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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민 Sep 04. 2015

(구) 엔지니어가 서점을 한다는 건

'신기한 거 하는 애'가 되어 모든 것이 신기해지는 것

LCD 패널을 만드는 회사에서의 엔지니어 생활을 그만두고 생판 경험 없이 좋아하는 마음 하나 믿고 독립출판서점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구) 엔지니어가 서점을 한다는 건


#1. 다들 돔 하나씩은 속해있잖아요.

이 공부를 하고 그 직업을 선택하고 저 분야를 배제하다 보면 어느새 적당한 크기의 얇은 돔으로 되어있는 어떤 세계에 내가 들어와있다. 같은 돔에 있는 이들은 비슷한 모양새로 세상살이를 이해하고 있다. 급기야 끼리만 웃을 수 있는 농담 그리고 이해할 수 있는 단어와 문장이 돌아다닌다. 이 돔 바깥에 있는 이들과 쓰는 말 숨 쉬는 공기는 같지만서도 다르게 이해된 세상을 딛고 산다.


내가 속해있던 '돔'이란 공대생-회사원-엔지니어 정도로 규정되겠다. 어느 날 나는 그 돔을 벗어나 이 돔과 저 돔을 기웃거리며 지내고 있다. 최근 들어온 돔에는 서점을 운영하시는 분들 뿐 아니라 그림이나 글 사진과 같이 다양한 방법으로 책을 만드는 분들도 자유로이 여행하는 분들도 마냥 자유로운 분들도 어쨌거나 매우 다양한 분들로 가득하다. 그렇게 돔돔을 기웃거리다 보면 we are the world나 단일민족과 같은 분명한 단어로는 설명이 힘든 다양하며 서로 견고하게 갈린 세상들을 넘나들고 있다는 기분이 든다.


#2. (구) 돔 그리고 (신) 돔

(구) 돔에서의 보수란 월정액으로 내가 많이 움직여도 또는 움직이는 듯 움직이지 않아도 항상 같은 수치를 보였으며, 일이라 함은 업무라는 말과 같은 이미지로 어디에나 널려져 있어 슬슬 다가가 주우면 내 것이 다가가지 않아도 여전히 내 것인 정적인 개념이었고 작업이라 함은 라인에서 이리저리 움직여가며 진행하는 내가 관리하는 업무의 하나였다.


내가 신생아의 자격으로 이제 막 들어선 세계에서의 보수란 그 수치의 폭이 삼각함수 수준으로 널을 뛴다. (최대값은 0과 별반 다르지 않아 더 슬프다.) 적고 변화의 폭이 야단스럽다. 일이라 함은 기획과 같은 이미지로 비누거품 같아서 만진 후 부지런하게 손을 비벼야지만 무엇이 생긴다. 비비지 않으면 정말 아무것도 생기지 않는다. 냄새도 안 난다. 작업이라 함은 내가 이제 막 발을 들여놓은 돔에 가끔 보이는 작가님들의 퍼포먼스를 위한 피와 고난의 과정이다. 가끔 나부랭이지만 나도 겪을 일이 생기는데 정말 좋은데 괴롭다.


각 돔에서는 마음가짐도 달라야 한다. 각 돔에서 형성된 상식 또는 평균적인 삶은 틀린 게 아니라 다른 것이기에 돔 사이의 우월함을 따지는 것은 정말 어리석은 일이기 때문이다. 가끔 예전돔에 들러야 할 일이 생기거든 나는 철저하게 내 마음가짐을 공대생-회사원-엔지니어의 그것으로 변환시킨다. 지금 내가 속한 돔은 아니지만 그들의 이야기에 충분히 공감하고 동의한다. 진심으로. 그리 살고있지않다해서 내가 하는 공감이나 동의가 가볍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진심으로 모드를 변환한 상태에서 오는 공감과 동의니까. 반대로 아주 가끔 이제 막 들어온 돔의 상식이나 평균적인 삶이 새롭거나 파격적일 때가 있다. 이곳에서 나는 이제 막 눈을뜬 어린이 수준의 경험치를 갖고 있기에 하루빨리 익숙해지기를 바라며 나의 충격을 어느 구석에 차곡차곡 쌓아둔다.


#3. (구) 엔지니어가 서점을 한다는 건 '신기한 거 하는 친구'로 카테고리화 되는 일.

(구) 돔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무리의 어떤 이들은 넘치는 호기심과 신기함을 주체하지 못하고 '19명의 동기들 중 최초 창업자'라는 신박한 길을 선택한 나에게 결혼식장 혹은 장례식장에 어울리는 크고 둥근 화환으로 그들의 넘치는 마음을 표현했으나 그 와중에 얼른 정신의 끈을 잡은 지혜로운 한 명의 선택하에 평범하고 조용한 나무 화분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들은 고심 끝에 축하 문구를 정했다고 했다. 화환을(결국은 나무가 되었지만) 고르고 문구를 정하는 동안 즐거웠다는 그들이 귀엽다.


귀엽지만 심란하고 울컥한 마음도 함께 든다.


이처럼 (구) 돔에 사는 이들은 내가 막 들어온 돔에 얼굴을 대고 기웃거리며 궁금해한다. 고맙게도 대부분은 내가 선택한 길을 로망이나 꿈이라 칭해주며 부럽다며 고운 손길로 나를 도닥여준다. 아. 아주 가끔은 이해하지 못하는 얼굴을 여과 없이 드러내고 이해하지 못한다는 말을 거침없이 내뱉는 이도 있다. 뭐 아무튼 그 모두에게 나는 '신기한 거 하는 친구'로 카테고리화 되었다. 어. 내 친구 중에 ** 다니는 애 있는데, ** 하는 애 있는데-에 나는 속하지 않는다. 어. 내 친구 중에 되게 신기하는 거 하는 애 있는데. 이게 나의 위치다.


#4. (구) 엔지니어가 서점을 한다는 건 모든 일이 '신기한 것'으로 카테고리화 되는 일.

누군가 날 서점 주인이라고 불러준다. 벅차다.

누군가의 귀중한 책이 우리 집으로 모인다. 벅차다.

내가 훔쳐보던 서점에 들어가 저..... 서점.... 낙타.....라고 수줍게 말했는데 내 낙타를 알고 있다. 벅차다.

내 공간에 멋진 책들이 모여있다. 벅차다.

그 공간에 찾아온 이들이 기뻐하며 책을 고르더니 나에게 지불한다. 벅차다.

퇴사 후 우연히 만난 회사 선배들에게 책방 주인의 이름을 한 명함을 건넨다. 벅차다.


지금은 숨만 쉬어도 벅차고 기쁘다.

모든 것이 신기하다.

조금 더 과장해서 말하자면 세상 모든 것이 신기한 어린이가 된 기분이다.


언젠가 나도 이 분야의 반복된 경험으로 반복된 시간으로 이 일들이 아무렇지 않은 때가 올 거라는걸 알고 있기에 그때가 늦게 와주십사 가끔 빌어본다.


(구) 엔지니어가 서점을 한다는 건
'신기한 거 하는 애'가 되어 모든 것이 신기해지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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