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무비패스 마츠나가 다이시 감독 영화 <하나레이 베이> 리뷰
*이 글은 마츠나가 다이시 감독 영화 <하나레이 베이>에 대한 스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무라카미 하루키이자 무라카미 하루키가 아니었다. 원작에 대한 정보가 하나도 없었던 나는, 이 영화가 분명 그가 그동안 일련의 사건을 풀어내 온 방식과 비슷함을 알아챘지만 스토리를 전개하는 방식이 낯설다고 느꼈다. 인물 내면의 감정을 읽기에는 함축적인 대사들이 간헐적으로 빠르게 스쳐갔고, 그 대사로 모든 걸 헤아리기엔 장면이 부족했다. 소설이 묘사하는 심리 묘사에 이토록 목마른 적은 없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원작 ‘하나레이 해변’이 수록된 <도쿄기담집>을 주문했다. 책은 하루 만에 도착했고, 무료한 출근길에 덥석 책을 집어 들었다. 그날 밤 나는 <도쿄기담집>에 수록된 단편 전부를 단숨에 읽어버렸다. 고작 40페이지 남짓. ‘하나레이 해변’을 읽으면서 97분이라는 러닝 타임 동안 풀리지 않던 의문이 완전히 해소됐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뭘 말하고자 했는지, 그리고 마츠나가 다이시 감독은 이 소설에서 어떤 점에 주목해 서사를 이어가는지.
<도쿄기담집> 가장 처음에 수록된 단편 ‘우연 여행자’에서 무라카미 하루키는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우연에 대해 말한다. 어떠한 인과 관계도 없이, 뜻하지 않았음에도 일어나는 특별한 일. 그 일들은 앞을 향해 평탄하게 흐르는 일상과 일상 사이에 크고 작은 이벤트 즉, 사건을 만든다. 기억에 남은 사건은 어떤 형태로든 영향을 미처 우리가 우리로서 존재하도록, 혹은 전혀 다른 존재로 바뀌도록 우리 삶을 이끌어나간다.
‘우연 여행자’ 바로 다음에는 영화 <하나레이 베이>의 원작 ‘하나레이 해변’이 이어진다. 이야기는 주인공 사치(요시다 요)의 아들 타카시(사노 레오)가 하나레이 해변에서 서핑 중 목숨을 잃으며 시작된다. 스토리 전개상 처음으로 드러나는 우연, 사치 삶에 영향을 미치는 사건이다.
겉으로는 타카시가 상어에 물려 죽은 것처럼 묘사되지만, 사실 그는 상어에 오른쪽 다리를 물어 뜯긴 충격으로 물에 빠져 죽었다. 이는 소설의 첫대목이 더 면밀하게 묘사하고 있다. 때문에 사치가 아들 시신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마주하는 마을 사람들은 모두 시종일관 ‘자연은 죄가 없다’라는 태도를 보인다. 심지어 아들 유품을 보여주던 경관은 “부인께는 참으로 고통스러운 일이겠지만, 가능하다면 그렇게 생각해주세요. 아드님은 대의나 분노나 증오 따위와는 상관없이 자연의 순환 속으로 돌아간 것이라고.”
아들이 죽은 사건은 발생했지만 아들을 죽인 이는 없다. 고로 사치는 자신의 삶을 뒤흔든 사건 앞에 서서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원망하지 못한 채 길을 잃을 수밖에 없다. 결국 그녀는 마을 사람들의 권유처럼 아들의 목숨을 앗아간 자연을 받아들이기로 작정한 사람처럼 행동한다.
거센 파도가 물보라를 몰고 왔다가 다시 저만치 멀어지는 일을 반복하듯 사치는 일상을 살다가 매년 아들의 기일 즈음 3주 정도 하나레이 베이에 머무르는 일을 10년이 넘도록 반복한다. 그녀가 하는 일이라곤 아들 목숨을 앗아간 바다를 향해 앉아 책을 읽는 것이 전부다. 그녀 앞에 어느 날 문득 찾아온, 아들의 죽음이라는 우연에 대항할 명분도 어떤 계기도 없기 때문이다. 어쩌면 자연을 원망하지 말라는 마을 사람들의 말이 그녀가 분노하거나 증오할 계기를 막아섰는지도 모르겠다. 마치 마약 중독자였던 그녀의 남편이 다른 여자와 관계를 가지던 중 죽어버려 원망할 대상이 온전히 사라져 버렸듯 말이다.
다소 무심하게, 앞으로만 흐르는 사치의 일상에 불현듯 타카하시(무라카미 니지로)와 친구가 끼어든다. 타카하시는 아들 타카시와 비슷한 또래 서퍼로 여러 면에서 그녀에게 아들을 떠오르게 하는 존재다. 매년 일정한 행동반경 안에서 책만 읽던 그녀가 드문드문 바다를 보고, 누군가를 위해 음식을 만들고, 서핑을 배우고 싶다고 생각하고, 누군가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일 모두 타카하시를 만난 이후 변화한 점이다. 사치의 일상 사이사이에 이미 변화를 이는 작은 사건이 하나 둘 생기고 있는 것이다.
타카하시와 친구는 섬을 떠나기 전 사치에게 신기루처럼 나타났다 사라진 외다리 일본인 서퍼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타카하시가 우연히 보고 전한 말 한마디가 사치에게 닿아 그녀를 변화시키는 계기가 된다. 사치는 이후 며칠 동안 하나레이 베이 해변을 헤매며 외다리 일본인 서퍼를 찾아다닌다. 그 과정에서 사치는 하나레이 베이에서 책을 읽었던 10년보다 더 많이 아들과의 시간에 대해 생각한다. 그리고는 자신은 아들을 사랑했노라고 고백한다. 아들일지도 모른다는 작은 희망이 그녀를 동요하게 만들었고, 사치는 급기야 하나레이 베이에 올 때마다 자신에게 심심한 위로를 건네는 여자를 찾아가 내가 왜 자연을 받아들여야 하느냐 따져 묻는다. 침착한 심리 상태를 보이던 사치가 처음으로 오열하는 장면이다.
영화 말미에는 사치가 몇 백 년도 더 돼 보이는 커다란 나무를 자신의 힘으로 밀어보려 애쓰는 장면이 나온다. 우연히 만난 타카하시라는 계기로 인해 사치는 슬픔을 비로소 마주했고, 자신을 슬픔으로 몰아간 자연을 그렇게나마 탓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늦은 밤 새까만 물결을 향해 서서, 메마랐던 지난 상처를 오고 가는 파도에 흘려보내는 사치 뒤로 외다리 일본인 서퍼 타카시가 희미하게 모습을 드러내며 영화가 끝이 난다. 그 장면을 보면서 이제 그녀에게는 더 이상 하나레이 베이가 슬픔과 상처의 공간이 아니길 바랐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일상과 일상 사이에 깔린 우연이 간절한 자의 마음에서 일종의 메시지로 스르륵 떠오르면 기억에 남는 사건이 된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사건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어떤 형태로 우리에게 영향을 미친다. 마츠나가 다이시는 원작 ‘하나레이 해변’에 등장하는 우연한 사건들과 그로 인한 사치의 심리 변화를 조금은 불친절하게 풀었다. 마치 우연의 일치로 일어나는 일련의 사건들은 일상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걸 보여주듯 조금 떨어져 제 3자의 입장에서 주인공을 관찰한다고 느꼈다. 다만 소설처럼 사치의 심리를 직접적으로 묘사하지 않으면서도 영화 말미에는 관객이 사치가 우연한 사건들을 대해온 태도를 이해하도록 스토리 라인을 구성했다. 시종일관 평온한 심리 상태의 사치를 봐온 관객이 폭발하는 그녀의 감정을 보는 일종의 사건을 만들어 이전과는 전혀 다른 태도로 사치의 심리 상태를 보다 더 선명하게 읽어낼 수 있게 말이다.
마지막으로 무라카미 하루키가 <도쿄기담집> ‘우연 여행자’에서 조율사의 입으로 전한 말을 남긴다. 이 글을 읽는 누군가가 일상과 다르지 않게 흐르는 우연한 감정들 사이에서 간절한 마음으로 자신을 변화시킬 의미 있는 무언가를 선명하게 건져올릴 수 있길 바라며.
“나는 그때 문득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우연의 일치라는 건 어쩌면 매우 흔한 현상이 아닐까라고요. 즉 그런 류의 일들은 우리 주위에서 그야말로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거예요. 하지만 그 대부분은 우리 눈에 띄는 일도 없이 그대로 흘러가버리죠. 마치 한낮에 쏘아 올린 불꽃처럼 희미하게 소리는 나지만 하늘을 올려다봐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요. 하지만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마음이 있다면 그건 분명 우리 시야에 일종의 메시지로서 스르륵 떠오르는 거예요. 그 도형을, 그 담긴 뜻을 선명하게 읽어낼 수 있게. 참 신기하네,라고 화들짝 놀라죠. 사실은 전혀 신기한 일도 아닌데. 나는 자꾸 그런 마음이 들어요. 어떻습니까, 내 생각이 지나치게 억지스러운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