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리뷰]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미세하게 잘못 꼬인 매듭으로부터 모든 비극은 시작된다. 화사하고 선한 미소를 품고 있는 주인공과 밝고 시끄러운 노래로 점철된 이 영화를 보고 있노라면, 묘한 부자연스러움과 기괴함에 어쩐지 이질감이 든다. 실낱 같은 희망을 잡으려 끊임없이 노력하지만 철저히 무너져 내리는 누군가의 인생을 바라보며 나는 눈살을 한껏 찌푸린다. 행복이란 무엇인가, 사랑이란 무엇인가. 그녀가 마지막 생애를 보낸 아파트 주민들은, 그녀를 ‘혐오스런 마츠코’라 불렀다.
어린 시절부터 아픈 동생으로 인해, 가족의 웃음도 사랑도 동생에게 다 빼앗겼다고 생각한 마츠코. 그녀는 항상 무표정인 아버지를 웃게 하기 위하여 일부러 웃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자신이 '웃긴 표정'을 지어 보일 때만 웃어 주시던 아버지의 얼굴에서 사랑을 발견한 그녀는, 아버지의 사랑을 받고자 아버지가 자신에게 바라는 인생을 살아가게 된다.
그녀는 안정적인 중학교 교사로 일하게 되었는데, 제자가 일으킨 절도 사건으로 인해 해고되자, 자신을 얽매던 집과 학교로부터 가출을 감행한다. 그리고 가족을 떠나 자신을 품어주고 사랑해 줄 남자를 찾아 떠돌게 되지만, 만나는 남자들마다 폭력과 폭행, 폭언을 일삼았고 잠자리 상대, 돈벌이 수단으로 밖에 그녀를 바라봐 주지 않는다. 그녀는 착실한 선생에서 불륜녀, 창녀 그리고 살인범까지 되고 만다.
"이번에야말로 인생이 끝났다고 생각했습니다"
짓밟히고 또 짓밟힌 그녀의 암울한 인생이었지만, 그럴 때마다 그녀에게 또 다른 '희망'이 찾아왔고, 실낱같은 희망을 부여잡으며 삶을 이어간다. 그러나 계속되는 배신과 버려짐에 세상과 벽을 쌓은 채 삶을 놓아버린 그녀는 자신을 작은방에 가둔다. 아파트 이웃들은 그런 그녀를 "혐오스런 마츠코"라고 불렀다. 끊임없이 그녀는 자신을 구원해 줄 구원자를 찾아 나섰지만, 끝끝내 그녀는 그 누구에게도 구원받지 못한 채 홀로 죽음을 맞이한다.
가족으로부터 받지 못한 '사랑'의 결핍은, 마츠코를 평생 '사랑'에 목매달게 했다. '사랑'받기 위하여 조건 없는 '사랑'을 내어 주었지만, '사랑'은 그런 그녀를 비웃기라도 하는 듯 ‘혐오스러운’ 삶으로 인도했다. 마츠코의 일생 안에, 마츠코, 자신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타인에겐 무한한 사랑을 주었지만, 자신에겐 단 한 번의 사랑도 주지 못했다.
사람이 이렇게까지 비극적인 삶을 살 수 있을까? 싶으면서도, 주위에서 심심찮게 '사랑으로 무장한 범죄'에 노출되어 끌려다니는 사람들을 발견하곤 한다. 영화의 후기 글을 둘러보면, '나 같아서' 눈물이 났다는 후기들을 종종 발견할 수 있다. 그들이 어떠한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자신의 인생임에도 불구하고, 그 인생 안에 '나'를 넣을 여력이 없을 만큼 힘이 든 상태라는 것만은 느껴진다.
"혐오스런"의 주체에 따라 제목은 이중적 의미로 해석된다. "혐오스러운 마츠코"의 일생일 수도 있고, 혐오스러운 "마츠코의 일생"일 수도 있다. 남자에게 맞고, 남자를 위해 돈을 벌기 위해 몸을 팔고, 자신을 배신한 남자를 칼로 찔러 살해하고, 매번 버림받고 절망에 빠졌지만, 그럼에도 또다시 사랑을 베푸는 것을 선택한 그녀. ‘자신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닌, ‘삶에 멱살 잡혀 끌려간다’는 표현이 마츠코에게 더 잘 어울리는 것 같다.
힘없이 끌려다니는 그녀를 보고 있으면 안타까움에, 비참함에 자연스레 눈살이 찌푸려진다. 누군가 망가져가는 모습을 보는 건 힘들다. 우리는 비참하지만 강렬한 삶을 살다 간 '마츠코'를 '혐오스럽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 아니면 그런 그녀의 '일생'을 '혐오스럽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 어떤 말로 그녀의 일생을 표현할 수 있을까? 영화는 그런 그녀를, 신이라고 말한다.
영화는 말한다. "인간의 가치란 건, 누군가에게 뭘 받았냐가 아니라, 뭘 해 줄 수 있는가"라고 말이다. 사랑을 받는 법보단, 사랑을 주는 법밖에 몰랐던 그녀. 인생이 꼬일 대로 꼬였지만, 그녀는 결코 삶을 포기하지 않았고 그녀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행복을 잡기 위해 노력했다. 끝에는 모두가 정신 이상자 취급하는 이상한 아줌마가 되어버렸지만, 그녀에게 사랑을 받았던 이만은 그녀가 전해줬던 신성한 사랑을 기억한다. 인간의 가치가 '누군가에게 뭘 받았냐'가 아니라 '누군가에게 무엇을 해주었는가'로 정해진다면, 마츠코의 삶은 결코 혐오스럽지 않았다. 오히려 누구보다 값진 인생을 살아왔다고, 수고했다고, 마츠코를 만난다면 꼭 말해주고 싶다.
누군가는 가족을 위해, 누군가는 자존심을 위해, 옛 추억을 위해, 사랑을 위해, 돈을 위해, 모두 각자가 추구하는 가치를 좇으며 살아간다. '무언가'를 위해 살아간다는 것은 살아가는 원동력이 되지만, 그 안에 마땅히 자리 잡아야 할 '자아'가 누락된다면, 삶은 '내'가 아닌 다른 무언가를 중심으로 돌아가게 된다.
마츠코가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해 주고 아껴주는 남자를 만났더라면, 그녀의 인생은 바뀌었을까? 비극에서 벗어나 온전한 행복을 추구할 수 있을까? 내 생각엔 그렇지 않다. 상황은 많이 변하겠지만, 또 다른 결핍이 그녀의 발목을 잡을 것이다. 마츠코는 끊임없이 자신을 구원해 줄 왕자님을 찾았지만, 진정한 구원은 오롯이 혼자 힘으로만 이뤄낼 수 있다. '사랑'을 받는 것이 아닌, 내 안의 '사랑'을 찾는 것. 사랑받으려 애쓰기보다 자신을 가장 소중히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자신을 돌보지도, 사랑하지도 않는 이에게, 그 결핍을 대신 채워줄 백마 탄 왕자님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가슴속에 각자만의 상처와 결핍을 품고 살아간다. 크기와 색깔은 모두 다르겠지만, 각자의 아픔과 상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모두가 결핍에 굴복해, 자신을 모두 내려놓고 살아가진 않는다. 결핍을 인정하고, 바라보고, 사랑하며 자신의 삶을 되찾아 갈 수 있다. 빠르고 무관심해지는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단단한 '내'가 강력한 무기가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