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을 하나 하겠다. 심청이의 아버지는? 당연하게 심봉사를 외쳤다면 표준어대국어사전에서 ‘봉사’의 뜻을 검색해 보자. 아직도 심봉사라는 표현을 써도 괜찮다고 생각하는가? 사전에 따르면 봉사는 시각장애인을 낮잡아 이르는 말이다. 봉사라는 단어는 본디 조선시대 때 천문, 지리, 관측 따위를 맡아보던 관아와 외국어 통번역을 맡아보던 관아에서 일하는 종 8품의 벼슬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이 벼슬에 시각장애인이 많이 기용되었고, 봉사는 시대적 인식의 영향으로 시각장애인을 낮잡아 이르는 말이 된다. 가까운 과거에는 장애를 재앙으로 여기는 일이 허다했기 때문이다. 심봉사의 봉사가 이중적 의미를 담고 있다 하더라도 벼슬이 완전히 사라지고 그 의미가 희석된 현재의 심봉사는 오해의 소지가 다분한 표현인 셈이다.
봉사뿐 아니라 귀머거리, 벙어리 등도 장애를 재앙으로 여기던 시절에 청각장애인과 언어장애인을 낮잡아 이르던 말이다. 세월은 흘렀고 시대는 변했다. 21세기는 모두의 권리가 평등하게 여겨지는 시대고 호칭 또한 존중을 담은 표현에 손을 들어준다. 사람들은 이러한 변화에 기민하게 반응하고 심봉사 대신 심학규라는 본명을 불러야 한다는 문제의식 속에 살고 있다. 콘텐츠를 만드는 이라면 이처럼 단어 하나를 선택할 때도 이데올로기에 맞는 물살을 탈 수 있어야 한다. 시대에 역행하는 길로 들어서는 순간 애써 만든 콘텐츠 자체가 재평가되는 일도 허다하기 때문이다. 설상가상 한 번 발행돼 온라인 세상을 타고 일파만파 퍼진 콘텐츠는 정정이 불가하니.
내게도 심봉사와 심학규급 논쟁을 벌여야 하는 사건이 있었다. 카메라 전문지 에디터에게는 매달 기획 기사 진행을 위한 신제품이 주어진다. 브랜드에서 신제품의 스펙과 특징을 공개하면 에디터는 가장 먼저 해당 카메라를 사용할 만한 타깃을 상정한다. 타깃은 곧 잠재적 구매자를 의미한다. 그래야 어떤 포인트를 소구점으로 잡아 기획 기사를 이끌어갈지가 보다 선명해진다. 몇 해 전 한 카메라 브랜드에서 단순한 인터페이스의 작고 가벼운 렌즈 일체형 카메라를 출시했다. 렌즈는 멀리 있는 사물을 바로 눈앞에 있는 상황처럼 당겨 담는 망원 렌즈를 택해 마치 망원경처럼 활용 가능하다는 점이 주된 소구 포인트였다.
해당 카메라는 화질이나 스펙이 출중한 부류는 아니었다. 오히려 단순하지만 쓰임이 명확한 부류에 속했다. 타깃이 선명하다는 의미다. 이 카메라는 모서리 라인이 둥글게 빠진 직사각형 모양으로 동글동글 친근한 외모를 가졌다. 엄지손가락으로 카메라 아랫단을 받치고 엄지를 제외한 나머지 손가락으로 윗단을 거머쥐었을 때 카메라의 3/4을 감싸는 형태가 됐다. 어린아이도 한 손으로 운용 가능할 정도의 크기로 무게도 무척 가벼웠다. 직사각형 한쪽 면에 눈을 가져다 대 카메라 너머의 대상을 집중적으로 바라보는 파인더가 덧대진 모양새로 마치 옛날에 집집마다 한 대씩 있었던 가정용 비디오 캠코더를 떠오르게 했다. 언뜻 보면 장난감 단망경처럼 보이기도 했다. 여기까지 카메라를 탐색하고 나니 ‘아이들의 장난감’이라는 키워드가 머릿속에 스쳤다. 다만 무릎을 탁 치기엔 일렀다. 타깃이 상세할수록 콘텐츠의 깊이가 달라지지 않던가.
조금 더 확실한 포인트를 찾아야 했다. 이 카메라의 핵심은 망원경과 카메라의 강점을 모두 가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평소엔 망원경 기능으로 사용하다가 사진이나 영상으로 기록해두고 싶은 순간을 만나면 버튼 한 번으로 손쉽게 촬영 가능했다. 빈 종이와 펜을 들어 어린아이가 망원의 눈으로 할 만한 것들을 쭉 적어나갔다. 스포츠 경기 관람, 공연 관람, 자연 탐조…. 머릿속에 문득 동물원 촬영에서 만난 아이들의 손이 영상의 형태로 재생됐다. 유레카! 이 카메라라면 우리 안에 갇혀 있어 망원경 없이는 가까이서 보기 어려운 동물원의 동물을 쉽게 관찰하고 이를 기록하기 좋겠다. 서울대공원에 엄마 아빠 손을 잡고 온 어린아이들 틈에서 어린아이가 되어보기로 했다. 카메라를 들고 키를 낮춰 동물들을 관찰하고 그들의 시선에서 사진을 촬영했다.
재료는 준비됐다. 이제 형태를 고민할 차례였다. 아이들을 위한 도구는 타깃이 둘로 나뉜다. 직접 사용하는 사람은 아이들이지만 비용을 지불하는 이는 부모다. 부모의 마음을 움직여야 구매가 성립된다. 촬영 결과물이 아이들에게 어떤 도움이 될까. 고민 끝에 관찰 일지 형태로 기획 기사 디자인을 요청했다. 아이를 둔 부모 입장에선 아이가 흥미를 가질만한 놀잇감이 학습 효과도 있다면 마음이 움직이지 않던가. 결과는 대성공. 브랜드 담당자가 입이 마르도록 칭찬하더니 자사 프로모션 때 해당 기획을 쓰고 싶다는 연락을 취해왔다.
문제는 그로부터 1년여 후 예상치 못한 곳에서 발견됐다. 매달 사진 관련 서적을 리뷰하는 연재 콘텐츠에 이사 레슈코의 <사로잡는 얼굴들>을 소개하면서 심봉사는 심학규여야 한다는 사실을 여실히 깨달았다. <사로잡는 얼굴들>은 사진작가 이사 레슈코가 10년간 미국 전역의 생추어리에서 담아 온 나이 든 농장동물들의 사진집이다. 생추어리는 공장식 축산 시스템에서 구조된 동물들이 자연 상태에 가까운 환경에서 살도록 조성한 보호 시설이다. 공장식 축산 시스템 안에서 대부분 가축은 어린 나이에 죽음을 맞는다. 나이 듦이 허용되지 않는 동물의 세계로 인해 우리는 한 번도 가축의 늙음을 본 적이 없다. 그 얼굴들을 이사 레슈코의 사진으로 마주하고 있자니 자연스레 동물권에 관심이 갔다. 그리고 몇 주간 이사 레슈코가 사진집을 통해 던진 자유롭고 존엄한 삶과 죽음은 무엇일까, 어떤 삶의 가치를 판단하거나 그 삶을 빼앗거나 그 삶을 완성하게 하는 힘은 누구한테 있는 것일까 같은 질문 속을 유영했다.
“이제 우리는 뒤로 물러나서 우리가 하고 있는 일들을 살펴보고 우리의 방식을 변화시킬 방안을 찾아야 한다. 모든 동물 중에서 인간은 지구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다. 우리에게는 아직 스스로의 잘못을 반추하고 지구를 치유하고 풍부한 종 다양성을 지켜낼 기회가 남아있다.”
비슷한 시기에 내셔널지오그래픽 사진전 <포토아크, 너의 이름은>을 봤다. 전시장은 30여 년간 내셔널지오그래픽 작가로 활동하며 약 12,000종의 생명체를 담아 온 사진작가 조엘 사토리가 담은 멸종위기종의 사진으로 가득차 있었다. 동시에 멸종위기종을 보호하기 위한 외국의 대처 사례가 빼곡히 기록돼 있었다. 외국의 많은 동물원과 수족관은 이미 멸종위기 동물의 개체수를 늘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동물원이 사람들의 즐거움과 욕망을 위한 공간이 아닌 동물을 보호하기 위한 공간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좁은 우리에 축 늘어져 있던 사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하필이면 그걸 망원 렌즈로 당겨 담았다니. 지나치게 선명한 기억이었다.
더 세심했어야 했다. 어린아이를 타깃으로 콘텐츠를 만들면서 최근 화두가 되고 있는 동물권에 대한 생각을 미처 하지 못하다니. 이렇게 조금만 주변을 둘러보면 책, 전시, 영상 등 다양한 형태로 동물의 권리에 대해 말하는 콘텐츠가 즐비한데. 사실 콘텐츠를 만드는 에디터도 사람인지라 나도 모르게 심봉사라는 표현을 쓰는 아뿔싸한 순간이 너무도 많다. 다만 어떤 브랜드를 대변해 콘텐츠를 만들 때는 내 기획이 제품의 인상을 결정짓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 결론적으로 나는 이 일이 있은 후 매일 뉴스를 챙겨 보고 다양한 분야의 뉴스레터를 구독하기 시작했다. 모든 시대적 관점을 꿰뚫고 있지는 못하겠지만 적어도 굵직한 시대의 흐름을 놓치는 일은 미연에 방지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