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못난인형 Sep 10. 2019

낮에 본 아버지


<2013. 8 mbc여성시대 방송글로 동생으로부터 들은 간접 경험이 포함되어 있다>


늦둥이 딸아이랑 놀이터로 나가는 길에 아버지를 보았습니다.

두 평 남짓한 경비실에서 작은 체구에 얼굴 가득한 주름과 순박한 웃음을 간직하신 아버지가 인터폰을 받고 계셨는데 눈을 비비고 자세히 보니 11년 전 돌아가신 친정아버지를 많이 닮으신 경비 아저씨셨어요.


그 순간 제 기억은 1980년 봄날, 정확히 33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갔습니다.

강원도 두메산골에서 자그맣게 농사를 지으시던 부모님은 중고등학교에 다니며 한창 돈 들어가는 저희 오 남매를 교육시키고자 엄마의 동생인 이모가 살고 있는 이곳 부천에 단칸방을 구해 뿌리를 내리게 되었는데, 아이가 많으면 세 얻기도 어려웠던 시절이라 계약을 할 땐 아이 다섯을 셋이라고 속이고 타지에서 자취하다 방학이면 집으로 오던 오빠와 나는 며칠을 숨어서 지냈던 기억도 납니다. 고만고만한 자식들이 아침에 등교할 때마다 돈 달라고 짜증내면 돈을 삽으로 퍼도 못 당하겠다고 푸념하시던 부모님은 한동안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먹는 것도 아껴가며 고생하셨지만, 몇 달이 지나 아버지는 환경미화원으로 엄마는 가사도우미 일을 시작하며 힘겨운 타향살이를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담배와 술을 지나치게 좋아하고 씻는걸 귀찮아하셨던 아버지는 환경미화원으로 일하면서부터는 일 끝나고 마시던 막걸리 냄새까지 더해져서 멀리서도 안 좋은 냄새가 진동을 했는데 철없던 그 시절, 저는 아버지 곁에 가는 것도 몸서리 처지곤 했으니 아버지를 보면 짜증만 났습니다. 

한 집에 살면서도 애틋한 눈빛을 나눈다거나 다정한 말 한마디 건네 본 기억이 없으니 못난 딸은 이제서 후회와 아쉬움에 코끝이 시큰하네요.


아버지는 착하기만 하신 분이었습니다. 특히 밖에서는...

다행히 아버지의 착한 성품을 알아보신 회사 사장님이 같은 회사 경비로 자리를 옮겨 주셨는데, 하시는 일은 고달팠지만 부모님 인생에서 그 시절이 가장 뽀얗고 생기 있던 시절이었습니다. 환경미화원으로 밖에서 일하시다가 경비실에서 근무하시게 된 아버지의 얼굴은 시커먼 얼굴에서 조금은 사람다워졌고 먹지를 못해 비쩍 말랐던 엄마는 가사도우미로 생활하며 잘 먹을 수 있었던 덕에 얼굴과 몸에 살이 오르고 피부색도 새하얘졌습니다.


가사 도우미였던 40대 엄마가 주인집 아줌마에게 빌린 바발리 코트를 입고 우리 학교에 찾아온 어느 날, 친구들은 입을 모아 "너네 엄마 진짜 미인이다!"라고 말했고 제 눈에도 엄마는 엄청 예뼜습니다.

가난이 아니라면...

우리 엄마도 꾸미기만 하면...

어쩌면 꾸미지 않아도 예쁜 분인데 우리 오 남매 키우느라 오로지 일에 파묻혀 사셨다는 걸 똑똑히 보았는데 이제와 되돌아보니 가난했지만 건강했고 서로를 의지하며 아등바등 살았던 그 시절이 부모님 인생에서 따뜻한 봄날인 듯싶습니다.


엄마는 가사도우미 생활을 하면서 부엌 일과 마당이 넓었던 2층 단독 집 청소를 도맡아 하셨고, 세탁기를 두고도 주인집 넷이나 되는 아들들의 청바지까지 손빨래로 하셨기에 칠순이 지난 지금 손가락과 무릎 관절이 안 좋다고 하시면 마음이 아프다 못해 쓰려옵니다.

어설픈 칼질에 손을 심하게 베인 어느 날, 엄마는 철철 흐르는 피를 붕대로 감고 병원에 안 가겠다고 버티셨고 저는 엄마 때문에... 가난 때문에... 이불을 뒤집어쓰고 서럽게 울며 '나는 절대로 가난하게 살지 않을 테야.' 다짐했던 기억도 나네요.


몇 시간 전 재래시장을 다녀오다가 가래떡과 우유를 경비실에 가져다 드리고는 눈시울이 시큰해져서 "고맙다, 잘 먹겠다" 말씀하시는 경비 아저씨를 뒤로하고 얼른 집으로 들어왔는데 몇 시간이 지난 지금도 아버지 생각에 목이 메이네요. 고생만 하시다 너무 빨리 돌아가신 아버지가 생각나는 너무도 따스한 봄날입니다.


(*퇴고를 했는데 맘에 들진 않지만 올려봅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공포의 음악시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