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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못난인형 Jan 03. 2021

김애란의 칼자국을 읽고, 엄마의 칼자루를 생각하다.


새끼들이 끊임없이 먹어야 했던 것처럼 어미는 끊임없이 무언가를 만들어냈다. 흙으로 벽을 쌓고 얇은 나무판 대기로 문을 매단, 가난한 부엌에서도 부지런히 이런저런 것을 씻고, 재우고, 끓여댔다. 낮 동안 텃밭에 쪼그리고 앉아 허리 한 번 못 펴보고 일했던 그녀는 무쇠 팔, 무쇠 다리, 로켓 주먹을 가진 마징가 Z처럼 지칠 줄을 몰랐다. 그처럼 넘치는 에너지를 지켜보던 어린 새끼들은 물론, 가장이던 남편마저 마구 게으르게 만들었다.


식구들이 깊은 잠에 빠진 어두컴컴한 새벽 시간 홀로 일어나 아침밥을 준비하듯, 저녁 준비를 위해 밭에서 돌아온 그녀는 목에 두른 수건으로 먼지를 훌훌 털고 곧장 부엌으로 들어섰다.          


장정도 힘에 부쳐 쩔쩔매던 퍽퍽한 펌프질로 커다란 가마솥에 가득 물을 길어 붓고, 무능한 남편 대신 틈틈이 모아 온 싸리나무로 아궁이 불을 지폈다. 아궁이 앞 작은 가마솥에선 밥이 끓고, 화로 위에는 찌개가 끓었다.


초등학교 담벼락과 마주하던 우리 집. 엄마의 고된 노동과 공부가 뒷전이던 나는 친구들과 운동장에서 놀다 해질녘이 되서야 집으로 향했다. 플라스틱 바가지에 "벅 벅벅" 쌀 씻는 소리, "딱딱 딱딱" 도마질 소리, 굴뚝에서 솟던 연기와 구수한 밥 냄새를 맡으면 마음이 편안해졌다. 김애란의 칼자국을 읽으며 엄마의 손에서 놀던 칼을 떠올려 본다. 낡은 나무 손잡이와 무딘 칼날, 엄마의 칼질 횟수만큼 움푹 패었던 나무 도마.      

돌이켜보면 끼니때마다 김이 모락모락 피던 가마솥을 열고 공기 가득 담아준 흰쌀밥은 엄마의 사랑이고 믿음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새끼에게 새 밥을 해 먹이는 책임감과 부지런함. 그런 엄마가 주걱을 들고 뜬 첫 공기는 노름하느라 언제 들어올지 모를 남편을 위한 것이었다. 밥공기는 손수건으로 싸매진 채, 오 남매의 뒤척임대로 따뜻한 아랫목에서 밤새 굴러다녔다. 무책임하고 능력 없는 아버지가 미워 걸리적거리던 밥공기를 증오했지만, 내심 아버지를 향한 엄마의 사랑을 믿으며 안심이 되기도 했다. 뜨거운 사랑은 아닐지언정 연민을 지닌 동지애 어디쯤을 느끼며. 적어도 엄마가 우릴 버리고 도망가진 않을 거라는 안심이 되는 거였다.


김애란의 '칼자국'을 읽으니 무딘 칼날만큼이나 뜻대로 안 되던 삶 속에서 젊음이 지는 것도 모르고 부지런히 칼질하던 나의 어미가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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