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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진빈 Apr 13. 2019

사랑은 피고 진다

#브런치무비패스 안드레이 즈비아긴체프 감독 영화 <러브리스> 리뷰 

*이 글은 영화 <러브리스>에 대한 스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꽃처럼 피고 진다. 시작은 언제나 설레고, 이내 뜨겁게 불타오른 감정은 꽃이 하나 둘 만개하며 절정에 다다른다. 행여 꽃잎이 떨어지진 않을까 노심초사하며 만개한 꽃망울과 온전히 마주했던 시간도 잠시, 어느새 낙화한 꽃처럼 사랑은 차갑게 식어있다. 사랑이 영원히 져버리지 않도록 마음을 지속하기 위해선 사랑의 범주로 묶인 이들의 마음이 서로를 향해 있어야 한다. 가장 단순하고 기본적인 이 사랑의 공식이 수많은 변수와 낯선 감정 앞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져버린다. 


또 사랑은 꽃과 같아서 땅에 떨어지더라도 계절을 돌아 다시 싹을 틔우며 시작을 준비한다. 새로운 시작은 지금 당신의 옆에 있는 사람일 수도, 혹은 새로이 만난 누군가일 수도 있다. 그 대상이 누구든 사랑은 또 피고 지게 돼있다.


안드레이 즈비아긴체프 감독 영화 <러브리스> 공식 이미지.


영화 <러브리스>는 약 두 시간 남짓한 시간 동안 사랑이 지고 피는, 그리고 마침내 또 질지도 모르는 과정을 그린다. 사랑이 지고 떠난 자리에는 무심과 증오, 그리고 필요만이 남는다. 엄마 제냐(마리아나 스피바크)와 아빠 보리스(알렉세이 로진)는 서로에 대한 사랑이 떠난 자리에 무심과 증오만 남겼다. 마주치기만 하면 으르렁 대고 싸우는 통에 아들 알료사(마트베이 노비코프)는 상처가 마를 날이 없다. 그는 부모의 사랑이 떠난 자리에 그대로 서서 사랑이 필요하다 말 한마디 못하고 눈물을 흘리는 아이일 뿐이다. 알료사가 무심을 홀로 견디며 살아온 시간을 굳이 장면으로 하나하나 살펴보지 않아도 그 삶이 얼마나 잔인했을지 짐작이 간다. 




안드레이 즈비아긴체프 감독 영화 <러브리스> 공식 이미지.


사랑을 잃고, 사랑이 떠난 자리에 서서 그대로 시간을 멈춰버린 알료사와 달리, 제냐와 보리스는 이미 다시 피고 있는 각자의 새로운 사랑을 찾았다. 때문에 둘은 극 초반부터 서로에게뿐 아니라 알료사에게도 무심한 태도로 일관한다. 심지어 둘은 새로운 사랑에 취해 알료사가 실종됐다는 사실을 이틀이 지난 뒤에야 알아차린다. 


SNS 중독자처럼 그려지는 제냐는 알료사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엄마임에도 불구하고 아들과 눈도 거의 마주치지 않는다. 부모가 이혼한 후 자신을 누가 감당하느냐를 두고 싸운다는 사실을 안 알료사가 집에서 마지막 식사를 하는 장면에서 제냐는 알료사의 눈물을 알아채지 못한 만큼 극도의 무관심을 보여준다. 보리스도 마찬가지다. 그는 자신이 아이를 임신한 마샤(마리나 바실리예바)와 시간을 보내느라 늘 늦은 시각 집으로 돌아온다. 그런 그의 태도로 인해 극 중 보리스와 알료사는 한 번도 마주하지 않는다. 또한 제냐의 전화로 알료사가 없어졌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뒤에도 보리스는 곧 돌아오겠지, 라는 무심한 말을 하며 제냐에게 책임을 돌리려고 한다. 


안드레이 즈비아긴체프 감독 영화 <러브리스> 공식 이미지.
안드레이 즈비아긴체프 감독 영화 <러브리스> 공식 이미지.


감독은 알료사가 사라지고 제냐와 보리스가 그를 찾는 과정을 그저 덤덤하게 그려낸다. 감독이 영화를 그리는 방식, 극 중 인물들의 태도는 <러브리스>라는 제목답게 시종일관 무덤덤하다. 덕분에 관객은 지나친 신파에 감정이 좌지우지되지 않고 한걸음 물러나 조금은 이성적으로 그들은 관찰하게 된다. 


영화 초반 자취를 감춘 알료사는 사실 제냐와 보리스가 잃은 사랑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의 사랑은 이미 저버렸고, 그들은 단 한 번도 시선을 맞추거나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지 않을 정도로 이미 서로가 서로에게 사랑이 아닌 관계가 됐다. 사랑이 지지 않도록 마음을 지속하기 위해선 사랑의 범주로 묶인 이들의 마음이 서로를 향해 있어야 한다는 단순하고 기본적인 공식이 처참히 깨졌다. 관객은 그걸 알면서도 혹시, 하는 마음으로 알료사를 찾는 여정에 합류한다. 닿을 듯하면서도 끝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알료사처럼, 어쩌면 조금은 남아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었던 그들의 사랑은, 끝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안드레이 즈비아긴체프 감독 영화 <러브리스> 공식 이미지.


집에 돌아와서도 보리스와 제냐의 마지막 표정이 잊히지 않았다. 계절이 바뀌고 시간이 또 이만큼 흘러, 마샤와 함께 새롭게 피었던 보리스의 사랑은 다시 시들시들해졌다. 소파에 앉아 TV를 보던 보리스는 놀아달라고 칭얼거리는 아이를 들어 침대에 넣어버린다. 서로를 사랑스러운 눈으로 쳐다보던 제냐와 그의 연인 안톤(안드리스 카이스) 역시 보리스와 제냐가 그랬던 것처럼 서로에게 무심해졌다. 


사랑이 떠난 자리에 어김없이 찾아오는 무심이 쳇바퀴 돌듯 다시 시작됐다. 이제 그 자리는 증오가 채울 것이고, 새로운 계절을 싹 틔우기 위한 새로운 사랑을 필요로 할 것이다. 사랑은 꽃처럼 피고 지며, 계절처럼 돌고 돈다. 제냐와 보리스가 사랑의 감정이 영원히 지속되지 않듯, 서로 노력한다면 무심과 증오의 감정도 영원히 지속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알료사가, 그들의 사랑이 사라지지 않고 첫 설렘과는 또 다른 형태로 그들 곁에 머무르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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