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여행의이유 #김영하 #리뷰
TV 프로그램 <대화의 희열2>에 출연한 소설가 김영하는 여행을 기억하는 방법에 대해 꽤 긴 이야기를 했다. 그 시작은 여행을 떠나는 이유라는 다소 포괄적인 주제였으나, 대화가 여행을 기록하는 방법이라는 새로운 국면을 맞으면서 흥미로운 이야기가 오갔다.
소설가는 경험을 글로 써내는 사람이다. 글로 재구성한다고 해야 더 정확한 표현이겠다. 그렇다고 그들에게 글이 전부인가 하면 그렇지도 않다. 경험 자체는 글로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소설가는 본인이 경험했던 시간과 공간을 모티브로 모티프를 만들어 주인공과 인물들, 그리고 그들이 만들어가는 상세한 장면 하나하나를 디테일하게 묘사해가는 일련이 과정을 겪는다. 이 과정 안에서 소설가가 가진 경험에 근거한 과거의 기록은 소설을 끌고 가는 데 상당한 영향력을 지닌 무기다.
함께 대화를 나누던 소설가 김중혁이 우스갯소리로 몇 년 뒤에 "유희열을 악당으로 표현하겠다."라고 하는데, 이 역시도 내가 경험한 어떤 사람을 소설 속에서 주인공의 형태로 재현해내는 작업을 한다는 의미다. 물론 김중혁은 "한 사람을 만드는 데 15명 정도가 필요하다. 머리는 유희열, 어깨는 다니엘 등."이라는 말을 덧붙였다. 어쨌든 소설가는 자신의 경험이 곧 자산인 셈이다.
그들의 대화 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부분이 여행을 기록하는 방법이다. 김영하는 다양한 방법으로 미래에 기억할 지금을 기록한다. 글뿐 아니라 사진을 남기거나 그림을 그리고 소리를 녹음한다. 그 모든 기록과 기억이 키보드 앞에 앉은 미래의 자신에게 중요한 자양분이 된다는 사실을 책 <여행의 이유>에서도 끊임없이 언급하고 있다.
그가 어떠한 이미지도 없이 단지 소리만 녹음한다는 일은 다소 생소하게 다가왔다. 그때 나는 몇 년을 넘게 사진을 찍어오면서 기록물로써 부족하다고 느꼈던 부분을 보완하기 위해 동영상이 필요한가, 고민하고 있었다. 그의 말에 의하면 우리가 가진 다양한 감각을 활용해 기록을 남기다 보면 기억은 더욱 짙어진다고 한다. 사진을 찍어와 그대로 그림으로 옮기는 작업이나 녹음해온 소리를 들으며 그때를 떠올리면 조금 더 깊게 그날을 기억할 수 있다는 것.
김영하 작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가 언급한 영화 <봄날은 간다> 속 상우(유지태)와 은수(이영애)를 떠올렸다. 상우가 수집한 소리를 은수의 설명과 함께 들었던 청취자들은 어떤 장면을 떠올렸을까. 그날 이후 나는 소리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아이폰의 카메라 부분을 막고 동영상을 일 분 정도 촬영해 흑백 화면에 소리만 담긴 영상을 인스타그램에 올린다. 김중혁이 <대화의 희열2>에서 "소설가가 '여기는 우주다'라고 쓰면 독자가 각자 자기가 알고 있는 우주를 대입해준다"라고 했던 말처럼, 누군가 내가 수집한 소리와 짤막한 이야기를 듣고 자기만의 시간과 공간을 떠올릴 수 있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김영하는 책 <여행의 이유>에서 이런 말을 했다.
오래전에 읽은 소설을 다시 펼쳐보면 놀란다.
제대로 기억하고 있는 게 거의 없다.
소설 속의 어떤 사건은 명확하게 기억이 나는 반면 어떤 사건은 금시초문처럼 느껴진다.
모든 기억은 과거를 편집한다.
실제로 지난주 녹음해둔 양화한강공원 소리를 들으면서 작은 소리들이 어떤 소리인가 기억을 더듬었다. 잘 기억나지 않는 부분에서 끙끙 앓다가 인스타그램 피드에 적어둔 짤막한 메모를 봤다. 전혀 다르게 생각한 부분도 정확히 기억하고 있는 부분도 있었다. 어쩌면 김영하가 조금 더 짙어진다고 했던 기억은 실제로 존재했던 그날의 기억보다는 내가 느꼈던 그날의 추억 즉, 편집된 기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자 오늘을 수집하는 일이 더욱 특별해졌다. 같은 시간과 공간을 경험해도 나만의 기억이 생긴다는 사실이 기뻤고, 그게 다시 내 글의 자양분이 될 수 있다는 것에 설렜다.
생각과 경험의 관계는 산책을 하는 개와 주인의 관계와 비슷하다.
생각을 따라 경험하기도 하고, 경험이 생각을 끌어내기도 한다.
현재의 경험이 미래의 생각으로 정리되고, 그 생각의 결과로 다시 움직이게 된다.
이 책 속에 나오는 구절구절을 비단 여행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여행을 사전적 뜻이 아닌 조금 더 포괄적으로,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 역시 여행이라는 시각으로 바라보면 한 장 한 장을 넘기는 손이 자꾸 걸음을 멈춘다. 영감을 좇아 여행을 떠난 적은 없지만, 길 위의 날들이 쌓여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던 김영하의 글처럼, 과거의 기억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듯 지금의 기록이 미래의 나를 만들어간다는 생각으로 이 글을 읽는 모든 이들이 여러 방법으로 오늘을 수집해보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