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그다의 프롤로그
포켓몬스터에는 두더지와 닮은 구석이 많은 포켓몬이 등장한다. 그의 이름은 디그다. 파다라는 뜻을 가진 dig에서 출발했다. 디그다는 부끄럼이 많고 어둠을 좋아해 거의 땅속에서 숨어 지낸다. 그러다 지하 1m 정도를 파고들어 나무뿌리를 씹어 먹으며 산다. 그의 특기는 모래에 숨기와 개미지옥이다. 이토록 디깅스러운 포켓몬이라니. 게다가 디그다가 구멍을 파 지나간 땅은 비옥해져 맛있는 채소가 재배된다. 디깅의 결과물 또한 세상에 이롭다. ‘갓벽’이란 이럴 때 붙이는 칭호인가!
디깅(digging)의 사전적 정의는 파기, 채굴, 채광, 발굴이다. 일상에서의 디깅은 무엇을 잡고 판다는 의미로 결과는 발굴에 가깝다. 디그다가 땅속에서 지내다가 이따금 지하 1m까지 파고들어 찾아낸 나무뿌리 같이, 디깅은 저마다의 반짝이는 무언가를 발굴하는 기쁨이 수반된다. 이때 일종의 ‘덕후스러움’이 필요하다. 디깅을 주제로 책을 엮어보자는 아이디어가 나왔을 때 홀로 당황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덕후란 본디 어떤 분야에 미칠 정도로 빠져 있거나 전문가 이상으로 몰두해 있는 사람이 아니던가. 덕후의 대척점에 있는 사람으로서 꽤 오랫동안 내겐 디깅 DNA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어왔다. 20년 가까이 좋아한 일본 가수의 CD를 사모으며 같이 늙어가는 재미가 있다는 남편(그 가수는 벌써 지천명이 코앞이다), 정년퇴직을 앞둔 나이에 뒤늦게 덕질에 빠져 전국 완콘을 하고도 지각 한 번 하지 않는 엄마, 매번 새로운 것에 빠질 때마다 브랜드별 제품을 죄다 사모았다가 다른 것에 빠지면 과감하게 청산하고 새 디깅을 시작하는 선배, 좋아하는 PD의 예능이나 좋아하는 가수의 프로필을 나무위키보다 더 줄줄 꿰고 있는 친구까지. 이 정도는 돼야 디깅 DNA를 탑재하고 있다 할만하지 않을까. 그만큼 그들은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는 치명적인 매력을 가진 개미지옥에 제 발로 걸어 들어가는 사람들이니까. 내가 비슷한 유형의 사람을 그러모으는 재주가 있는지는 몰라도 내 주위에 디깅 DNA가 맥스인 친구들은 심지어 추진력도 12 기통 엔진 급이다.
오랫동안 공식처럼 믿어왔던 ‘디깅=덕후’를 깬 건 디그다가 꼭 1m 이상을 파고들어 나무뿌리를 씹어 먹으며 닥트리오로 진화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부터다. 나는 꽤 오랫동안 새를 관찰해 왔다. 시작은 평범했다. 또 한 번의 마감을 하고 일찍 퇴근하던 날 이대로 집으로 가기엔 볕이 과하게 좋았다. 커피를 사 들고 집 근처 호수를 걸었다. 벤치에 앉아 혼자 호수를 구경하다가 일몰쯤 무리 지어 퇴근하는 오리 떼를 봤다. 온갖 회사가 즐비한 가산디지털단지의 오후 6시 풍경 같았달까. 괜히 나를 대입해 봤다. 또 다른 날에는 호수에 비친 일몰빛을 몰고 다니는 오리를 한참 구경했다. 오리가 꽤 오래 잠영을 하더니 이내 아주 먼 거리에서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무얼 하든 긴 호흡으로 인내하는 걸 잘하는 나를 비춰 봤다. 그 뒤로 망원경을 구입했다. 구경이 본격 관찰이 되는 순간이었다. 늦봄엔 만삭의 몸을 하고 동료 플레이와 함께 새 관찰에 나섰다. 물닭 부부가 알을 낳았는지 열심히 둥지의 보강 공사를 하고 있었다. 풀숲에 가려진 둥지를 망원경으로 관찰하며 남편과 곧 태어날 아이의 방을 꾸미는 상상을 했다. 한 달 뒤 자연분만을 하고 싶다는 내게 의사는 하루 2시간 걷기를 제안했다. 남편과 같이 호수를 돌며 갓 태어난 물닭 새끼들의 물질을 봤다. 그들은 부모를 따라 돌 위에 서서 세수를 하기도, 부모에게 열심히 수영하는 법을 배우기도 했다. 문득 늦봄에 만났던 그때 그 알에서 태어난 새끼들일까 하는 생각이 들어 뭉클해졌다. 파워 N의 상상이 어디까지 갔는지는 뻔한 결말이니 여기서부터는 말을 아끼겠다.
그 사이 플레이는 본격 탐조에 나섰다. 다양한 서적으로 새에 대한 공부를 시작하더니 탐조 카페나 유명한 탐조 장소를 찾아다녔다. 망원경과 망원 렌즈를 샀고 OOTD는 늘 탐조 룩. 그렇게 전문가급으로 새를 관찰하고 사진과 영상을 찍었다. 다시 만났을 때 플레이는 새의 종류를 줄줄 읊었고 내게 낯선 탐조 용어를 알려주었다. 열정이 활활 타오르는 플레이의 등 뒤로 닥트리오가 비췄다. 닥트닥트닥트! 플레이가 닥트리오 울음소리를 내며 새를 만나기 위해 이곳저곳을 종횡무진하는 상상을 했다(미안). 그때까지도 나는 관찰의 단계에 머물러 있었다. 새의 종류가 궁금하다거나 도구를 넓힐 생각이 들지 않았다. 새를 관찰하는 일은 내게 새들의 움직임을 바라보고 이따금 내 마음을 돌볼 새멍 정도의 역할이었다. 나는 새에 있어서는 아직 1m도 채 파지 못한 디그다로 머무르기로 했다. 물론 언제 나무뿌리를 씹어 먹으며 닥트닥트닥트를 내지를지는 알 수 없는 일.
진화하지 않았다고 해서 디그다로 일궈온 시간이 모두 디깅이 아니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보통 내 디깅은 구경 > 관찰 > 수집 > 몰두의 단계로 이루어진다. 수집이나 몰두의 단계까지 가지 않았다고 해서 디깅이 제로가 되진 않는다. 흥미와 관심을 느끼는 구경의 단계와 조금 더 본격적으로 대상을 주의 깊게 살펴보는 관찰의 단계가 있어야 내 주관대로 수집하고 몰두해 비로소 닥트리오로 진화한다. 때로는 관찰 단계에 있던 어떤 취미가 전혀 다른 쪽으로 뻗어나가 수집욕을 자극하기도 한다. 사실 디깅과 관련된 첫 원고를 준비하며 이 모든 것을 깨달았다. 그도 그럴 것이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나는 “무언가를 그렇게까지 좋아해 본 경험이 없어”라는 말을 달고 살았다. ‘호’의 개념을 deep으로만 생각했기 때문이다. dig가 있어야 deep이 되는 줄도 모르고. 우리 모두 호의 시작점엔 디그다였고, 조금이라도 흥미를 보이는 무언가가 있다면 디깅은 모래에 숨기 위한 얕은 구덩이를 파는 일로부터 시작된다. 개미지옥에 빠져 수집과 몰두의 세계로 걸어 들어가는 일 또한 결국 모래 구덩이를 만든 첫 삽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니. 이 책에서 말할 내 디깅 역시 대부분 구경과 관찰 단계에 있는 것들이고 이따금 수집과 몰두 어느 사이에 있는 것들이다. 디깅을 어렵게만 생각했는데, 얕은 구덩이라도 끼워줄 수 있다 결론 내리니 쓰고 싶은 주제가 많아져 오히려 큰일이다.
디그다! 디그다! 나는 여전히 무언가를 디깅하기 시작할 때는 디그다와 같은 소리를 낸다. 열심히 땅을 파내 숨어들 얕은 땅굴을 만들고 꽤 오랫동안 그 안을 마치 물속처럼 자유로이 유영한다. 아주 얕지만 좋아하는 것들로 천천히 시간을 채워간다. 이따금 고개를 들어 이 길이 맞나 확인할 때도 주변 사람들은 내가 땅속에 몸을 반쯤 감추고 무얼 하는지 잘 알아채지 못한다. 나 역시 이게 디깅인가? 싶을 정도로 나도 모르는 새에 스며든 잔잔한 무언가가 많기 때문이다. 잔잔한 마음으로 무언가를 구경하고 관찰하다 보면 내 것으로 체화되고 마침내 닥트리오로 진화할 온전한 디깅이 생길 거라는 믿음으로 오늘도 여러 구덩이에 발을 걸친다. 이 책을 읽을 소소한 취미 부자들과 함께 꼭 내지르고 싶다. 우리 모두 닥트닥트닥트!
매주 목요일 발행
현직 에디터와 번역가, 남에게 취향을 팔기보단 매번 본인이 사기만 하는 전직 마케터가 풀어내는 디깅의, 디깅에 의한, 디깅을 위한 에세이. 디깅을 처음 시작하는 분, 다수가 인정하는 프로 덕질러, 이 장르 저 장르 최애는 없고 차애만 가득한 우리 옆집 사는 분까지 두루두루 공감하며 읽을 수 있는 에세이를 지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