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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경린씌 May 17. 2021

당신이 죽은 후에도 스마트폰과 컴퓨터는 살아 있다

[책 리뷰] 디리 dele | 혼다 다카요시



당신이 떠난 자리에 남은 것,


불현듯 달리는 버스 안에서 '죽음'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있다. 사람은 죽으면 어떻게 될까? 사후세계는 존재할까? 죽으면 몸에서 영혼이 빠져나가 내가 죽은 모습, 슬퍼하는 가족의 모습, 나의 장례식을 하늘에서 보고 있을까? 그럼 너무 슬픈데.. 아니면 한순간 존재 자체가 증발해 영원한 공허의 세계로 가게 되는 걸까? 그건 너무 무서운데,. 혼자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에 잠겨 있다가, 뜬금없이 남자 친구에게 죽음이 두렵고 털어놓으니, 남자 친구는 역시 INFJ 답게 생각이 너무 많고, 망상이 잦다며 나를 놀려댄다.


죽음은 살아생전 개인이 소유하고 있던 모든 것들을 이승에 남겨두고, 홀연히 영혼만을 데려간다. 주인을 잃고 남겨진 유품은 고인이 이 세상에 존재했음을 증명하고, 남은 이들이 그를 잊지 않고, 추억하고 그리워하게끔 도와준다. 디지털 세계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물질적인 소유 외에도 디지털 기기 속 무수한 데이터도 함께 남겨진다. 망자는 말이 없고, 유품과 데이터 상 기록만이 그의 존재를 대신한다. 그것들은 한 때 어떤 사람을 상징하는 일부였다. 유품은 가족의 품으로, 그리고 스스로 소멸하지 않는 데이터는 광대한 인터넷 가상세계를 공허히 떠돌아다닌다. "당신이 죽은 후에도 스마트폰과 컴퓨터는 살아 있다." 죽었지만, 영원히 존재하게 된다.





디지털 기기에 남겨진 고인의 흔적은 예기치 못한 죽음을 대변하기도 하고, 기억과 추억을 간직하기도 하며, 오직 단 한 사람만 알고 있던 비밀을 감추고 있기도 하다. 가상세계는 편안하고 윤택한 삶을 보장하지만, 처리되지 않는 기록은 때로 복잡한 문제를 초래한다. 만약 내가 죽게 된다면, 인터넷 상에 남은 나의 흔적들은 어떻게 될까. 가상의 세계를 떠도는 데이터가 걱정되는 사람들을 위해, 고인의 인터넷에 남은 데이터를 말끔히 청소해주는 '디지털 장의사'라는 직업이 생겨났다. 삭제되기를 기다리는 다양한 데이터. 영원히 남길 수 있는 기술을 얻게 된 탓에 인간은 더 많은 것을 생각하고 고민하게 된다.


디지털 데이터가 없으면 살아 있는 사람도 없는 것처럼 느껴져. 이 사람처럼. 이 사람의 흔적은 컴퓨터 속 폴더 외에는 어디에도 없어. 사진 속에만 존재하는 사람 같아. 우리가 폴더를 지우면 이 사람을 통째로 지우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당신이 죽은 후,
불필요한 데이터를 삭제해드립니다.



Delete. LIFE


'dele. LIFE'는  의뢰인이 죽은 뒤, 아무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은 데이터를 대신 삭제해주는 일을 한다. 누군가 죽기 전 삭제를 부탁한 데이터라... 왠지 모르게 강한 호기심이 든다. 야한 사진, 이상한 검색 기록, 범죄사실 등이 아닐까 생각했지만, 책 속 죽음을 앞둔 이들이 남긴 기록은 나의 1차원적 생각을 가뿐히 뛰어넘는다. '사기죄의 증거, 숨겨둔 애인으로 보이는 이성의 사진, 은닉한 돈과 관련된 것' 등 삭제를 요청한 데이터는 무언가 알 수 없는 비밀을 품고 있었고, 의뢰인의 비밀을 들여다본 두 주인공은 차례로 사건에 휘말리게 된다. 누군가의 죽음 뒤, 기록에 담긴 진실과 거짓이 밝혀진다.


삭제를 기다리는 데이터는 각기 다른 사연을 담고 있지만, 한 가지 공통점을 품고 있었다. 끝내 누군가에게 보여줄 수 없는 데이터에는, 슬픔 속에 남게 될 "누군가를 위하는 마음"이 들어있다는 것이다. 가끔은 삭제함으로써 지켜지는 것이 있다. 나만 앎으로써 간절히 지키고 싶은 것이 있다. 돌아올 수 없는 먼 길을 떠나기 전 의뢰인은 남겨진 이들이 상처 받지 않도록 <dele. LIFE>에 데이터 기록 삭제를 요청한다. 고인은 더 이상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지만, 남겨진 이들을 생각하는 진심 어린 마음만은 그들 곁에 맴돌며 존재한다. 그 자체가 마음에 무겁고도 따뜻하게 와 닿는다.



 


나는 어떨까? 나는 과연 나의 어떤 기록을 소중히 남기고, 어떤 기록을 삭제하고 싶을까? 언젠가 맞이하게 될 죽음과, 이승에 남겨질 것들을 상상해본다. 인터넷 속 차곡차곡 쌓여가는 나의 글들은 조금씩 성장하는 나의 생각을 대변해줄 것이고, 앨범 속 웃고 있는 사진들은 사랑하는 누군가에게, '참 행복한 삶을 살았다', 기억하게끔 도와주겠지. 나의 옷들은 편안한 옷을 즐겨 입었다는 것을 말해줄 것이고, 책장에 꽂혀 있는 책들은 나의 취향을 보여주겠지. 그리고 당장은 없지만, 추후에 나의 사랑하는 사람들이 가슴 아파할 만한 기록이 있다면 삭제해달라고 부탁할 것 같다. 당신들 덕분에 삶이 충분히 즐겁고 행복했다는 사실만을 남기고 싶으니까.



정말로 삭제하시겠습니까?
Dele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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