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화 고심의 시간들
공간을 다시 보고 새로운 그림을 그려나가는 것은 그야말로 즐거움이다. 그러나 즐거운 시간 뒤에는 고심의 시간이 찾아온다. 이상과 현실의 사이에서의 퍼즐게임을 하듯 '선택과 집중'이라는 키워드 아래 해야 할 것과 하고 싶은 것, 하고 싶지 않은 것과 하지 않을 것을 끊임없이 구분하는 과정이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내가 진짜 원하는 현장이 구체화되기 시작한다. 그 중심에서 '예산'이라는 가장 큰 난제도 실감하게 된다. 돈에 구애 없이 뭐든 할 수 있다면 좋기는 하겠지만 한정된 예산에서 꾸려가는 것도 재미 삼아본다. 물론 고통도 따르지만. 그렇게 고심의 시간들이 시작되었다.
새로 짓는 것보다 리모델링이 더 어렵다. 주어진 조건과 제약 속에서 끊임없이 생각에 생각을 더해야 한다. 또 뜯어내는 과정에서 발견되는 문제점과 뜻밖의 난관이 존재할 수밖에 없기에 그야말로 현장은 시트콤이고 그에 대응하는 재치 있는 아이디어는 필수다. <강정동>은 업자가 날림으로 지은 덕에 그 어떤 것도 개런티 할 수 없는, 안개가 자욱해 앞이 안 보이는 상황이라고나 할까. 띁어봐야 클리어하게 알 수 있는 상황이라 이런 경우엔 보완/마감하는 전 과정에서 더 많은 예산이 소요될 수 도 있기에 생각만으로도 마음이 조마조마해졌다.
<강정동>을 움직이며 나 자신에게 주문한 것은 가벼움이었다. 가볍게 하자, 무리하지 말자, 할 수 있는 만큼만, 너무 돈들이지 말자 그렇게 되뇌었었다. 그간 나에게 <강정동>은 너무나도 무거웠고 버거웠기 때문이다.
남들은 자산이라 여기며 부러워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전혀 그렇게 여겨지지 않았다. 지어진지 십 년이 되어가는 시점에서 그동안 제대로 관리도 하지 않았기에 부동산으로서 가치를 논하기엔 무리가 많았다. 그냥 손해보지 않는 선에서 처분하자 생각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리메이크업 액션 없이는 터무니없이 낮은 가격으로 매도 제안이 들어올 뿐이었다. 무거웠던 만큼 애증이 깊었고 그만큼 보상심리는 있는데 매물가치는 바닥을 치니 총체적 난국이었다. 그래서 생각을 바꿔먹었다. 고쳐보자. 그렇다고 의미 없이 건물 색깔 바꾸기는 하기 싫었다. 내 생각을 갈아 넣어 제대로 고쳐보자. 대신 알뜰하게 최소한으로.
<강정동>에 묻어있는 나의 상념을 모두 지웠다. 한껏 올라갔던 마음의 온도를 낮추고 공정단계에 따라 항목을 나눴다. 철거/창호/타일/방수페인트/마감 이렇게 크게 나누고 소액으로 그때그때 맞추어 진행해야 하는 미장/설비/전기 같은 것들은 따로 나눴다. 그리고 항목별로 대강의 견적을 받았다. 덜어낼 부분을 포스트잇으로 명확히 체크해 두고 철거팀부터 창호, 방수와 페인트, 타일까지 차례차례 현장을 다녀갔다. 그리고 대강의 견적, 일정과 작업 기간, 결제방법에 대한 사전협의를 진행했다.
통상적으로는 공사대금은 현금지급이 기본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인건비와 같이 현금 지급 항목과 카드 결제 가능 항목으로 지출을 구분해서 진행하려고 했다. 초기 착수금이 크지 않았지만 매달 들어오는 금액과 맞추어 대략 계산하니 작업 속도와 지급 시기를 조절하면 크게 무리 없이 공사를 진행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오산이었다. 월말은 너무 빨리다가 왔고 현장 지출과 카드 지출의 결제가 맞물려 생각도 못한 고난이 매달 찾아왔다.
가장 부담스러웠던 부분은 철거였다. 스타트를 하는 시점에서 1650만 원이 고스란히 현금 결제가 예고되어 D-day를 잡는데 뜸을 많이 들였다. 시작과 동시에 공정단계에 따라 비용 결제가 줄줄이 들어갈 것이 분명하기에 다음, 그다음 결제가 가능할 때 마음의 준비를 마치고 스타트를 해야 한다 생각했다.
공사현장에서는 '결제가 곧 힘이다'라고 할 정도로 결제가 제일 중요하다. 시공비 결제가 안되거나 미뤄지면 당장 일을 하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이번 <강정동> 공사 시작 일정을 잡으면서 가장 많이 했던 말이 ‘결제 실수는 하면 안 되니까’. 인건비 비중이 가장 높은 현장에서 낯 뜨거운 일이 발생하면 안 되니 말이다.
동시에 제일 고심했던 항목도 철거였다. 고치고 덜어내고 싶은 부분을 덜어내면 되지 무슨 걱정이야?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쉽게 생각하면 매우 곤란해진다. 철거는 마감과 커플이다. 자연스럽게 비용도 더블. 철거는 마감으로 연결된다. 마감은 결국 지출로 이어지기에 무조건 덜어내는 것이 능사는 아니다. 철거된 부분은 마감을 해야 하는 부분으로 이어지고 바로 비용 지출로 직결되기에 고민 없이 진행하다 보면 비용이 어마 무시하게 늘어난다. 철거 견적을 받을 때 사전에 대부분의 철거 범위와 항목에 따라 철저하게 면적 계산을 하고 진행하지만 철거 현장에서 상황을 보며 철거 요청을 하게 되는 부분이 발생한다. 이런 안개 자욱한 현장은 더욱더 그럴 거라 예상했다. 예상은 적중했다. 그러나 놀라지 않았다. 공사비용은 늘어나지 절대 줄어드는 법은 없음을 너무나도 잘 알기에.
알뜰함을 강조한 프로젝트지만 창호만큼은 아끼지 않았다. 건축에 관하여 늘 아낌없이 조언을 주는 L사장님마저도 그렇게까지 돈 들일 필요가 있냐 할 정도였다. 현장에서 아낄 부분과 아끼지 말아야 할 부분이 분명히 있다. 준공 난지 만 9년 만에 건드리는 리모델링 작업이다. 지금 손대면 앞으로 십 년 정도는 거뜬해야 하고 돈들이는 만큼 지금과 다르게 제대로 여야 했다. 창호는 한번 시공하면 바꾸기 힘든 아이템 중에 하나다. 비용도 비용이지만 교체를 하게 되면 시공 후 또 처음부터 미장/방수/페인트 마감까지 다시 해야 하기 때문이다.
창호에 각별히 신경을 쓰는 또 다른 이유는 지역상 환경적인 특성 때문이기도 하다. 제주는 섬이라 비바람이 몰아치는 특성이 있고 특히 남쪽으로 난 창은 대로와 맞닿아있어 방음도 중요하고 무엇보다 여름과 가을에 불어오는 비바람과 태풍에 안정적이어야 했다. 교체되는 창은 고민 없이 모두 이중창에 단열기능이 있는 로이 유리를 선택했다. 공사비 중 가장 큰 예산이 소요되지만 한번 시공하면 오랫동안 후회 없이 사용할 수 있도록, 또 건물 전체의 단열과 직결된 부분이기에 최대한 좋은 것으로 골랐다. 중앙 출입구 역시 가격대는 높았지만 단열이 가장 잘되는 최상급 방화도어로 고르고 골랐다.
돌아보니 결국은 금전과의 싸움이었다. 가볍게 하자며 시작한 마음은 온대 간데없이 어느새 완성도 높은 결과물을 내놓을 것처럼 돌변하고 있었다. 그렇게 고심의 시간을 건너가고 있었다.
제4화 가능하게 한 것들
제5화 고심의 시간들
제6화 시작은 철거로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