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무비패스 이수진 감독 영화 <우상> 리뷰
이 글은 영화 <우상>을 통해 보고 느끼고 생각한 바를 주관적 관점에서 작성한 글입니다.
엔딩 크레디트는 올라갔고, 결말이 모호했던 영화들과는 다른 방향으로 혼란이 왔다. 분명 '이대로 끝이야?'라는 반문이 들지는 않았다. 그만큼 명확한 결말이었다. 그럼에도 결말이 가진 의미를, 각 캐릭터의 역할을 정확하게 이해하기는 어려웠다. 많은 이야기를 다루고자 했던 감독의 욕심이 짧은 러닝 타임과 맞물려 오히려 설명이 필요한 부분에서 물음표를 그리게 한 것은 아닐까. 감독은 수많은 이야기와 인물, 그리고 갈등으로 2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관객을 끌고 오면서 완벽하게 납득시키지 못했다. 나 역시 뿔뿔이 흩어져 있는 이야기를 주워 모아 감독의 의도를 헤아려보느라 작가의 서랍에서 꼬박 나흘을 보냈다.
극을 이끌어가는 구명회(한석규), 유중식(설경구), 련화(천우희)에게는 두 가지 공통점이 있다. 첫 번째는 우상이 가진 사전적 정의처럼, 셋 모두 신과 같이 맹목적으로 우러러 받드는 우상이 있다는 점이다. 구명회에게 우상은 자신의 허상적 이미지이며, 유중식에게는 혈육, 련화에게는 삶 그 자체다. 두 번째 공통점은 그들 모두 한 가지 사건으로 인해 수많은 선택의 기로에 놓이며, 그 속에서 자신이 우상시하는 그 무언가를 맹목적으로 지키기 위해 스스로를 서서히 무너트린다는 점이다. 이러한 일련의 행위들이 부메랑이 되어 다시 자신에게 돌아오고, 더 이상 자신의 우상을 지킬 수 없을 정도로 막다른 골목으로 몰렸을 때 그들은 각자 다른 방식으로 개개인의 스토리를 결론짓는다.
영화 개연성이 다소 부족한 이유도 있지만 영화 <우상>은 한 가지 사건에 연루된 세 주인공의 개별 스토리로 바라보는 편이 영화와 캐릭터를 이해하는 데 훨씬 도움이 된다. 세상에는 수많은 인간 군상이 있고 한 사건으로 엮인다고 하더라도 저마다 살아온 환경도, 중요하게 여기는 우상도, 선택의 이유도, 삶의 결말도 다 다르기 때문이다.
영화 초반 구명회는 한국 영화가 그려온 정치인 모습과 사뭇 다르다. 귀국한 그를 패스트푸드 점에 앉혀 놓고 그의 청렴한 이미지에 대해 TMI로 떠드는 장면에서는 우직해 보이기까지 하다. 그가 과연 정치에 뜻이 있나 싶을 정도다. 그러한 면모는 아들이 낸 사고를 직면하는 장면에도 그대로 드러난다. 사고를 은닉하려고 하는 아내와 달리, 그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자수를 강요한다. 이 장면에서 "불안한 것보다 불편한 게 낫다."라는 이전 대사가 오버랩된다. 그는 사고를 숨기고 불안에 떠는 일보다 사고를 알리고 죗값을 치르기 위해 따가운 시선을 받는 불편을 택했다.
아무리 옳은 선택이라고 해도, 부모로서 저렇게까지 냉정하게 굴 수 있을까 싶었는데 그가 그런 선택을 한 이유가 서서히 밝혀지면서 배신을 당한 기분이 들었다. 그는 애초에 콤플렉스가 있는 상태에서 정치인이 됐고 가족 일이라 할지라도 자신의 이미지에 일말의 오점을 남기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무엇을 믿느냐보다 무엇을 믿게 하느냐가 중요하다는 대사처럼 나는 감독이 여러 신을 통해 믿을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놓은 그의 허상적 이미지를 진짜라고 여겼다.
중후반부로 갈수록 구명회가 자신이 만들어놓은 이미지를 얼마나 숭배하고 지키려 하는지 여실히 드러난다. 그는 대중 앞에서 아들이 진정으로 뉘우치길 바라는 마음에 시간을 줬다고 말한다. 정작 그 시간 동안 시체유기를 뺑소니로 만들기 위해 갖은 수고를 한다. 그는 이 과정에서 불안의 여지를 남겨뒀고 그 불안을 지우기 위해 거짓과 악행을 서슴지 않는다. 그는 자신을 불안하게 만드는 자 즉, 그가 숭배하는 이미지를 무너트리려 하는 자는 없애버리거나 자신의 편으로 만들어버린다. 심지어 아들이 자해를 했을 때는 아들이 죽기를 바라는 마음이 그대로 반영된 꿈을 꾸기도 한다.
거짓은 거짓을 낳고, 그는 결국 자신이 쌓아 올린 허상적 이미지에 갇혀버린다. 이미 수차례 살인을 한 련화가 집에 왔다는 전화를 받고서도 그는 자신의 어머니를 먼저 집으로 보낸다. 아직 어머니를 구할 방법이 남아있는 선택의 기로에서도 그는 막다른 골목 대신 그동안 걸어왔던 방향을 향해서만 걷는다. 폭발 사고 이후 모든 걸 잃은 그는 자신에게 남은 스토리 즉, 드라마를 팔아 자신의 허상적 이미지를 지켜내려 한다. 사람이 이렇게까지 한결같을 수 있을까 싶다.
표면적으로는 그가 끝까지 자신의 우상을 지켜낸 것처럼 보인다. 막상 진실을 들여다보면 그렇지만도 않다. 사실 아들 사고를 직면하고 불안의 여지를 남겨두었던 그 시점부터 그의 우상은 이미 무너졌다. 무너져 가는 우상을 지키기 위해 아등바등하며 수많은 거짓과 악행을 반복하던 그는 결국 허상적 이미지에 갇혀 자신을, 그리고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을 온전히 잃은 캐릭터다.
셋 중 가장 안쓰럽고 공감이 갔던 캐릭터가 유중식이다. 관객이 영화를 보며 저마다의 우상을 떠올려볼 때 가장 많은 이가 감정이입을 할 수 있는 인물은 유중식이 아닐까. 사실 우리는 가족이 어떤 사건에 휘말렸을 때 구명회처럼 냉혈한이 되기보다 맹목적으로 믿고 사랑하는 가족, 우상을 감싸는 선택지를 택하곤 한다. 아들 사고를 덮으려는 구명회 아내와 련화 아이가 자신의 핏줄이 아님을 의심하면서도 끝까지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던 유중식처럼 말이다.
영화 내내 아들 부남은 유중식의 허상처럼 모습이 드러나지 않으며, 시신과 사진을 통해서 드러나는 외적인 요소만 봐도 유중식이 장애가 있는 부남에게 얼마나 자신을 투영하고 있었는지가 드러난다. 대부분 부모 자식 관계과 그렇듯, 그 역시 여느 부모처럼 부남을 맹목적으로 믿고 사랑해왔다. 아이러니하게도 우상처럼, 마치 자기 자신과 동일하게 여기던 아들의 죽음이 사실화되자 그는 사인을 밝히는 일보다 련화를 찾는 일에 더 맹목적으로 매달린다. 련화가 자신의 혈육인 손주를 임신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의 우상이 아들에서 손주를 임신한 련화로 바뀐 것이다.
다만 감독은 유중식이라는 캐릭터를 지나치게 맹목적인 모습으로만 묘사해 관객을 설득하는 데 실패했다. 극이 전개되면서 그는 련화가 임신한 아이가 자신의 손주가 아닐 수도 있고, 련화가 사람을 죽일 만큼 위험한 인물이라는 점을 알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련화 추방을 막기 위해 부남을 죽인 이의 아버지인 구명회 선거 캠프 일원이 되는가 하면 련화 국적 취득을 위해 자신과 혼인신고까지 하려고 한다. 가족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으로 눈을 감고 귀를 막았다고 하더라도 이는 지나친 설정이 아닐까. 더군다나 그즈음 그는 련화 전남편이 될 뻔한 남자의 존재와 연변에서 함께 넘어온 수련으로 인해 어쩌면 자신의 손주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하고 있었다. 구명회라는 캐릭터가 가족도 안중에 없을 정도로 지나치게 자기중심적이라 공감을 불러일으키지 못한 점과는 반대로 유중식은 어설프게 가족이라는 울타리로 묶인 련화를 지나치게 우상화해 공감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련화를 위해 연설문을 읽는 장면에서 유중식은 부남의 자위를 도와준 이야기를 한다. 그리고 끝끝내 가족을 지키지 못한 자책과 남은 가족이라도 지켜야 하는 자신 스스로를 위로하기 위한 눈물을 흘린다. 자신의 손주가 아니라는 예견된 결말이 현실화되고 믿음이 완전히 무너져 내렸을 때 유중식의 우상 역시 이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그는 우리 모두의 우상 중 하나인 이순신 동상 머리를 자르는 행위로 자신의 우상이 사라졌음을 전한다. 구명회 선거 캠프 옷을 입고 말이다. 이는 부남의 죽음 이후 존재하지도 않았더 허상과도 같은 자신의 우상을 지키기 위해 자신과 죽은 부남을 무너트린 자신의 행위에 대한 분노가 아닐까.
사실 캐릭터가 가진 의미를 찾기 가장 어려웠던 인물이 련화다. 그녀에게 우상은 이곳에 살기 위해 얻어야만 하는 국적, 물질적인 무언가다. 조금 더 정확하게는 안정적인 삶 그 자체다. 련화는 한국에 오기 위해 살인을 저질렀고 한국에서 추방되는 순간 삶을 잃는다. 이러한 극적인 설정이 련화를 괴물로 만든다. 살기 위해서라면 거짓이나 살인을 아무렇지 않게 저지르며, 자신의 삶 외에 어떠한 것도 돌아볼 여력이 없다.
부남이 죽었을 때는 전 남편이 될 뻔한 남자 때와 마찬가지로 도망치는 선택지를 택한다. 구명회에게 두 눈이 가려진 채 감금되었을 때도 온갖 이에게 사죄하고 빌며 삶을 구걸한다. 유중식과 재회했을 때 역시 부남 죽음과 자신은 관련이 없으며, 최선을 다했다는 변명 아닌 변명을 늘어놓기 바쁘다. 자신이 손주를 임신했다고 믿는 유중식을 구슬려 이용하려 하며, 보호 외국인이 되었을 때는 유중식에게 버럭 화를 낸다. 상황에 따라 이리저리 붙고 가면을 썼다 벗는 일을 반복하며 사는, 삶이 전부인 가장 맹목적인 캐릭터다.
애초에 그녀에게 결말에 대한 선택지는 삶과 죽음 둘뿐이었다. 유중식이 모든 사실을 알게 돼 혼인신고를 할 수 없다면 그녀는 추방되고 결국 죽음에 다다른다. 끝끝내 련화의 우상은 무너졌고 막다른 길목에 다다른 그녀에게 남은 선택지는 죽음뿐이다. 그녀는 부남을 죽여 이런 상황을 만들고 자신을 헤치려 했던, 그녀에게는 전부인 자신의 삶을 하찮게 여겼던 구명회 가족을 찾아가 함께 생을 끝내는 방법을 택한다.
사실 영화를 보고 의문이 풀리지 않는 장면과 캐릭터 설정이 너무 많았다. 장면 장면을 따져가며 감독의 의중을 일일이 헤아리는 일보다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세 캐릭터의 우상과 선택, 삶 자체를 들여다보는 것이 이 영화를 더욱 깊게 보는 것이 아닐까 하는 결론을 내렸다. 명쾌한 답이 정해져 있지 않은 영화를 완벽하게 이해하는 방법은 영화를 보는 이의 배경 지식 선에서 자신만의 시선으로 해석해보는 것뿐이니 말이다. 마치 관객에게 던지는 물음 같았던 유중식의 대사가 지금까지도 계속 귓가를 맴도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