에 차곡차곡 모아놓은 반짝거리는 글감들 때문에 쓴다. 그리운 이의 마음을 기다리는 어떤 이에게 헐레벌떡 뛰어와 편지를 전하는 어느 다정한 시골마을 우체부처럼 마음과 마음을 잇기 위해 부단히 시간을 쓰고 마음을 쓴다. 오래전 연락이 끊긴 친구에게 그때의 우리를 말하며 기나 긴 안부를 묻듯 지나간 시간과 마음을 꾹꾹 눌러 담아 글을 쓴다. 나의 마음은 이러했다고. 너도 그렇지 않았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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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나를 쓰지 못하게 만드는 것 또한 마음이다. 마음 창고에 쌓여 있는 것들은 모두 절반은 내 생에, 나머지 절반은 타인의 생에 속한 이야기다. 조각 기억에 의지한 채 일정 부분을 상상으로 채운 이야기는 철저히 나로부터 발현한 마음이다. 주관으로부터 편집된 세계에 등장하는 타인은 자신의 것을 내보일 수 없다. 사진작가 다이안 아버스(Diane Arbus)는 카메라란 사진을 찍는 사람이 사진에 찍히는 사람에게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은 채, 도덕적 한계와 사회적 금기를 넘나들도록 해주는 일종의 여권 같은 존재라고 한 바 있다. 21세기에 이 관점이 통할 리 만무하지만, 뚜렷한 물성이 없는 이야기의 세계에선 이러한 일들이 더 비일비재하고 내가 쓰는 방식 또한 다르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첫 에세이가 세상에 나오자마자 문이 달린 책장 깊숙이 책을 넣어두고 혼자만의 동굴로 기어들어간 이유도 같다. 나로부터 발현된 타인의 마음이 진짜라는 확신이 없어졌고, 동시에 내 것도 의심되기 시작했다. 또 그것들을 더 면밀히 살피지 못했다는 자책에 시달렸다. 이후 마음 창고 안에 갇혀 빛을 보지 못하는 마음들이 쌓여갔다. 오래 쓰지 못했다. 그때 나의 옆을 지켜준 L은 “그래서 네 이야기가 좋아. 미처 알지 못했던 내 모습, 내 마음을 살뜰히 들여다 봐주거든. 내 감정을 사소한 것 하나까지 전부 물어보고 쓴다면 그건 네 이야기가 아니라 내 다큐멘터리잖아.”라고 심심한 위로를 건넸다. 내 안에 사는 쓰는 병에 걸린 또 다른 이는 L의 말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마음 창고에 기록해두도록 만들었다. 그리고는 동굴 입구를 활짝 열어버렸다.


사실 아직도 나를 쓰지 못하게 만드는 요소가 도처에 깔려 있다. 그럼에도 다시 용기를 내 쓴다. 나와 내 세계를 공유하는 누군가의 생을, 매일의 마음을 살뜰히 들여다 봐 주는 마음으로 쓴다. 물론 우리의 세계를 무너트리지 않는다는 더 단단한 책임감을 갖고.




2020년 12월 13일

Written, Photographed by @Jimbeen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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