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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nnobanker Feb 10. 2024

(프롤로그) 이제야 좀 편해지나 했더니

이제야 인생이 좀 편해지나 했더니, 임신이었다. 

나는 하고 싶은 것이 참 많은 사람이다. 


여행하고 싶은 곳도 많고, 살아보고 싶은 도시도 여러 개다. 그러니 언어도 몇 가지 더 배워 보고 싶기도 하고. 독학으로 열심히 익힌 비루한 영어지만 해외에서 일해보고 싶기도 하다. 미술품이나 부동산 경매도 배워서 해 보고 싶고. 나이 들면 연주회도 열고 그림 그려서 전시회도 열어 보고 싶다. 시나 소설도 써 보고 싶고 나처럼 어렵게 크는 아이들을 위해 보육원에 봉사와 기부도 하고 싶다. 


나는 왜 이렇게 하고 싶은 일이 많은 사람이 되었을까?


어릴 때 우리 집이 많이 어렵고 한부모 가정이라 할머니 손에서 컸다. 그래서일까, 어릴 적 나는 책 속의 이야기들이 좋았다. 학교를 마치면 부리나케 어린이 도서관으로 달려가 책장을 모두 삼키기라도 할 듯이 읽어 나갔다. 소설책, 과학책, 백과사전까지. 책을 읽는 시간만큼은 마음의 어려움을 모두 잊을 수 있었다. 해리포터를 읽으며 주인공과 나를 동일시하기도 하고, 저 멀리 다른 나라의 전래동화를 읽으며 이국적인 느낌을 갈망했었다. 공상을 좋아했다. 언젠가 해외에 나갈 거고 돈 많이 벌거라고 큰소리치고, 영어가 이유없이 좋아서 팝송 가사와 미국 영화 대사를 외우고 다녔다. 


10대는 고군분투의 시기였다. 이 상황에서 벗어나려면 뭐든지 열심히 해야 할 것만 같았다. 친구도 너무 열심히 사귄 나머지 일진들 모임에 끼어 보기도 하고, 공부도 열심히 했다. 어린 마음에 진짜 해외도 나가고 돈 많이 벌려면 매일 가는 학교에서 뭐라도 잘 해야 할 것만 같았다. 중간에 결석이 많아지면서 수학은 진도를 놓쳐 버렸지만 좋아하는 과목들은 언제나 상위권이었다. 언젠가부터 나는 노는 애들이 선생님한테 잘 보이려고 친하게 지내는 애가 되어 있었다. 그 즈음 형편이 더 어려워져 피아노 학원을 못 다니게 되자 방과후에 음악실에 남아 연습을 하곤 했다. 재즈의 세계에 심취해서 빌 에반스의 곡들을 연주했다. 그러다 음악 선생님이랑 친해져서 월례조회 때 앞에 나가서 지휘도 하고, 수련회 때 공연도 하고. 그렇게 무언가에 꽂혀서 넘치는 에너지를 쏟으며 아둥바둥 했다. 수능을 보는 그 날까지 어려운 환경에 힘들었고, 그 돌파구는 공부와 음악이었다. 


20대는 나를 괴롭히며 노는 시기였다. 책 읽고 글쓰기를 좋아했던 나는 수능을 망쳤지만 수시 논술전형으로 혜화동에 있는 대학에 들어가게 되었고, 그 동안 억눌려 있던 즐거움을 무서운 기세로 찾아 나가기 시작했다. 입학이 확정되자 마자 재즈 밴드에 가입해서 연습실에서 살다시피 하며 연주도 하고 공연도 했다. 과외비로 예쁜 쓰레기 같은 옷과 구두도 사고, 술도 많이 먹고, 연애도 했다. 장학금을 받기 위해 학점은 유지해야 하고 밴드 활동도 하고 싶으니 나중에는 학교 옆 고시원에서 살기도 했다. 교환학생도 장학생으로 다녀오고, 장학생 인턴 자리도 꿰차며 하고 싶은 일을 다 해볼 기세로 또다시 바쁘게 살았다. 그리고선 돈을 빨리 벌기 위해 은행에 입사했고 야근하느라 돈쓸 겨를이 없어 그 돈으로 유럽 여행도 다녀왔다. 즐겁기 위해 바쁘고 고생해야 했다. 탈진할 때까지 일을 하고, 밖에 나돌아다니고, 집에 와서는 기절하곤 했다. 


20대의 끝자락에 남편을 만나 30대가 되어서야 결혼을 하게 되었다. 신혼은 정말 달달한 꿀 같았다. 결혼을 하고서 나는 그동안 에너지를 과하게 쓰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집순이가 되었다. 미라클 모닝과 새벽운동으로 몸과 마음이 튼튼해지는, 행복한 나날들이었다. 맞지 않는 옷 같았던 고된 은행을 박차고 나와 두 번의 이직을 거쳐 드디어 하고 싶었던 일도 하게 되었다. 내가 하고 싶었던 서비스기획을, 일하고 싶었던 대형 증권사에서, 스타트업처럼 독립된 오피스에서 맥북으로 일하고, 영어로 소통도 해보고 해외 출장도 다녀오고. 이제서야 인생이 좀 편해지나 했다. 


출장을 다녀오고 이주 정도 지났을까? 생리 예정일이 지났는데 소식이 없다. 항상 '혹시나' 하는 마음에 사 두었던 임신 테스트기를 습관처럼 꺼내 들었다. 


두줄이다. 


순간 변기 위에서 얼음처럼 굳어버린 나. 마음 속에서 웃음과 울음이 교차한다. 이직한지 두 달이 채 안된 시점이었다. 남편을 너무 사랑해서 아기를 꼭 낳고 싶었는데, 일은 절대 그만두기 싫고, 애기 봐줄 친정엄마는 없고, 할머니는 돌아가신지 오래였다. 아기천사가 찾아와 기쁘고 설렌 마음도 잠시, 그나마 시댁 근처에 살아서 괜찮을까? 하는 걱정스러운 마음이 앞선다. 테스트기를 들고 침대에 누워 게임을 하던 남편에게 안기며 입은 웃는데 울먹거렸다. 우리는 이 모든 상황을 알기에, 아무 말 없이 눈을 감고 있었다. 


이제야 인생이 좀 편해지나 했더니, 임신이었다. 


그 날의 일기장에 적혀있던 말들. 


아가야, 엄마에게 찾아와 줘서 고마워. 

엄마는 네가 찾아오길 얼마나 애타게 기다렸는지 몰라. 

방에서 쿨쿨 자고 있는 너희 아빠가 얼마나 재미있고, 멋진 사람인지 아니? 

엄마는 왠지 네가 엄청 튼튼하게 잘 자라서 건강하게 만날 수 있을 것 같아. 

지금은 너무 얼떨떨하고 어른의 걱정이 앞서지만, 널 만날 그 날까지 힘내 볼게. 


그리고서 8개월을 아기와 함께 출근했다. 입덧도 먹덧이라 거의 없다시피 했고, 아기는 정말로 무탈하고 튼튼했으며, 감사하게도 신분당선 승객 분들은 항상 같은 칸의 임산부석에 자리를 양보해 주셨다. 내 인생에 이렇게 일을 열심히 한 적이 없을 만큼 최선을 다하고, 출산휴가에 들어가는 날 인수인계를 마치고, 동료들과 씩씩하게 작별인사를 하고, 무거운 몸을 뒤뚱거리며 택시를 탔다. 


그랬는데, 씩씩했는데, 집에 와서 짐을 풀며 나도 모르게 눈물이 또르르 떨어진다. 


나, 잘할 수 있겠지? 눈을 질끈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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