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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못난인형 Jul 23. 2019

성공한 삶

추억 속으로


1970년대 중반, 호롱불을 쓰던 우리 동네에도 드디어 전기가 들어왔고 한집 두 집 tv로 들여놓기 시작했는데 한동안 tv가 없던 우리 남매들은 앞집, 뒷집, 혹은 다리 건너 친척집을 전전하며 윗목에 옹크리고 앉아 눈치 밥이 아닌 눈치 시청을 해야 했다.

칼라 텔레비전이 등장하기 전인 1970년대 중후반, 흑백 화면에서는 가냘픈 몸매에 예쁘장한 얼굴의 혜은이가 나와 '감수광, 제3한강교, 당신은 모르실 거야, 진짜 진짜 좋아해..'를 부르며 혼을 쏙 빼놨고, 김영란 주연의 드라마 '옥녀'에서는 관에서 귀신인 옥녀가 일어나고 거울 앞에서 귀신이 비치곤 했는데 "옥녀야~ 옥녀아!"소리에 "어머니~ 어머니~"하며 대꾸하던 김영란의 목소리는 40여 년이 지난 지금도 너무나 생생하게 내 귓가를 때린다. 이 드라마는 tv를 들여놓기 전 길 건너 친척집에서 덜덜 떨며 보다가 칠흑같이 어두운 밤길을 헤치고 집으로 돌아와야 했기에 더욱 기억에 남는 듯싶다.


그리고 드디어 1977년(?) 우리 집에도 드디어 요술 상자를 들이게 되었다. 엘지(LG)의 예전 회사명인 금성(GS) 마크가 박힌 80kg 쌀자루만 한 크기의 황토색 tv는 미닫이 문이 달린 제품으로 수신 상태가 안 좋아 지지직 거릴 때면 두드려 패야했던 제품인데 아마도 지금쯤엔 박물관에 가야만 볼 수 있지 않을까.

어른들은 하루 종일 tv앞에 붙어 있던 우리들에게 tv만 보지 말고 공부 좀 하라고, 혹은 tv를 너무 가까이에서 보면 시력 나빠진다고 호통을 치셨지만 야단칠 때만 잠시 멀리 앉았다가 어느 순간 내 몸은 자석에 이끌리듯이 브라운관 바로 앞에 옮겨지곤 했고, 어쩔 땐 의도적으로 30센티 앞에 앉아 '내 눈아 나빠져라, 눈아 나빠져라...' 주문을 걸곤 했다.


초등학교 고학년 무렵부터 간혹 안경을 쓰고 오는 친구들이 한 둘 있었는데 그런 친구들을 보면 왠지 부티나 보이고 유식해 보여서 부러웠 나도 안경을 쓰면 콤플렉스인 움푹 들어간 눈을 가려 조금은 예뻐질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력이 나빠지기는커녕 40대 중반에 노안이 오기 전까지 2.0~1.2의 시력을 벗어나 본 적이 없으니 간절했던 소원은 에피소드로 끝나고 말았다.


초등학교 6학년 때, 같은 동네 살던 명희가 맹장수술 때문에 일주일간 결석을 했는데, 일주일 후 학교에 나온 명희는 나와 함께 누런 콧물 흘리며 땅따먹기를 하던 시골 아이가 아니라 하얗고 뽀얀 도시 여자로 바뀌어 있었다. 한 친구가 말하길 도시에서 마시는 수돗물 속에는 피부를 하얗게 해주는 약이 들었다고 했는데 그런 명희를 보며 부러웠다. '나도 친구처럼 아파서 창백한 얼굴로 하얀 시트 위에 누워봤으면...' 그러면 나도 저렇게 하얀 얼굴이 될 수 있을 텐데...


코흘리개 시절 땡볕에서 무방비 상태로 놀아 피부가 검게 탔던 동네 언니들도 춘천으로 상급학교 진학을 하고 방학 때 집으로 돌아올 때면 하나같이 피부가 하얗게 변해 있었다. 이건 내가 도시로의 유학을 꿈꿨던 시발점이기도 했으니 웃기게도 나 또한 춘천으로 고등학교 진학을 했지만 내 피부색은 그다지 변화가 없었고 오히려 도시의 아이들과 섞어놨더니 촌스러움만 도드라져서 성격만 점점 소심해지고 말았다.


훗날 여상을 졸업하고 부모님이 계시던 부천으로 올라와 서울로 직장을 다니며 남들처럼 연애(?)도 하고 결혼도 해서 아이 낳았는데 이 아이는 '산소 같은 여자' 이영애 못지않은 뽀얗고 새하얀 피부를 가지고 태어났다. 어찌 이렇게 씨 커먼 몸뚱이에서 회사하고 투명한 피부를 가진 어여쁜 딸아이가 태어났는지 아리송하기만 한데 밖으러 데리고 다니면서 엄마 닮았다는 소리를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으니 이 아이는 내 딸이라기보다는 남편의 딸이라고 불러야 하지 않을까.


어쨌든 이렇게 해서 영숙이는 수돗물로도 못 고친 시꺼먼 피부 대신 꿀피부를 가진 딸아이를 만남으로서 어려서부터 꿈꿔왔던 간절한 소원을 이루게 되었다.

이만하면 성공한 삶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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