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일본 교토 도보 사진 여행 #산넨자카니넨자카#청수사#기요미즈데라
출근길에 카카오톡 한 통을 받았다. 미리 봄을 준비하라는 단골 온라인 쇼핑몰의 안내 문구에 못 이겨 주문해둔 봄 옷이 배송된다는 연락. 분명 겨울 옷을 생각하며 들어갔는데 이제 봄을 준비해야 한다는 문구를 본 뒤 뭔가에 홀린 사람처럼 지금 당장 입지도 못할 봄 옷을 덜컥 주문해버렸다. 한 달 내 모든 일정을 미리 계획하고 남들보다 한 달을 앞서 사는 에디터로 살다 보니, 내가 살고 있는 오늘보다 내일을 계획하고 사는 일에 익숙해진 터였다. 이는 내일을 계획해놓지 않으면 불안해지는 이상한 병으로 이어졌다.
교토에 머물던 나 역시 그랬다. 커다란 계획 없이 그날 가고 싶은 동네에서 발길 닿는 대로 걸어야지, 하고 먹은 마음이 '처음'이라는 부담감을 집어삼켜 욕심을 내려했다. 언제 다시 올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혹시 내가 교토에서 제일 유명한 곳에 가보지 못하지는 않을까, 내가 다녀온 곳이 교토스러운 곳은 맞을까, 어느 대중교통을 이용하면 더 빠를까.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통에 잠이 오지 않았다.
교토로 떠나기 전 점찍어둔 목적지는 시모교구와 이치죠지, 기온거리였다. 관광객을 위해 꾸며진 풍경 없이 현지인들이 사는 모습 그대로를 보여주는 시모교구, 서촌처럼 아기자기한 가게들이 낯선 이의 발길을 환영하는 이치죠지, 교토가 가진 특색이 묻어나는 기온거리만 봐도 충분하다 생각했다. 불안은 지금 당장 봄 옷을 장만해야 한다던 마음처럼 문득 시작됐다. 어찌 보면 지나친 욕심이었다. 숙소에 누워 검색창에 '교토 가볼만한 곳'을 입력했다. 조금 더 교토스러운 곳에 머물다 가야 한다는 강박에 청수사와 거리가 멀리 떨어진 금각사를 급하게 여행 일정에 넣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금각사까지 돌아보려던 나는 청수사를 보는 둥 마는 둥 하고 기온거리에 한 눈을 팔다가 금각사까지 보지 못하는 참패를 당했다. 브런치를 작성하기 위해 이 날을 떠올리니, 롱패딩을 입고 퇴근해 배송된 봄 옷을 들고 패자의 쓴웃음을 지을 내가 상상이 갔다. 아, 나는 또 불안 때문에 오늘이 아닌 내일을 살고 있구나.
그렇게 두 번째 날 아침이 밝았다. 나오미 동네에서 기요미즈데라행 205번 버스에 올랐다. 위치를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관광객이 우르르 내리는 정류장이 청수사(기요미즈데라)와 가장 가까운 정류장이다. 정류장에서 청수사까지 오르는 산넨자카 길엔 46개 돌계단이 있다. 이 돌계단은 계단이 잘 보이지 않는다. 사시사철 그러니까 1년 365일 사람이 붐비기 때문이다. 중 2 때 아무것도 모르고 한강 불꽃축제에 갔다가 대방역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울면서 엄마한테 전화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 뒤로 사람 많은 곳을 극도로 싫어해 되도록 사람 많은 곳은 피해온 나였다. 산넨자카에서 넘어지면 3년 안에 죽는다는 전설이 있다던데, 관광객에 떠밀려 계단을 오르며 여기선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위태로운 등반 끝에 청수사 그늘에서 잠시 숨을 고를 수 있었다. 청수사보다 청수사를 둘러싸고 있는 풍경이 힘겨운 등반에 심심한 위로가 됐다. 청수사는 푸르른 녹음에 둘러싸여 있고, 가장 높은 곳에 오르면 교토 시내가 내려다 보인다. 기온거리 근방에 눈에 띄는 높은 건물이 없구나, 생각했는데 막상 위에서 내려다보니 작은 미니어처 세상을 보는 듯했다.
자연과 어우러진 청수사를 전부 돌아보려면 시간이 꽤 걸린다. 기온거리도 가고 금각사도 가야 했던 나는 빠르게 등산한 후 하산해 술판을 벌이는 뒤풀이형 등산객처럼 갈 길을 위해 발걸음을 재촉했다. 덕분에(?) 청수사에 대한 기억이 많지 않다(물론 대방역 사건을 떠오르게 하는 산넨자카에 대한 기억은 짙다). 그날 종일 긴장하며 걸은 탓에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숙소에 돌아와 "20분 뒤에 차로 오실게요"라는 말이 족쇄처럼 느껴졌던 패키지여행을 떠올렸다. 헛웃음이 났다.
- 기온거리와 금각사 참패 여행기는 다음 편에 계속 -
나는 나오미 하우스가 있는 시모교구에서 버스를 탔기 때문에 206번으로 이동했다. 만약 교토역에서 출발한다면 86번, 100번, 106번, 202번, 206번, 207번 중 가장 빨리 도착하는 버스를 타면 된다. 이 중에 D1 정류장에서 타는 100번과 D2 정류장에서 타는 206번이 가장 자주 다닌다.
교토역을 기준으로 청수사와 가장 가까운 정류장까지는 15분 정도 소요된다. 기요미즈미치 정류장 혹은 고조자카 정류장이 청수사와 가장 가까운 정류장이다. 어느 역인지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기요미즈미치에서 대부분이 내린다. 사람들이 내리는 때에 맞춰 하차한 뒤 상점가를 따라 걸으면 청수사로 오르는 산넨자카가 나온다. 이름이 어려워 길을 찾기 어려울 것 같지만, 수많은 관광객이 표지판이자 안내데스크로 그들이 걸어가는 방향으로만 가도 청수사를 만날 수 있다.
하루 12시간 도보 여행자
공백 없이 흐르는 일상이 지칠 때면 마음의 안정을 찾기 위해 비행기표를 끊는다.
아침에 숙소를 나서는 순간부터 밤이 저물어갈 때까지 한 지역을 걷고 또 걸으며 남긴 기록.
하루 12시간 도보 여행자가 붙잡아둔 순간들이, 누군가의 일상 탈출에 힘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