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못난인형 Sep 24. 2019

버스에 관한


시골에 살 때 일반인들이 유일하게 이용할 수 있는 교통수단은 한 시간에 한 번 덜컹거리며 지나가던 고물 버스가 유일했다. 행길 또는 신작로로 불렸던 비포장 도로에 어쩌다 지나는 군용 트럭이나 버스는 뽀얀 먼지를 일으키며 내가 살던 남편 적리를 지나 양구 읍내와 방산면, 그리고 동면 너머 민간인 통제구역인 해안면까지 넘나들었고 나도 함께 달리고 싶었지만 버스가 내뿜는 연기를 보고 마시며 허기증을 달랬다.


최초의 버스에 관한 나의 기억은 초등학교 저학년 때 일로 예쁘장해서 동네 군인가족 젊은 부인들이 데려가서 놀곤 했다는 여동생은 여섯 살 무렵이었다. 어른들은 오일장이 서는 날이면 감당하지 못할 만큼 물건을 가득 사서 큰 보따리는 머리에 이고 작은 보따리들은 두 손 가득히 들고 오셨는데 그날도 장터에 다녀오신 엄마는 짐에 파묻혀 녹초가 되어 돌아오셨다.


엄마는 툇마루에 앉아 한숨 돌리는가 싶더니 벌떡 일어나 허둥지둥 뛰쳐나갔고 이유는 많고 많은 짐을 챙기느라 뒷 자석에서 잠들었던 예쁘장한 셋째 딸을 버스에 두고 내렸기 때문인데 아마도 마을에 한 대 있던 전화기 있는 집으로 부랴부랴 뛰어가서 버스회사로부터 돌아오는 길에 내려주겠다는 다짐을 받고 뒤늦게 여동생을 찾아온 것으로 기억된다.


중학교에 입학하면서는 그토록 열망하던 버스를 날마다 탈 수 있는 기회가 왔는데 우리가 탔던 버스는 흡사 콩나물시루를 연상시켰으니 그 시절 버스를 떠올리는 "부릉부릉" 출발 소리 위에 버스 안내양의 "탕탕! 오라 잇~" 소리가 오버랩된다. 학생들을 태우던 고철 버스는 학교와 비교적 가까웠던 우리 동네에 올 때면 앞문이고 뒷문이고 사람이 탈 수 없을 정도로 미어터졌고, 용돈이 따로 없던 친구와 나는 하굣길엔 편도 50원이던 버스비를 아껴서 티나 크래커 한 봉지씩 들고 선크림도 양산도 없이 한여름 땡볕을 사오십분 걷곤 했으니 중년인 지금도 내가 에너지를 주체 못 하는 건 어쩌면 그 때문인지도 모를 일이다.


자가용이 귀하던 그 시절, 어린 나는 가끔 엄마한테 이렇게 말했다.

"엄마, 이담에 내가 커서 어른이 되면 돈 많이 벌어서 엄마 자가용 태워줄게"

그럼 그때 엄마의 대답은 늘 한결같았지.

"겁 많은 네가 무슨 운전을 해~"


사회인이 돼서 버스를 타면 어렸을 적 기억 때문인지 자가용을 직접 운전할 때와 다른 느긋함이랄까 그냥 좋다. 요즘 한 발자국 떨어져서 관찰자의 느낌으로 본 버스 풍경은 이렇더라.


시흥 시내버스를 타면 종종 버스 안에 기사님과 나 둘뿐. 뻘쭘하다.

자리가 하나밖에 없어서 맨 뒷 자석에 앉았는데 하필 뜨거운 연인들이 바로 앞에서 애로 영화를 찍는다.

깜깜한 밤에 버스를 기다리는데 버스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군대라도 보내는 듯 눈물겨운 교복 입은 커플.


살아온 날 만큼이나 아득하고 아련한 버스에 관한 추억.


매거진의 이전글 낮에 본 아버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