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나는 왜 행복에 집착하게 되었을까?

두 사건과 두 사람

by 오잘줌마

국민학교 6학년이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수업시간이었다. 담임선생님께서 내 이름을 부르시며 앞으로 나오라고 하셨다. 교탁위에서 학용품을 한아름 건네주셨다. 서둘러 자리로 들어가려는 내 어깨를 잡고 말씀하셨다. “배정미가 공부를 잘해서 받는거다” 내가 태어나서 처음 포스터 물감을 갖게 된 날이다. 두꺼운 노트는 고급스러웠다. 가방 가득 학용품을 집어 넣고 집에 어떻게 왔는지 모르겠다. 지금도 그 무게가 느껴지는 것만 같다. 우리집은 가난했다. 육성회비를 한두 번 밀린 기억이 있다. 학용품은 영세민 가정에 배급되는 물품이었다. 선생님의 한마디가 없었다면 나는 지금보다 더 슬픈 기억으로 기억하고 있었을 것이다. “우리 반에 여러 명 후보가 있는데 배정미가 공부 잘해서 받는거다” 선생님의 배려로 인해 나는 성장한 후에 어려운 처지에 놓인 사람을 조심스레 살피는 성향이 생긴 것 같다.



중학교 일학년 어느 날이었다. 아버지가 술에 취해 소리를 질러 동생들과 나는 집을 나왔다. 앞집에 사는 내 동창 상훈이 할머니께서 할머니 집에 가서 아버지가 잠들 때까지 있으라고 하셨다. 나는 창피해서 갈 수 없었다. 초등학교 다니는 여동생과 남동생 둘만 할머니를 따라 갔다. 나는 엄마랑 둘이 변소에 숨어있었다. 프라스틱 파이프 하나로 환기를 시키는 변소는 암모니아 냄새를 배출하지 못했다. 엄마랑 휴지를 뜯어 코를 막고 아버지 흉을 봤다. “으이그~ 또 시작이야. 술을 먹으면 조용히 자지 맨날 쫒아내기는 왜 쫒아내. 정미야 아버지 잠들면 살그머니 들어가자” 나의 엄마는 긍정적인 분이시다. 어떤 날엔 비 내리는 처마 아래서 아버지가 조용히 잠이 들기를 기다린 적이 있다.



하루는 아버지가 술에 취해 소리를 지르면서 발을 쾅쾅 구르는데 엄마랑 컴컴한 부엌에서 도너츠를 만들었다. 엄마랑 처음이자 마지막 해 본 요리시간이었다. 엄마는 반죽을 납작하게 잘라 두 줄 칼집을 넣어 타래과 모양 도너츠도 만들어주셨다. 지금 생각해도 행복해서 웃음이 실실 난다. 안방에서는 아버지가 노래를 개사해서 부르면서 소리를 고래고래 질렀다. “원갑이를 원망마라” 한번 쯤 들어본 듯한 멜로디에 당신의 이름을 붙여 잠이 들 때 까지 부르곤 했다. 컴컴한 부엌 바닥에 석유 곤로를 내려놓고 한참동안 도너츠를 튀기고 설탕을 뿌려 엄마랑 서로 모양을 보여주면서 먹었던 보물 같은 추억이다. 나는 이 때의 추억이 좋아서 내 딸아이가 어릴 적에 도너츠를 자주 만들었다. 나의 엄마처럼 나는 내 딸아이에게 만들고 싶은 모양은 뭐든지 해보라고 했다. 스물세살 딸아이는 가끔씩 도너츠 만들었던 이야기를 한다.나는 어릴 적 집에서 지낸 기간이 길지 않아서 추억이 많지 않다. 국민학교 6학년때 영세민 자녀로 학용품을 받았던 일과 아버지 때문에 동창 남자애 보기가 창피했던 두 사건은 슬픈 추억이고 나를 행복에 집착하게 만들었던 것 같다.



1992년 말복이었다. 수원 사는 친구가 삼계탕을 끓였으니 놀러 오라고 했다. 귀찮아서 가지 않으려는 내게 친구는 나 때문에 닭 두 마리를 끓였으니 와야 한다고 했다. 성남에서 일이 끝나고 수원역 근처에 사는 친구 집에 갔다. 친구의 남자 친구 말고 왠 남자가 한명 더 있었다. 친구가 그 남자에게 닭다리를 뜯어 주었다. 나는 어색한 분위기를 깨려고 왜 그 남자만 닭다리 주냐고 한마디 했다. 결혼 후 남편이 그 당시 ‘‘뭐 저런 게 다 있어’ 했다고 한다. 남편은 농담도 못 받고 속도 좁은 쫌생이였다. 남편 집도 우리집 만큼 가난했다고 한다. 남편이 중학교 수학 여행비를 받으러 집에 가서 병환으로 누워계신 아버지께 오천원이 필요하다고 했을 때 아버님이 남편의 손을 잡고 미안하다는 말을하고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남편은 이때 일을 아파한다. 그래서 그런가. 남편은 무척 알뜰하다. 결혼 후 다툼의 주 요인은 돈이었다. 나는 가난하기도 했지만 엄마가 일일 노동을 하셔서 조금의 돈은 늘 있었고, 친구가 튀김을 사줬다고 몇 번 말씀 드리면 “맨날 얻어만 먹으면 되나?” 하시면서 오백원을 주시기도 하고, 친구 생일이라고 거짓말을 했을 때 삼천원을 주신 적도 있다. 나는 가난한 것 보다 아버지와 엄마의 싸움이 마음 속 상처가 되었다.



결혼 후 남편의 목표는 ‘가난만은 물려주지 않는다’ 였고 나의 목표는 ‘웃는 얼굴 행복한 우리집’이었다. 결혼 후 2년 쯤 지나 교통이 불편한 화성 원평 부대 관사로 이사를 가면서 우리에게 자가용이 생겼다. 여행은 시댁 정읍가는 길이 여행이었고 그 외에는 기름값이 아까워서 다니지도 않았다. 어느날 융건릉에 놀러가자고 했다. 두 아이를 태우고 집에서 가까운 융건릉에 갔다. 내 기억에 입장료가 800원 있었다. 남편은 볼 것도 없는데 입장료 아깝다고 돌아가자고 했다. 나는 여기까지 왔으니 들어가 보자고 했지만 남편은 대꾸도 하지 않고 집으로 돌아왔다. 이틀이 멀다하고 부부싸움을 할 만큼 지치도록 싸울 때였다. 돈에 대한 생각차이로 다투었다. 남편은 남들 다하는 것 하면서 언제 돈 모으냐고 하면서 허리띠를 졸라매야 한다고 했다. 나는 조용히 외쳤다. “나는 내일 행복하기 위해서 오늘 우는 건 싫어” 남편은 너는 그렇게 살라면서 울먹이는 나를 멍청이 취급했다.



나는 어릴 적 가난했고 슬펐던 두 사건을 치유하기라도 하듯 ‘웃는 얼굴 행복한 우리집’ 이라 가훈을 정하고, 맨날 행복하시다는 우리 엄마처럼 즐겁게 살고 있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