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의 허무

동사형 꿈을 꾸라던 어느 강사의 말처럼

by 김진빈




“더는 되고 싶은 것이 없다는 생각도 들어.”



어떤 이야기를 하다가 그 말이 나왔는지 지금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L군과 대학 친구들을 만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9년 전 영화를 찍어보겠다고 처음 친구가 되었을 때처럼, 우리는 다시 화성시에 사는 친구 집에 모였다. 고기를 굽고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나는 여전한 우리에 대해 생각했다. 여전히 스무 살처럼 웃고 떠들며, 시간이 무색할 정도로 아직 서로에 대해 잘 아는 우리. 꽤 자주 과거의 시간에, 과거에 가졌던 꿈에 머무르는 우리. 그런 우리는 생각도 마음도 여전한데,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들은 여전하지 않다는 생각을 하니 조금 속상한 마음도 들었다.



"갑자기 왜?"


"글을 쓰는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이미 되어버렸잖아. 이제는 뭐가 되어야 하나 싶어서."


“더 높이 올라가면 되지.”


“높이가 의미가 있을까 싶어. 나는 그냥 단순히 글을 쓰고 싶었고 책을 만들고 싶었나 봐. 더는 올라갈 직급이 없다거나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사람이 보면 우습겠지만, 나는 이 정도로도 충분한 것 같아.”


“그럼 된 거 아니야? 충분하다, 라는 표현을 아무나 쓸 수 있는 건 아니니까......”



말줄임표 뒤에 이어진 L군의 침묵 속에는 어떤 생각이 머물고 갔을까. 9년 전 우리를 떠올렸을까, 그 속에 살았던 그 시절 자신을 다시 그려봤을까. 그러다 문득 잊었던 꿈에 대해 생각했을까. 나는 사진을 찍던 그를 떠올렸다가, 그다음 영상을 만들던 그를 생각했다. L군은 예전부터 늘 말해왔다. 사진이 자신에겐 아이덴티티고 영상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나는 다시 그 시절 우리를 떠올렸다. 밤낮없이 촬영을 기획하고, 소품을 준비하고, 밤새 촬영하고 편집하는 시간이 반복돼도 우리는 늘 웃음을 잃지 않았다. 조금 더 정확히는 글을 쓰고 무언가를 만들어내겠다는 꿈을 잃지 않았다. 그랬던 우리는 매거진 에디터가 되었고 방송국 AD가 되었으며, 평범한 회사원으로 살고 있다. 아예 관련이 없는 직업으로 살고 있지는 않지만, 이제 각자 자리에서 저마다의 보폭으로 자신이 정한 혹은 세상이 정해준 방향대로 걸어가고 있다.



"꿈이 참 허무하다는 생각도 들어. 그것만 보고 미친 듯이 달려왔는데, 막상 도착해보니 별 거 없는 기분이랄까."


"네 말대로 넌 충분히 잘 해왔어. 충분해."


"근데 끝은 낭떠러지더라고. 그 길로 떨어지면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야만 하는 거지."



우리 중 꿈에 가장 근접해 살아가고 있는 내가, 꿈의 허무에 대해 논하다니. 내가 입 밖으로 이야기를 꺼내고도 조금은 아이러니하다는 생각을 했다.



"이제 꼭 무엇이 되기보다 무엇을 해야 할지를 고민해보면 되지 않을까."



L군은 얼마 전 SNS에서 본 영상에 대해 말했다. 온라인 강의를 진행하는 한 강사는 화면을 향해 말한다. 꿈은 명사여서는 안 된다. 꿈은 동사여야 한다. 그는 검사가 되겠다는 꿈을 꾸기보다 검사가 되어서 무엇을 해나가야 할지를 고민하는 동사형 꿈을 꿔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다 보면 무엇이 되기보다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할지 자연스레 알게 된다고.


돌이켜보면 그랬다. 그때 우리는 늘 무엇이 되어야겠다고 명사로 단정 짓지 않았다. 우리 중 영화감독이나 시나리오 작가가 되다고 말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무엇이 되고 싶다 말하기보다 영상을 만들고 싶고 글을 쓰고 싶어라고 조금은 뭉뚱그려 현재와 미래를 그렸다. 미래에 무엇이 되는 일보다 지금 우리가 무엇을 해야 즐거운지를 생각하며 바로 앞을 보고 사는 일이 더 행복했으니까.



여전히 길고 긴 슬럼프가 지나가고 있다.

이 일은 낭떠러지 같이 두렵고 텅 빈 숲처럼 공허하다.


그래도 오늘은 무엇이 되겠다는 다짐보다,

앞으로 무엇을 하나씩 해나갈지 차근차근 생각해보며 하루를 마무리해야겠다.





2019년 4월 30일

Written, Photographed by Jimbeen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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