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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민 Aug 09. 2015

낙타를 앞세우고 서점을 한다는 건

공교롭고 쑥스럽지만 가끔은 동화 같은 것.

'슬기로운낙타'라는 조금은 유치한 이름의 신생아 책방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낙타를 앞세우고 서점을 한다는 건

시작은 이랬다.


남매는 인형을 좋아했고 하관이 귀여운 낙타나 라마, 알파카와 살아보는 것을 많은 소원 중 하나로 여겼다. 남동생은 모로코 여행 중 눈이 맞은 낙타 인형을 챙겨 돌아왔고 누나는 그 낙타 인형을 가졌다.

안녕하세요. 모로코에서 온 방낙타입니다.

누나는 혼자 떠나는 여행길에 낙타를 한 번 두 번 여러 번 챙겼다. 책과 출판에 막연한 동경을 품고 어른이 된 누나는 방낙타의 여행기를 만들던 중 어쩌다 보니 작은 서점을 열게 된다.


시작은 그랬다.


내 서점도 좀 그럴듯한 이름이 있었으면 했다. 담백하면서도 은은하며 힙핫쿨한 멋진 이름을 가진 선배 책방들이 즐비했다. 아 나는 왜 저런 이름을 잡지못하는 걸까.


사람이니까 가끔 공상 상상을 하는데 훗날 내 서점에 붙일 이름도 자주 오르는 주제였다.(진짜 현실이 될지 몰랐는데 상상이 열매가 되었다. 생각도 함부로 못하겠다...) 그 기억을 샅샅이 뒤져 늘어놓았지만 별 성과가 없었다. 어떤 이름도 어설프면 어설퍼서, 멋진 듯하다가도 넘치는 듯해서 마음에 들지 못했다.

절절한 책방 이름 후보들.

아무튼 후보 1. 스트릭래리 : 제일 좋아하는 소설가 서머싯 몸의 소설에 나오는 인물 스트릭랜드(달과 6펜스)와 래리(면도날)의 합성. 그럴듯했으나 나 혼자에게만 그럴듯한 이름이 될 듯해 접었다.


아무튼 후보 2. RoundAbout : 원형 교차로를 뜻한다. 여러 갈래의 새로운 방향으로 취향과 관심을 돌리기 위해 꼭 들러야 하는 빙빙 도는 로터리 같은 책방이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생각한 이름.


아무튼 후보 3. 스반홀름 : 어느 한 글자 빼지 않고 다 주워담아 평생 품고 싶을 만큼 좋아하는 노래의 제목. 이 노래가 그려주는 어느 공간의 공기 냄새 풍경을 그대로 책방에 옮겨놓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이 이름을 택하지 않은 건 정말 잘한 일이다. 먹칠도 그런 먹칠이 없었을게다. 정말 신기하게도 책방을 준비하면서 우연히 이 노래를 부른 김목인 씨를 보게 되었다. 촌스럽지만 싸인도 받고 두서없는 문장으로 스반홀름이 내 책방 이름의 후보였다는 이야기도 늘어놓았다.(지금에서 기억을 더듬어보니, 스반홀름과 헷갈려 스톡홀름이라 말한 것 같다..... 아.....)

하필 가진종이가 광택 가득한 명함뿐인 나는 조심조심했지만 그의 사인은 무참히 번져버렸다. 아 멋져. 뮤즈가 함께하시길 이라니. 멋지다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아무튼 후보 4. Brighton : 예전 잠시 머물렀던 동네 이름으로 구석구석이 이쁘고 소박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넘치는 그리움을 책방을 제물 삼아 보여주고 싶었다.


그 외 : low dot, 넉살 좋은 낙타, 팔자 좋은 토끼 등. (정말 너무 부끄럽다.....)


시작은 그랬다.


꽤나 긴 시간 생각을 끄집어내고 풀어놓은 것이 무색하게 슬기로운 낙타라는 이름은 불쑥 떠올랐다. 더듬어봐도 그 생각이 어디서 왔는지 도무지 알 길이 없다. 그냥 갑자기 퐁 하고 생겨났다. 물론 저 낯 뜨거워지는 이름들을 딛고 올라서 지금의 이름(그렇다고 지금 이름에 낯이 뜨거워지지 않는 건 아니다...)에 닿을 수 있었겠지만 그렇다 해도 매우 두서없고 갑작스러운 만남이었다.


그랬다.


그렇게 슬기로운낙타의 주인이 되었다.

분명히 손으로 그린 로고. 발로 그린적은 없다. 절대.

낙타를 앞세우고 서점을 한다는 건 공교로운 일이다. 적어도 2015년 초여름을 대한민국에서 지냈다면. 중동에서 시작되었다는 그 역병으로 관심의 불모지에 있던 낙타는 검색어 스타가 된다. 생사가 달려있음에 다들 심각하고 무거운 마음을 가진 그때 주위의 많은 사람들이 세포가 호흡기가 있을리 만무한 내 낙타 인형의 그리고 낙타 인형을 옆에 둔 나의 안위를 걱정하는 해학적 태도를 보여주었다. 여기저기서 없던 관심을 받으며 공교로운 초여름을 지냈다. 정말 상당히 공교로웠다.


낙타를 앞세우고 서점을 한다는 건 쑥스러운 일이다. 택배 기사님이 물어보신다. 슬기로운 낙타죠. 지금 계세요? 택배를 맡아주신 경비아저씨께서 물어보신다. 이거 슬기로운낙타에 온건데, 1505호꺼 맞아예? 1층 주인아저씨가 두리번거리는 행인을 보고 말씀하신다. 혹시 슬기로운낙타 찾아오셨어예? 대답하자니 듣고 있자니 지구 내핵으로 꺼지고 싶을 만큼 쑥스럽다. 내가 지은 이름이지만 입에 담기에 참으로 몸이 꼬인다. 내가 지었지만 참.


낙타를 앞세우고 서점을 한다는 건 낙타의 회사 동료가 되는 일이다.

1분 전 내게 곱게 택배를 전해준 우체국이 나에게 회사 동료에게 전달해둔 택배를 알고 있으라며 자상한 문자메시지를 남긴다. 글쓴이의 의도가 아리송 할 때에는 본문을 곱씹어봐야 한다. 자상하지만 의도를 알 수 없는 문자메시지를 곱씹어보고 나는 베시시 웃음을 흘렸다. 우체국은 슬기로운’낙타’를 수신자로 보았고 택배를 수령했다고 사인을 한건 인간인 나 BJM 씨였다. 그래서 나 BJM 씨는 택배 주인인 낙타의 회사 동료가 되어 낙타에게 문자메시지로 보고된 것이다. 그렇다. 나는 슬기로운’낙타’의 회사 동료이다.


낙타를 앞세우고 서점을 한다는 건 공교롭고 쑥스럽지만 가끔은 동화 같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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