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고 끝에 결단을 내렸다. 이윽고 장바구니 속 원목 탁상시계가 집으로 도착했을 때 남편이 물었다. 시계? 그러니까 저 물음 뒤로 남편의 머릿속엔 집 안의 온갖 시계가 스쳐 갔을 테다. 침실 알람 시계부터 작업방 벽시계, PC와 노트북 그리고 스마트폰 시계, 때때로 손목시계까지. 지금은 몇 시 몇 분이고, 이제 약속한 어떤 시간까지 이 정도 남았어. 지금이라도 뛰어나가면 늦지 않게 지하철을 탈거고, 이제 진짜 메일을 보내지 않으면 마감에 늦어. 집 안에는 어느 하나 다정하지 않은 시계가 없었다. 분침과 초침으로부터 시작된 시간은 잘도 촉박하게 흘렀다. 쉼의 공간인 거실에 구태여 시계를 두지 않은 이유이기도 했다.
반면 시계 없는 쉼에는 부작용이 따랐다. 쉼의 카테고리로 들어선 시간은 채찍질 없이는 무한으로 흘렀다. 저녁을 먹으면서 보기 시작한 티브이에 빠져 잘 시간을 훌쩍 넘기거나, 쉬는 날 OTT 서비스로 드라마 한 시즌을 끝내버리는 일이 잦아졌다. 시계가 없는 세상은 시간을 세는 단위가 없는 세상처럼 굴었다. 쉼의 공간에는 그저 적당히 존재감을 드러내면서 분, 초 단위의 촉박한 다정함을 모르는 시계가 필요했다. 내친김에 무소음에 숫자도 초침도 없었으면 했다. 쉬는 시간을 방해하는 채찍질은 상상하기도 싫었으니까.
두 달을 기다려 받은 작은 원목 탁상시계는 잠시 쉼의 집중이 흐트러지는 순간 그제야 제 존재를 드러낸다. 무언가를 한참 보고 듣다가 배꼽시계가 울리는 듯하면 힐끔. 졸음이 쏟아지는 것 같으면 또 힐끔. 그마저도 정각이 아니고서는 자세히 들여다 본들 분, 초 단위 정확한 시간을 알기 어렵다. 오로지 시작으로부터 지금까지 대략 얼마만큼의 시간을 지나왔는지, 지금 내가 어느 정도 시간에 머물러 있는지에 대해서만 뭉뚱그려 말할 뿐이다. 매일이 느긋하지만 그렇다고 영영 게을러지지 않도록.
도구는 콘텐츠 속에서 늘 이런 방식으로 사람에게 자신의 존재를 말해왔다. 나는 이런 물건이야. 지금의 네 삶을 이렇게나 바꿔 놓을 수 있어. 어때? 다만 잠재적 구매자를 향한 도구의 말 뒤에는 존재감을 각인시켜 주는 연결자가 있다. 잠재적 구매자의 마음을 움직일 만한 쓸모 포인트를 찾아 다양한 언어로 표현해 내는 사람들. 이커머스의 기획자나 카피라이터, 각종 매체의 에디터, PD, 작가까지. 도구와 관련된 콘텐츠를 만들고 생산해 내는 모든 이가 연결자의 마음으로 도구 즉, 물건을 바라보고 대한다.
“별은 어떻게 찍어야 잘 나오는지 모르겠어.”
“스마트폰으로는 선명하게 담기 어렵지.”
함께 여행을 다녀오는 길에 엄마는 대뜸 카메라에 대해 물었다. 엄마가 스마트폰 카메라로 사진을 찍으며 이제 막 사진에 재미를 느끼기 시작했을 즈음이었다. 하늘과 꽃으로 시작한 피사체는 어느새 풍경을 지나 달과 별까지 가 있었다. 내가 카메라 전문지 에디터 3년 차에 접어들었을 때 관심을 가졌던 분야였다. 그럼 좋은 카메라를 사야 하는 건가? 사뭇 진지한 물음에 자세를 고쳐 앉아 상담사의 제스처를 취했다. 별도 찍히는 카메라 한 대 사줘?라고 물으니 엄마는 무거워? 하고 되물어온다. 셀카봉도 무거운데 커다란 카메라까지 짊어질 자신이 없단다. 사진을 찍겠다는 사람이 무겁다고 찍기를 포기한다니. 자세가 안 되어 있고만. 나는 어깨에 바짝 힘을 주고 엄마를 한 번 더 설득해 보기로 한다.
“사진을 찍다 보면 좋은 사진을 찍기 위해선 결국 카메라를 사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될 거야.”
“스마트폰으로도 충분히 좋은 사진을 찍을 수 있잖아.”
할 말을 잃었다. 그렇지. 기준을 어디다 두는지에 따라 호는 저마다 다 다르지. 스마트폰 카메라로 충분한 사람도 얼마든지 있잖아. 물건의 가치는 결국 필요로 하는 이가 정하는 법이니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니 거실에 놓인 원목 탁상시계가 다시 떠올랐다. 결이 비슷한 티비장 위가 좋겠어.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가 의식할 때만 시간을 확인하고 싶어. 물건의 자리를 정해주며 신이 난 나와 달리 남편은 심드렁했다. 이 시계의 적당한 존재감으로 인한 부작용은 시계를 시계로 보지 못하는 남편이 느꼈다. 남편은 같이 거실에서 티브이를 보다가, 밥을 먹다가, 수다를 떨다가 매번 지금 몇 시지? 하고 물어왔다. 저기 시계 있잖아. 대략 11시 10분쯤 됐겠네. 내 핀잔에 남편이 원목 탁상시계를 응시하면서 입을 삐쭉 내밀었다. 저 시계는 도대체가 정확한 시간을 모르겠어. 그러니까 남편에게 시계는 정확한 시간을 알려주는 물건이고 원목 탁상시계는 그의 기준에서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장식품 정도일 테다. 아니, 티비장의 먼지를 제거할 때 투덜거리는 걸 보면 장식품으로도 쳐주지 않는 것 같지만.
예술의 세계에서 도구를 만한다는 것이 그렇다. 가장 먼저 개개인마다 같은 물건에 매기는 가치가 다르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필요와 욕구 사이를 오가며 물건의 가치를 발견해 줄 만한 사람에게 콘텐츠를 건넬 수 있다. 이커머스에서 티비장과 같은 결을 가진 원목 탁상시계를 발견했을 때 하필 나는 번아웃으로 지쳐 있었다. 동시에 쉼에도 적당한 바이오리듬이 있다는 사실을 몸소 깨우쳐가고 있었다. 상세페이지를 기획한 사람은 그 지점을 정확하게 건드렸다. 심플한 디자인을 기능적으로 풀어내다니 허를 정확히 찔렀다. 아마 같은 콘텐츠를 남편이 봤다면 심드렁하게 반응했겠지. 저게 기능할 수 있다고? 아니다. 어쩌면 애초에 상세페이지를 클릭조차 하지 않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주니어 에디터 시절 카메라 신제품이 나오면 론칭쇼나 제품의 상세 페이지를 보여주듯 해당 제품이 가진 모든 특징을 글로 쓰고 이를 뒷받침할 테스트 사진을 찍었다. 전하고 싶은 강점이 많아 할당된 지면에 욱여넣듯 원고를 넘기고 나면 파티션에 숨어 디자인팀에서 투덜거리는 소리를 감내해야 했다. 글자 크기를 줄이고 자간을 좁혀도 넘칠 때는 디자이너가 교정지에 빨간 글씨로 넘치는 분량을 표시해 준다. 코멘트에 느낌표가 세 개 이상 넘어가면 얼마나 무서운지, 그때는 이미 이런저런 디자인을 짜봐도 도저히 안 된다는 결론이 난 상태기 때문에 에디터가 원고를 드러내는 수밖에 없다.
기껏 빼곡히 채워 넣은 강점을 하나씩 드러내다 보면 이런 문장만 남는다. 당신이 이 장비를 사용한다면 그토록 소망하던 멋진 사진을 찍을 수 있습니다. 이 정도면 아주 강매꾼이 따로 없다. 알맹이 없는 글에 사진까지 빼야 할 때면 바이라인에서 내 이름을 지우고 싶기도 하다. 반면 상세페이지의 요약본처럼 특징을 열거해 놓은 문장만 주르륵 남을 때도 있다. 제품 카탈로그나 상세페이지는 철저히 브랜드의 입장에서 물건의 이모저모를 잘 소개해놓은 콘텐츠다. 하루는 선배가 내 리뷰를 보고 “이렇게 쓰면 상세페이지랑 다른 게 뭐야?”라는 코멘트를 남겼다. 문제는 내가 철저히 브랜드 입장에서 글을 쓰는 데 있었다. 브랜드 입장에서야 강조하고 싶은 강점이 많겠지만 잠재적 구매자의 입장에선 그 제품을 선택하는 데는 한 두 가지 뚜렷한 장점만 와닿을 테다.
예술의 감각으로 바라보는 사진의 세계에서 도구에 대해 말하려면 강매는 없어야 한다. 자칫하다간 에디터가 미사여구로 잔뜩 부풀려 놓은 가치에 혹해 누군가는 사치를 부릴 수도 있다. 선배의 말에서 깨달음을 얻은 뒤로 콘텐츠를 만들 때 세 가지를 잊지 않는다. 첫째 콘텐츠를 볼 잠재적 구매자를 상상한다. 둘째 우리가 하는 일은 그들에게 도구의 쓸모를 찾아 인지시켜주는 것이다. 셋째 단 하나의 강점을 말하더라도 도구와 잠재적 구매자를 잇는 연결자로서 콘텐츠 안에서 책임을 다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