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치 같은 나날들이에요.

안녕하세요.모로코에서 온 방낙타입니다.

by 지민


여행에 있어 물러 터진 우리가 가진 것이라고는 크고 하얀 i가 준 지도 그리고 비상시에 우리를 돕기 위해 지구를 돌고 있는 GPS 위성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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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꿔 생각하니, 모험이 불가능한 지나치게 갖춰진 도시를 딛고 있는 우리는 사전 지식과 가이드북으로부터 결핍을 당하고 있고, 그래. 물러 터진 우리는 모험이 가능한순간에 다다르고 말았어.라는 결론을 봤어요. 똑똑한 가이드북과 부지런한 과거의 우리가 효율이나 가치의 잣대를 들고 미리 그려놓은 걸 찾는 게 아니라, 백지보다 더 조용한 무지 위에서 그저 매 순간 우리와 그 자리와 온 우주의 먼지들과의 긴박하고 즉흥적인 실시간 합의를 통해 그려나가는 모험! 무엇을? 글쎄. 무엇을 그릴지는 모르겠지만. 길고 절절하지만 결국 준비 없이 남에 나라에 와서 딱히 할 일이 없는 이들이 그냥 막 돌아다니겠다는 이야기이지요.

스크린샷 2015-06-25 오전 12.52.47.png 꽃이 철철철

고맙게도 바르셀로나는 준비 없이 온 우리에게도 한상 푸짐하게 차려진 잔치 같은 곳이었어요. 캬. 조용히 자리에서 해가 비춰주는 만큼의 빛을 온몸으로 충실히 받으면서 활기찬 웃음을 지어 보이는 건물들을 보는 게 즐거웠죠. 건물을 덮은 지붕의 끝을, 건물을 두른 창문의 배열을 구경하느라 (그것도 모양으로나 기능으로나 지극히 평범한 건물들을) 시간을 잊은 여행의 경험은 이제껏 없었기에 이렇게 시간을 보내는 내가 나도 신기했어요. 예쁘다, 멋지다 같은 하나의 형용사로는 설명이 충분하지 않은 건물이 길을 따라 쪼롬하게 서있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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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저런 시각으로 보고싶은 건물들이 많아서, 멀리서 전체를 훑어보고 다가가서 주의를 기울여 부분을 살피고 또 다른 각도에서 큰 그림을 보기 위해 길을 건너고. 그렇게 온몸으로 줌인 줌아웃을 해가며 시야를 넓히고 또 작은 부분에 눈길을 주고. 그렇게 건물과 내가 어야저야하며 이야기를 하는 기분이란 게, 이를테면 너 여기도 볼래? 나 여기 이 부분도 멋진데. 어때? 오! 정말이네! 잠시만 건너가서 다시 볼 테니까 좀 더 보여줘 봐. 이런 기분이요.

스크린샷 2015-06-25 오전 1.00.36.png 온몸으로 줌인 그리고 줌아웃!

시간이 흐르니 그 세밀한 하나하나의 기억은 뭉치로 희미해지는 중이고, 남겨진 사진도 그 대화의 순간을, 색채를 담지 못하지만서도 그 때 그렇게 건물과 오며가며 대화를 나눈 기분은 생생해요.


야단스럽게 말할 줄 모르는 조용한 성격의 좋은 것, 멋진 것을 지나치지 않도록 귀를 낮출 것.

작은 소리나마 내 관심을 부른다면, 귀찮고 번거로워도 길을 건너고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는 수고를 감수할 것.

혹 내 기대를 채우지 못했다고 해도 움직이고 고개를 돌리는 시간과 수고를 아까워하지 말 것.

모든 것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이가 될 것.

뭐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사실 여행길에 널려있는 경험을 줍다가 길 끝에서 느낀 건 어쩜 인과나 기승전결이 조금 틀어졌을지 몰라요. 하지만 여행이라는게 그렇잖아요. 일렬로 야무지게 앞 꼬리를 무는 생각이 아니라, 생각의 측으로 잔가지가 돋고 돋아 다른 방향으로 생각이 나고 자라고. 그 범위의 울타리가 풀린 상태. 어쩜 이 여행을 더듬어보는 지금의 내 말도 울타리가 풀렸다 싶어요.

스크린샷 2015-06-25 오전 1.11.46.png 캬! 잔치 같은 시간이에요.

아무튼 정말 잔치 같은 나날들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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