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않음을 하기
이 책을 처음 접한 건 몇 년 전 철학과 수업 중 ‘포스트모더니즘과 현대철학’이라는 과목을 수강하던 때였다. 지금은 기억도 나지 않는 어떤 난해한 철학적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 교수님이 예시로 들었던 책이 바로 <필경사 바틀비>였다. 수업은 따분했지만 책 내용은 매우 흥미진진하게 들렸기 때문에, 수업이 끝나고 바로 도서관에 달려가 책을 빌렸던 것 같다. 학기중에는 사실 수업이나 시험을 위해 필수로 읽어야 하는 책들만 해도 잔뜩이었기 때문에, 흥미 위주의 책은 거의 읽지를 못했었는데 <필경사 바틀비>는 매우 짧은 단편이라서 부담 없이 읽을 수가 있었다.
이후 나는 그 과목도 무사히 이수했고, 학교도 졸업했고, 직장에 들어오고 많은 시간이 지났지만, 왠지 모르게 이 짧은 단편이 주는 여운이라는 게 대단해서 잊을 만하면 한 번씩 ‘바틀비’가 생각나곤 했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책을 구입해서 다시 한 번 읽어 보게 되었다.
이 책의 주인공은 물론 ‘필경사 비틀비’이지만 책의 화자는 바틀비를 고용한 변호사로, 독자인 우리는 변호사가 서술하는 시각에서만 바틀비를 볼 수 있기 때문에 끝끝내 바틀비가 진짜로 무슨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바틀비는 어찌보면 답답하고 이해하기 힘든 인물인데, 그렇다고 해서 마냥 비난하기에는 또 안쓰럽고 신경이 쓰이는 이상한 캐릭터이다.
책의 화자인 변호사는 자신의 사무실에 이미 고용된 직원들이 있지만 추가 업무를 맡기기 위해 바틀비를 고용하게 된다. 점잖고 조용한 성격의 바틀비는, 처음 고용되고 며칠 동안은 자신의 본업인 필사에 매우 열심이었다.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변호사가 간단한 부탁(명령 혹은 요청)을 하는데 ‘하지 않겠다’고 대답한다.
이 하지 않겠다는 말이, 내가 산 책에서는 “하고 싶지 않습니다.”로 번역되어 있고 원문을 읽은 사람들은 이게 참 원문의 느낌을 살려 번역하기 어려운 문구 중 하나라고 하는데 그 원문은 ‘I would prefer not to.’이다. 즉 능력이 안 돼서 못하겠다는 것도 아니요, 잠시 다른 일을 하느라 당장 할 수 없다는 것도 아니고 그냥 하지 않겠다는 의미이다. ‘하지 않는 편이 낫겠다.’, ‘하지 않기를 택하겠다.’ 정도의 이 말을 고용주의 입장에서 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실제로 책의 화자인 변호사는 바틀비의 이러한 반응에 크게 당황하는데, 문제는 바틀비의 이러한 주장이 일회적인 것이 아니라 계속되었다는 것이다. 바틀비는 처음에는 필사라는 자신의 본업 외적인 것에 ‘I would prefer not to.’로 대응하기 시작했지만, 시간이 지나자 필사조차도 하지 않고 가만히 창밖을 응시하는 등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태가 되고 만다.
화자인 변호사는 그래도 상당히 배려심 있고 신사적인 인물로, 바틀비가 그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고 사무실을 차지하고 있음에도 모질게 쫓아내지 못하고 최대한 완곡한 말과 사례금으로 바틀비에게 떠나줄 것을 요청하지만, 바틀비는 철저히 아무것도 하지 않는 인물로서 사무실에 계속 머문다. 이에 변호사는 어쩔 수 없이 바틀비를 남겨둔 채 사무실을 이사하게 되고, 바틀비는 부랑자 수용소 같은 곳으로 보내지게 된다. 화자는 이러한 결말에 일말의 죄책감 같은 걸 느끼고 바틀비를 방문하지만, 바틀비는 아무것도 먹지 않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다가 죽음을 맞이한다.
도대체 이 소설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이었을까?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겠지만, 무언가를 ‘하지 않는다’는 것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늘상 무언가를 하는 것에 익숙해져 있다. 그것도 지나치게 열심히. 그러다가 한 번씩 번아웃이 오고 허무한 감정에 사로잡히기도 하는데, 우리는 무엇을 위해 그토록 열심히 무언가를 하는 걸까? 정녕 우리의 선택지 안에 ‘하지 않는 것’은 없는 걸까? 한순간이라도 바틀비처럼 무언가를 ‘하지 않음’을 할 수는 없는 걸까? 물론 열심히 사는 삶을 부정하고 싶은 마음도, 바틀비 같은 태도를 긍정하고 싶은 마음도 없다.
하지만 이따금씩 우리 삶에 ‘하지 않음’이라는 선택지도 있음을 상기시켜 보는 것은 어떨까. 어른이 되고, 회사에 다니고 점점 역할이 생기고 책임감이 커질수록 우리는 예스맨이 되어가는데, 그중 많은 것들은 주체적인 의지에 의한 것이라기보다 기계적이고 수동적인 행동들인 것 같기 때문이다. 정반대로 바틀비의 행동은 ‘하지 않는 행위’ 자체는 수동적인 것이지만, 그 행위의 동기는 능동적이라는 역설이 있다.
바틀비는 원래 화자의 변호사 사무실을 찾기 전, 배달 불능 우편물 취급소의 말단 직원이었으나 행정부가 바뀌면서 갑자기 해고되었다고 한다. 대개 배달 불능이라 하면 수취인이 사망하는 등의 이유가 대표적이었던 것 같고, 수취인을 잃은 우편물들은 대량으로 태워지게 된다. 즉 처음에는 누군가에게 도달할 희망을 가지고 만들어졌지만 결국엔 갈 곳을 잃고 소각되는 우편물들처럼, 무언가를 추구하며 열심히 살아가는 우리들도 결국엔 죽음에 이르게 되는 것 아닌가? 물론 이렇게 말하면 인생무상, 허무주의로 흐르기 쉽지만, 나는 이 책을 통해 허무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는 태도가 아닌, 허무한 만큼 좀 더 주체성을 갖고 살아가도 되지 않을까 하는 메시지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무엇을 하는 것과 하지 않는 것, 그 선택은 누군가의 명령에 따르는 복종으로서가 아니라, 나의 의지에서 비롯된 선택이어야 하는 것이다. 인생은 유한하고 우리 각자는 원래 주관과 자유의지가 있는 인간들이기 때문이다.
물론 하지 않음을 택한다고 해서, 하고싶지 않다고 해서 ‘하고싶지 않습니다.’라고 말을 할 수 있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이고 현실적으로는 아주 어려운 문제이기도 하다.
그러니 바틀비가 자꾸 여운을 주는 것도 이상할 게 없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