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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플레이 Dec 14. 2023

나는 늘 진심이었다

플레이의 프롤로그 그런데 이제 정의를 곁들인



   다섯 번째 회사에서 비자발적 퇴사를 했다. 애독자로 서점 한 코너에서 만나다 실무자가 되었던 카메라계의 몇 안 남은 전문지에서 말이다. 마치 이직을 밥 먹듯이 한 것처럼 보일까 이 글의 첫머리에 굳이 수를 언급하고 싶지 않았지만, 다시 건강보험 지역가입자가 되었으니 계산하지 않을 수가 없겠다.


   오래 붙어 있고 싶다는 생각이 자주, 꽤 강하게 들었던 전 직장은 개인이 업무 스케줄 관리만 잘하면 일의 프로세스를 바꾸든 재택근무를 하든 누가 뭐라고 하지 않는 노동 환경을 보장하고 있어서 자연스레 능률이 오를 수밖에 없었다. 온라인 구독 서비스를 운영하면서 편집부에서 발행하는 콘텐츠들의 홍보 플랜을 주로 고민하고 그에 따른 많은 작업들을 했지만, 이따금씩 온라인 원고나 지면에 글을 쓸 수 있는 기회도 주어졌다. 마케터의 업무를 하면서 동시에 매 월 한 권의 책을 만든다는 사심을 가득 채울 수 있던 것이다. 늘 일을 하면서 내가 얻을 수 있는 건 다 뽑아 먹고 간다는 생각으로 달려드니 클라이언트와 독자의 니즈를 만족시키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잠재되어 있던 나의 자아실현까지 할 수 있는 재밌는 콘텐츠 만들기가 계속됐다.



   회의를 할 때 내가 작은 원석을 내밀면 그것을 세공하고 다듬을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은 디그다였다. 멋스럽게 포장까지 마친 후 진열을 하면 나오는 애정이 담긴 피드백을 아끼지 않았고, 계속해서 등을 떠밀어 준 덕분에 지치지 않고 삽질을 계속할 수 있는 발판이 되었다. 


   디깅에 관한 콘텐츠를 만들자고 처음 제안했던 건 나오였다. 카메라 신제품 리뷰나 관련 장비를 활용한 촬영법 기사가 주를 이루는 것이 전문지의 역할이지만, 가벼이 읽을 수 있는 스낵 콘텐츠로 다양한 독자층을 확보하는 것 또한 포기할 수 없었기에 고안해 낸 아이디어였다. 사진이라는 교집합을 두고, 각자의 경험이나 취향을 살려 합집합을 보여주는 코너 <에디터의 요즘 디깅>은 엽서, LP, 포토티켓 등 매력적인 이야기가 가득했지만, 나에게 할애된 분량이 겨우 1페이지 밖에 되지 않는 게 한탄스러웠다. 풀고 싶은 보따리의 무게는 지게에 다 올리지 못할 정도로 묵직한데. 분명 읽는 이도 나와 같은 뜻 일 텐데 말이야.(그럴 리가.)


   안타깝게도 <에디터의 요즘 디깅>은 수익을 기대하기 어려운 콘텐츠라 빠르게 막을 내려야만 했다. 다른 기획 코너처럼 광고를 붙일 수도, 브랜드를 설득해 협업을 진행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이기도. 



   나는 이 흥미로운 주제를 그냥 버려두는 것이 아까웠다. 몇 달을 끙끙 앓다가 큰 마음먹고 산 소중한 물건을 집으로 오는 길에 뜯어보지도 못하고 잃어버린 것 마냥 기어이 미련을 놓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퇴사와 동시에 이 아이템을 어떻게 하면 끌고 갈 수 있을지, 그 끝은 어디일지 치밀한 계획을 세웠고 그걸 토대로 간단한 기획안을 쓰고 시장조사를 마쳤다. 두 사람이 같이 하겠다는 동의도 하지 않았는데 이렇게까지 설레발이라니. 머릿속에서는 벌써 출간 기념 북 토크까지 성대하게 치르는 단계에 이르렀다. 혼자만의 망상으로 남게 되면 어쩌나 잠시 걱정했지만 다행히도 이견은 없었다. 




그렇게 우리들의 작당모의가 시작됐다. 


   이야기의 서막으로 정한 틀은 각자가 디깅의 정의를 내리는 것이었다. 무언가에 대해 정의를 하는 것이 쉽지는 않겠지만 기승전결에 앞서 꼭 필요한 단계임이 분명했다. 원고를 쓰기 위해 서른 두 해가 넘도록 그동안 내가 디깅 한 것들에는 무엇이 있었는지 잠시 기억을 더듬어보니 잘게 찢어진 많은 조각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 조각들을 끄집어내기 시작하자 너무 신나고 설레서 밤잠 이루지 못하다 꿈에서까지 사랑했던 그때의 감정이 먼저 떠올랐다. 


   나는 어렸을 적 엄마가 머리맡에 틀어주었던 노란색 카세트가 참 좋았다. 정확히는 그 기계가 들려주던 음악이 좋았는데, 함께 흥얼거리며 듣다가 밤을 새기도, 어떤 날은 몽롱한 음표들을 타고 금세 잠이 들기도 했다. 남들은 영화를 볼 때 음악의 불가청성* 때문에 메인테마* 를 제외하고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는데 나는 모든 멜로디를 선명하게 인지할 정도로 애착을 가졌고, 오디션 프로그램이 성행하던 해에 기어이 실용음악과에 입학했다. 정처 없이 흘러가는 가요보다는 주제가 명확한 곡이 좋아서 매체음악*을 배웠고, 그중 영화에 대한 집념이 남달라서 대학원에 갔다.


   하지만 곡을 작업하고 현업에 종사하는 예술 노동자의 삶 보단 영화음악감독들의 생애나 작업 비하인드 스토리를 누군가에게 이야기해 주는 것이 더 적성에 맞아 팟캐스트를 시작했다. (박사까지 마친 우리 엄마가 이 글을 보는 게 걱정스러운데) 동기들은 졸업 논문 마무리에 정신이 없을 때 나는 다음 회차 대본을 썼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다 같이 박수를 치는 분위기에 취해 영화제라면 규모를 가리지 않고 다녔고, 대기업의 굿즈 장사에 줄어가는 통장 잔고를 몇 년째 경험하고 있다. 결혼도 했으니 미래를 위해 소비를 줄이고 아낄 법도 한데 당장 다음 달은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다는 듯 카드부터 내미는 습관은 아주 그냥 가차 없이 계속된다.


   시네필이라면 한 번쯤 꿈꾸는 영화 기자가 되고 싶어서 영화 잡지사의 문을 여러 번 두드렸지만 서류 탈락의 고배를 마셨고, 대신 객원 스태프로 가끔 영화제 현장에서 사진을 찍고 원고를 썼다. 씨네21의 김혜리 편집위원의 말을 잠시 빌리면 ‘영화인의 사진 작업을 ‘딴일’로 분류하기는 망설여진다’고 사진은 쭉 내게 단순히 기록 이상의 의미가 되었고, 고스란히 포트폴리오가 되어 카메라 매거진에 들어갔다. 이런 조각들이 켜켜이 쌓여 지금은 찍고, 쓰고, 만드는 것에 여념이 없다. 



   나노 단위로 열심히 떡밥을 찾는 덕후가 결국 계를 탄다고, 나는 모든 디깅에 늘 진심이었다. 학부 졸업 후 처음 들어갔던 회사에서 노동력만 착취하고 임금을 지급하지 않았던 악덕 업주는 나에게 아이디어는 참 좋은데 추진력이 부족하다고 했다. 그 정도 가지고는 프로젝트를 진행할 수 없어서 안 된다고. 그런데 포기하지 않고 살아보니 진심만 가지고 있으면 추진력은 어떻게든 따라붙는다는 결론에 닿았다. 영화와 얽혀있는 모든 것을 붙잡고 싶었던 것도 진심이었고, 디그다와 나오를 꼬셔서 이 에세이를 쓰자고 한 것도 진심이었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진심이 뒷받침되지 않는 삽질은 깊은 우물이 되지 못하고 작은 웅덩이에서 그치고 만다. 이게 뭐라고. 그 마음 하나가 대체 뭐라고 디깅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게 만든다.  



디깅은 진심이어야 하고, 진심은 곧 디깅이 된다. 그것이 내가 내릴 수 있는 디깅의 정의다. 

아, 나중에 죽으면 묘비명에 써 달라고 해야지. 




땅을 파는 것은 진실해야 합니다. 그리고 진실은 땅을 파는 것입니다. 소비의 여왕이 이곳에 있다.   -파파고





* 음악의 불가청성: 영화나 영상 매체에 집중을 하다 보면 자연스레 음악을 인지하지 못하는 현상
* 메인테마 : 작품에서 가장 메인이 되는 테마 곡 ex. John Williams - Hedwig’s theme
* 매체음악: 광고, 게임, 영화, 드라마 등 매체를 토대로 작업되는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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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주 목요일 발행


현직 에디터와 번역가, 남에게 취향을 팔기보단 매번 본인이 사기만 하는 전직 마케터가 풀어내는 디깅의, 디깅에 의한, 디깅을 위한 에세이. 디깅을 처음 시작하는 분, 다수가 인정하는 프로 덕질러, 이 장르 저 장르 최애는 없고 차애만 가득한 우리 옆집 사는 분까지 두루두루 공감하며 읽을 수 있는 에세이를 지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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