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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못난인형 Jan 07. 2021

다시 걷는 즐거움- 만보걷기 효과

만보 걷기 효과

담만 넘으면 있던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탈탈거리던 고철 수준의 만원 버스를 타고 중학교를 통학했다. 워낙 시골 동네라 시간당 한 대꼴로 다니던 버스는 등교 시간이 되면 문을 닫기 힘들 정도로 승객이 많았고 차장은 학생들을 짐짝처럼 구겨 넣었다. 한 번은 꾸역꾸역 밀어 넣어졌는데도 용수철처럼 튕겨 나와 지각을 하기도 했다.


아버지는 아침이면 철제 책상 서랍 앞쪽에 늘여놓은 동전 가운데 하루의 버스비를 정확히 세어 주셨다. 용돈을 받는다는 건 꿈도 꿀 수 없었다. 등굣길에 50원, 하굣길에 50원! 먹고 싶은 것이 많았던 사춘기 시절 군것질을 하려면 무조건 걸어야만 했다.


                         


한마을에 살던 친구 열이와 나는 한여름 뙤약볕에도 강가를 따라 이어졌던 머나먼 하굣길을 양산도 선크림도 없이 젊음을 무기로 걸었다. 크래커나 얼음과자를 하나씩 들고 유유자적 걷다가 지치면 가로수 그늘에 앉아 수다를 떨었고, 비 오듯 땀이 흐를 땐 교복을 입은 채로 강가에 들어가 물놀이를 하고 다슬기를 잡았다. 강가에서 자라는 뽕나무에서 오디를 따먹기도 했다. 자외선의 영향일까. 이후로 우리 얼굴 콧등 주변에는 주근깨가 밭을 이루고 있다.


학창 시절엔 간식비를 벌기 위해, 젊어서는 살기 위해 일하기 위해 걸었다면 중년인 현재는 심신의 건강을 위해 걷는다.


갱년기에 접어들면서 중년의 체형인 일자형 몸매로 변해 허리가 없어지고 몸이 둔해지는 걸 느꼈는데 아니나 다를까 체중계에 올라서니 어느 순간 앞자리가 바뀌어있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더니 성인이 되고 내 몸은 체중계 앞자리가 변한다. 근육과 뼈대는 약해지고 체력은 쇠퇴하고 먹는 대로 살로 가는 나이이므로 적게 먹고 많이 움직여야 한다지만 습관적으로 생활하다 보니 게으름의 지표처럼 몸이 불어난다.


운동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고 기초체력이 약한 내가 선택한 운동은 누구나 쉽게 도전할 수 있는 유산소 운동인 만보 걷기이다. 걷기의 장점으로는 장소와 시간의 구애를 받지 않고, 특별한 기구가 필요 없으며, 오염물질인 탄소 배출이 적다는 점을 들 수 있다.

평소의 급한 성격만큼이나 빠른 걸음으로 아이들에게 경보 선수냐는 놀림을 받는 내가 만 보 걷기를 시작하고 목표한 체중 감량에 성공했다. 살이 빠졌다고 예쁘다고 할 순 없지만 답답함이 덜하고 가뿐함마저 든다. 갱년기 증상으로 찾아왔던 불면증이 사라지고 잠이 맛있으니 이 또한 즐거움이다. 걷기의 효과는 신체 건강에 그치지 않는다.


길이 시인을 만든다고 했던가. 자동차로 빠르게 이동할 때와 느리게 땅을 밟으며 걸을 때는 시야가 달랐다. 걷기를 시작하고부터 편하고 빠른 아스팔트가 아닌 흙길을, 지름길이 아닌 돌아가는 길을 간다. 무심히 지나쳤던 일상을 느긋하게 바라보며 사색의 시간을 가지고 그 속에서 흐트러진 생각을 정리하고 불안정한 감정을 다스린다.


추억을 걸으며 지나간 인연을 생각하고 지금은 세상에 안 계신 가까운 지인을 만나기도 한다. 어린 시절의 나를 만나는 시간이기도 하다. 거칠게 갈라진 손으로 “내 강아지” 하며 잠든 내 배를 쓰다듬던 할머니의 온기를 생각하면 화롯가에 앉은 것처럼 훈훈해진다. 반면 아픈 아이를 낳은 내 친구 열이나 김치 쪼가리 앞에 놓고 소주병을 마주한 아버지 모습이 떠오를 때면 눈시울이 벌게지며 산다는 게 서글퍼진다. 그 시간은 가슴 저린 아픔이면서 아련한 그리움이기도 하다.



창밖에 비가 내린다. 가벼운 옷차림에 우산을 챙겨 들고 집을 나섰다. 우중 산책의 느낌은 맑은 날과 사뭇 다르다. 사위가 고요한 가운데 우산 위로 떨어지는 빗소리가 청명하다. 촉촉한 대지 위에서 바라보는 풍경이 운치 있고 걸을 맛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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