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진빈 Jun 17. 2019

진실은 결코 가려지지 않는다

#브런치무비패스 최승호 감독 영화 <노리개 : 그녀의 눈물> 리뷰

*이 글은 최승호 감독 영화 <노리개 : 그녀의 눈물>에 대한 스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감정은 주관의 영역이다. 우리는 길을 걷다가 넘어진 아이를 보고 아프겠다, 라고 생각하지만 그 아이가 느낄 아픔이라는 감정의 크기를 쉽게 가늠할 수 없다. 다만 어떤 상황과 마주했을 때 머릿속을 헤집어 보며 내가 그러했던, 지난 경험들을 떠올리고 그 안에서 감정의 크기를 헤아린다. 


나는 이 감정의 크기를 헤아리는 감각이 굉장히 예민한 사람이다. 나를 비롯해 누군가의 감정을 살피고, 생각하고, 헤아려 어떤 행동을 하는 일련의 행위가 반드시 나와 관계를 맺는 사람에 한정되지 않는다. 책을 읽고, 영화나 드라마를 볼 때도 심지어 누군가에게 전혀 모르는 타인의 이야기를 전해 들을 때도 감정에 휩쓸려 마음을 주체하지 못할 때가 많다. 영화 <도가니>를 보고 화장실에 갈 때마다 교장 선생님 얼굴이 생각나 치를 떨었으며, 영화 <내부자들>의 한 장면을 지금까지도 충격적으로 기억할 만큼 사회 이면에 숨겨진 무언가를 마주하는 일에 개인으로서 쉽게 타격을 받는다. 


<노리개 : 그녀의 눈물>이라는 제목으로 재개봉한 이 영화의 시사회 참석을 제안받았을 때 답을 망설였던 이유다. 우리가 '이럴 것이다' 가정하며 구태여 마주하고 싶어 하지 않는 진실은 생각보다 더 잔혹하다. 그 잔혹함을 또다시 마주할 자신이 없다고 핑계를 만드는 나에게, 이 영화는 우리가 그 진실과 마주하지 않으면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고 그러니 함께 분노해주지 않겠냐고 말한다.


최승호 감독 영화 <노리개 : 그녀의 눈물> 공식 이미지.

노리개라는 영화 제목에는 숨겨진 뜻이 없다. 심심풀이로 가지고 노는 물건이나 장난 삼아 데리고 노는 여자를 낮잡아 이르는 말 그 자체다. 다만 누가 주체이고 누가 객체인지는 영화를 보는 동안 끊임없이 생각하게 만든다. 이 영화에는 헤아릴 수 없는 수의 가해자와 세 명의 피해자가 등장한다. 가장 표면에 노출되는 피해자는 주인공인 정지희(민지현)다. 배우라는 꿈을 꾸기 위해 소속사 대표, 영화감독, 언론사 사장에게 성을 상납하고 스스로를 노리개로 자처해야 했던 여자. 이 영화는 정지희의 죽음으로부터 시작하지만, 사람들의 무관심과 무심함 속에서 죽어가는 그녀의 삶을 서서히 그려나간다. 


한 번씩 노리개가 될 때마다 하나씩 일이 늘어가는 상황을 보며 정지희는 희망을 봤을까. 그 희망 바로 이면에는 절망이 들끓고 있다는 사실을 왜 몰랐을까. 예견된 비극 앞에 화살의 끝이 애꿎은 곳을 향했다. 정지희의 매니저, 스타일리스트를 비롯한 주변 사람들이 그녀가 죽기 전까지 무심하게 일관했던 것처럼 나 역시 이 일이 선택의 문제가 아니었을까, 그녀를 의심하고 닦달했다. 그런 내게 감독은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더러운 사회의 이면을 가감 없이 보여줬다.


최승호 감독 영화 <노리개 : 그녀의 눈물> 공식 이미지.

두 번째 피해자는 톱 배우로 나오는 고다령(이도하)이다. 영화 초반에는 고다령도 정지희 같은 과정을 거쳐 저 자리에 올랐을까, 나도 모르는 새에 선입견을 가졌다. 지금의 고다령을 만들기 위해 정지희와 같은 노리개가 된 이가 숱하게 많다는 사실을 그녀도 분명 알고 있을 거라고 단편적으로만 판단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영화는 시종일관 감정에 호소하지 않고, 일련의 사건을 나열하고 사실만을 전할 뿐이다. 마치 관객이 재판관이 돼 명확하게 사건을 바라보고 심판을 내려주길 바라는 듯했다. 덕분에 영화를 보는 내내 촉을 세우고 모든 이를 끊임없이 의심하게 된다.


고다령은 소속사 대표에 의해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가 된다. 자신을 대신해 노리개가 된 정지희를 정면으로 마주한 순간, 소속사 대표는 이게 다 너를 위한 일이라고 하며 그녀를 막아선다. 지금까지 진실을 알지 못했던 고다령은 감당할 수 없는 진실을 앞에 두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소속사 대표에게 입이 틀어막혀 눈물을 흘린다. 그 뒤로 언론사 사장의 노리개가 돼 또 다른 눈물을 흘리는 정지희의 표정이 오버랩된다. 


최승호 감독 영화 <노리개 : 그녀의 눈물> 공식 이미지.

마지막 피해자는 검사 김미현(이승연)이다. 재판을 하는 내내 그녀는 끊임없이 외압에 시달린다. 그럴수록 그녀는 점점 더 진실을 밝히는 데 몰두한다. 판사와 검사, 변호사가 한 자리에 모여 압박을 가해도 김미현이 꺾이지 않자, 김미현 아버지의 지인이자 언론사 사장 변호사인 윤기남(박용수)은 그녀의 과거를 꺼내 든다. 삼촌에게 성폭행을 당했던 아픔을 아무렇지 않게 들춰내며 그들이 또 한 번 폭행을 가하자 일순간 그녀의 사고가 멈춰버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재판을 이끌어가던 그녀는 영화 마지막에 허무한 결과를 받아들고 "아직 재판은 끝나지 않았다"라고 말하며 눈물을 흘린다.


진실은 왜 이토록 잔인할까. 세 명의 피해자가 가졌던 아픔의 크기를 일일이 헤아려보려다 그만뒀다. 이 영화를 본 내가 해야 할 일은 내 경험에 빗대 그들이 가진 아픔의 크기를 헤아려보고 같이 슬퍼하는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잔인한 진실은 뫼비우스의 띠처럼 돌고 돌아도 끝이 없다. 최승호 감독처럼 진실을 알리려는 노력이 빛을 발하기도 전에 무산되는 경우는 허다하고, 왜곡된 진실을 믿는 이들은 무관심 혹은 무지로 무장해 타자를 두드리기 마련이다. 실제로 영화를 보는 중간중간 피해자가 진짜 피해자인가, 하는 생각을 할 정도로 우리 사회의 추악함은 단단하고 촘촘하게 엮여 눈 앞의 진실을 가린다. 그럼에도 누군가는 이러한 고발 영화를 만들고 우리가 그 영화를 통해 진실을 끄집어내려 애쓴다면 뫼비우스의 띠 연결부에 조금의 흠집은 낼 수 있지 않을까. 2017년, 우리가 만들어낸 기적처럼 말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파도처럼 밀려왔다 떠나길 반복하는 감정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