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은 ONE TEAM
명절 보너스가 나왔지만 연말에 가족 행사가 많아서 돈 나갈 일도 많다. 장 보러 나가면서 남편이 한마디 했다.
“연말 싫어. 내 돈이 다 나가잖아.”
촉촉하게 자른 레몬을 보면 침이 고이는 속도로 내 입이 반응했다.
“그게 왜 당신 돈이야. 우리 돈이지.”
며칠 후 산책하는데 이날 우리의 짧은 대화에 대해 남편이 말했다.
“당신이 그렇게 말하는데, ‘아! 우리 여보가 자존감이 높아졌구나’ 싶어서 듣기 좋았어.”
듣기 좋았다는 남편의 말을 듣는데 나는 고마웠다.
삼십 년을 살면서 서로 고마운 순간이 늘어난다는 건 정말 축복이다.
신혼 초에 돈은 남편의 무기였다. 내가 북 세일즈 일을 할 때는 급여가 정해져 있지 않아서 편차가 컸다. 어쩌다 남편 월급 보다 많이 벌기도 했지만 평균은 남편보다 적었다. 어느 달에는 점심을 사 먹을 만큼도 벌지 못하는 달이 있었다. 돈을 많이 벌면 당연한 거고, 못 벌면 한심한 여자 취급을 받았다. 한번은 멍청이라는 말을 듣고 멍해진 적도 있다.
남편이 돈에 대해 평정심을 갖게 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2012년 내가 하와이를 다녀올 즈음 경제적인 문제가 조금씩 나아졌다. 그러다 지난해 4월에 내가 갑상샘암 수술을 한 후에는 내가 옆에 건강하게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고 행복하다고 지금껏 말한다. 어떻게 우리 부부가 이렇게 될 수 있었을까?
조용한 투쟁이었다. 긴 세월동안 두꺼운 벽 앞에 놓인 기분이었는데 이제야 담장을 허물고 따뜻한 손을 마주잡고 햇살 좋은 길을 산책하는 평화로운 날들을 보내게 되었다. 쨍하고 해 뜰 날이 왔다. 지난 해 시월부터 남편이 월급날에 나에게 용돈을 보내준다. 맛있는 거 사먹으라고.
나는 안팎으로 애쓰며 살아왔다. 안으로는 나의 자존을 지키려고 끊임없이 공부를 했다. 다행히 책 읽고 강연 듣는 걸 좋아해서 어쩌다 강사가 되었다. 똑똑한 파트너 덕분에 인생 최고의 순간을 보냈다. 와이키키 해변에서 맥주를 마시고 춤을 추기도 하고 유니버셜 스튜디오에서 둘이 놀이기구를 타면서 무섭다고 꽥꽥 소리를 질렀다. 융프라우요흐 언덕에서 눈바람을 맞으며 행복한 순간을 소리쳐 영상에 담기도 했다. 운이 좋았다.
밖으로는 조용한 투쟁을 했다. 계란으로 바위를 치지는 않았다. 병아리로 태어날 거란 확신 조차도 없었다. 그냥 내 앞에 주어진 삶을 짊어지고 걸었다. 바위들이 비바람에 깍이고 균열이 생기고, 굴러서 내 앞에서 사라지기도 했다. 팔자를 탓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상황을 내가 통제할 수 없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았던 건가. 이럴 때 나는 내가 지혜롭게 태어났다고 생각한다. 하하하.
오래 전 부모특강을 할 때 자녀를 행복하게 키우고 싶으면 엄마도 아이와 함께 공부하라고 했다. 공부를 어떻게 해야 하나 막연할 수 있다. 내 생각에는 책을 읽는 것이 공부의 시작이다. 방학도 했으니 자녀와 도서관에 놀러 가는 것도 좋다. 관심 있는 책을 다섯 권 정도 빌려서 에코백을 메고 아이들과 떡볶이를 먹으러 가는 것도 추천한다. 그러다가 관심 있는 주제가 생기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책을 찾아보고 유튜브를 찾아보면 공부가 저절로 시작된다. 정보는 얼마든지 많은 시대를 살고 있다. 100세 시대 공부만큼 평생할 수 있는 일이 또 뭐가 있을까.
나는, 그렇게 오잘이 되었다.
다섯 살 큰아이 손을 잡고 한 살짜리 딸아이를 안고 정읍가는 기차를 탔다. 분유통과 기저귀를 빵빵하게 넣은 농구가방을 메고 수원에서 두월리까지 기차에서 내려 버스 두 번 갈아타고 시댁에 갔다. 다행히 수원역까지 남편이 데려다 줬었다. 두 아이와 커다란 가방과 나는 한 덩어리로 보였을 거 같다. 나는 키가 작다. 5센티미터 구두를 신으면 160센티가 된다. 큰아이가 벌써 서른 두 살이다. 자기의 가정을 꾸렸다. 예쁘게 재밌게 사는 모습만 봐도 행복하다. 문득 눈물이 고이네.
‘사랑밖엔 난 몰라’ 요즘 자주 이 노래가 흥얼거려진다. 나는 우리 아이들과 나, 그리고 소중한 사람들과 모든 것을 사랑만 할 거야. 그리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