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를 12년이나 다녔는데 왜 아기 키우는 건 가르쳐주지 않았을까?
출산 후, 내 인생은 완전히 새로 시작됐다.
나밖에 모르던 여자가 내가 아닌 존재를 나보다 더 생각하는 사람이 됐다. 온 우주가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다가, 이제는 아기 위주로 돌아가면서 내가 위성이 된 것만 같은 기분.
만삭이 될 때까지도 나는 ‘혹시 모를 타의에 의한 경력단절에 대비하기 위해’ 이력서와 포트폴리오를 정리하는 데에 마지막 시간을 쓰고, 휴직 전 마지막 연차때 회사 메신저가 차단되자 담당자에게 연락해 아직 인수인계할 것이 남았으니 다시 복구해달라며 오바를 했다. 내가 없어도 나의 후임은 일을 너무 너무 잘 하고 있는데도 그냥 내 존재가 잊혀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그랬다. 심지어 아기가 태어나는 것에 대한 설레임과 기대보다도 내가 사회적으로 필요없는 존재가 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더 컸었다.
다른 임산부들은 조리원 산전 마사지도 다녀오고, 모유수유와 예비부모 교육도 듣는데 나는 그런 것들이 왠지 시시해 보였다. 출산휴가로 쉬게 된 마지막 두달 간 나는 아기를 낳고 나면 할 수 없을 것 같은 경매 공부나 독서 등에 매달렸다. 나중에 조리원에서 젖몸살을 겪고 얼떨결에 혼합수유(모유와 분유를 같이 먹이는 것)를 하면서 후회가 컸다. 미리 공부했더라면 완모(모유만 먹이는 것)가 가능했을 텐데… 조리원에 가지 않고 집에서 출장마사지를 받으며 아기를 내 스타일대로 온전히 케어했을 텐데… 하며 말이다.
병원에서 아기 사진을 보내 드리자 시댁 어른들은 아기가 나를 닮았다고 계속 말씀하셨다. 아마 아기는 우리를 반반 닮았나 보다. 내가 보면 남편이 보이고, 남편이 보면 내가 보이는, 기적같은 아기의 존재… 머리카락도 눈코입 귀도 오밀조밀한 아기가 어떻게 내 뱃속에 들어 있었는지 신기하기만 했다. 남편이 회의를 하느라 잠시 자리를 비워도 아기를 보고 있으면 허전함이 덜했다. 아기를 보면 그 얼굴 속에 사랑하는 남편이 들어 있기 때문이었다. 시댁 어른들은 카톡으로 매일 축복을 보내 주셨다. 아기는 한 마디로 사랑 그 자체였다. 나는 갑자기 발동된 모성애 때문에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아기만 바라보면 ‘어떻게 내 안에서 이런 아기가 나왔지?’ ‘너무 예쁘고 너무 완벽하다’ ‘남편이 생각난다’ 등등의 생각을 하며 울컥 눈물이 나왔다.
너무너무 끔찍했던 회음부 열상도 진통제 주사를 여러 번 맞은 끝에 좋아져가고, 어느새 퇴원하는 날이 됐다. 몸은 뭐에 두드려 맞은 듯 여기저기가 다 아프고 걸을 때마다 발을 헛디디는 기분이 들어서, 혹시나 아기를 떨어뜨릴까봐 잔뜩 긴장한 채로, 아기를 카시트에 태우고 몸은 반쯤 아기를 예의주시한 채로 조마조마해 하며 산후조리원에 도착했다. 나중에야 알았다. 신생아실에서 아기 기저귀도 갈아주시고 분유도 먹여 주셔서 아기가 조리원 가는 길에 울지 않았다는 것을..
조리원은 빡세다더니 정말이었다. 마치 신입사원 연수때 처럼 모든 일정이 빡빡하게 진행되었다. 첫 입소 날은 회음부가 아프기도 하고 잠들 때에도 끙끙거리며 잠들었다. 임신 막달에도 새벽에 눈이 떠지더니, 조리원에 와서도 마찬가지로 새벽 4시만 되면 눈이 번쩍 떠졌다. 눈을 뜨자 마자 유산균과 철분제를 챙겨먹고, 다시 잠들었다 일어나면 아침이 배달된다. 아침을 먹고 나면 모자동실 시간이고 아기는 거의 잠만 자다 돌아갔다. 아기가 돌아가면 좌욕을 한번 하고 점심시간은 금방 왔다. 점심을 먹고 나니 마사지실에서 콜이 왔고 마사지를 받고 나면 또 졸음이 쏟아졌다. 간식을 먹고, 자고, 좌욕하고, 다시 일어나서 저녁을 먹고 모자동실을 하고 남편과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다가 또 잠에 들었다. 첫 이틀 정도는 아무 생각 없이 또 몸이 회복하는 데에 집중했다. 산후마사지를 받을 때마다 어느 날은 갑자기 허리와 골반이 아프고, 어느 날은 자궁수축으로 배가 아프고, 가슴은 땡땡 부어 엎드리기가 힘들고 누웠다 일어나는 게 매일 매일 힘들다는 게 너무 놀라웠다. 도대체 언제 괜찮아질까 하는 생각은 산부인과 검진을 가서 회음부 실밥을 풀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다가 젖몸살이 왔다. 얘기도 많이 들어서 익히 알고 있고, 막달에 재밌게 봤던 ‘산후조리원’ 이라는 드라마에서도 엄청나게 아프다고 묘사해서 예상하고 있었는데 예방하는 방법이 있다는 건 몰랐다. 한밤중에 원장님께 전화해서 울며불며 살려달라고 애원해서 당직 중인 신생아실 간호사 선생님께 마사지를 받고 타이레놀을 먹고서야 간신히 잠에 들 수 있었다. 이후 그 간호사 선생님은 나의 전담마크가 되어 포기할까 말까 하루에도 몇 번씩 고민하던 모유수유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도록 이끌어 주셨다. 알고 보니 그날 나 때문에 퇴근도 못 하셨다고 하는데 나는 그런 줄도 모르고 다음날 그 분이 어느 분인지도 못 알아봤다. 그 때까지도 나는 내가 아픈 것에 대해 서럽고 더 이상 아프기 싫다며 울고불고 할줄만 알았던 것이다. 정말 정말 엄마가 되기엔 한참 모자라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분유 먹을 때와는 분명히 다른, 모유를 먹을 때 아기의 사랑스러운 모습, 하루하루가 다르게 아기가 자라면서 이제는 장난도 치며 나에게 뭔가를 말하는 것만 같은 교감을 느끼며 나는 그제서야 모유수유에 대해 딥다이브 하기 시작했다. 대한 모유수유의사회 홈페이지에 있는 모든 글을 읽으며 모유수유가 산모와 아기에게 모두 얼마나 좋은지와, 모유수유를 할거였으면 모유수유를 권장하는 병원과 조리원을 가거나 젖이 돌고부터 바로 24시간 모자동실을 하는게 좋다는 것 등등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이미 우리 아기는 젖병에 분유를 먹는 것에 익숙해져 있었고, 아직 입도 작고 빠는 힘이 부족해 쉽사리 먹어주지 않았다. 그 때부터 수유콜에 집착하기 시작했다. 새벽에 수유하는 게 모유량을 늘리는 데 좋다고 해 새벽에도 한 번씩 가서 모유수유를 했다. 조리원은 쉬러 가는 거라는 말도 일부는 무시하고 내 페이스대로 먹였다. 다행이 내가 간 조리원에는 모든 간호사 선생님들이 모유수유 코칭을 해주셨고, 무엇보다 아기가 분유와 모유를 모두 잘 먹어줘서, 혼합수유지만 모유량을 3배 이상 늘리는 데 성공하고 퇴소할 수 있었다.
조리원에 처음 들어올 때는 몸이 힘들어서 아무 생각이 없었는데, 하루하루 몸이 회복되면서 아기도 점점 신생아 티를 벗고 살이 오르며 예뻐져 아기가 더욱더 보고싶었다. 처음에는 남편이 그리웠는데, 새벽에 눈뜨면 좌욕하고 밥먹고 수유콜 받고 마사지 가고 자고 간식먹고를 반복하는 바쁜 조리원 일정을 따라가다 보니 나중엔 남편 생각도 별로 안났다. 아기가 눈에 아른아른 거리면 신생아실로 달려가 간호사 선생님들께 목인사를 드리고 아기를 원없이 보고 왔다. 조리원의 가장 큰 아이러니는 내 몸을 회복하는 게 우선이라 들어간 건데, 그러느라 아기와 떨어져 있어야 하는 게 너무 힘들다는 것이었다.
돌아보면 친정과 교류가 없는 내가 아기 돌보는 것부터 모유수유까지 제대로 배우고 나올 수 있었던 것은 참 다행이다. 젖몸살이 났을 때 풀어주신 간호사 선생님은 퇴소할 때까지 아기와 나를 정말 진심으로 케어해 주셨고 많은 팁들을 주셨다. 모자동실 때 아기가 울면 어쩔 줄을 몰라 나는 분유부터 들이대고 아기는 자지러졌는데 그럴 때마다 간호사 선생님들은 달려오셔서 똥기저귀 가는 법, 아기를 달래는 순서 등을 최대한 알려주고 가셨다. 간호사 1명이 신생아 3명을 돌보는 시스템이라 정말 바쁘셨을 텐데도 최선을 다해서 많은 도움을 주셨다. 물론 내 돈 내고 쉬러 간 거고 빨래 청소 해주시는 분, 식사해주시는 분들도 감사하지만 나는 열달 동안 힘들게 품은 아기를 걱정 없게끔 나보다 훨씬 더 노련함으로 잘 돌봐주신 신생아실 선생님들께 특히 더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아기가 태어나자 마자 병원에서도 신생아실에 있고, 조리원에서도 3주가 넘는 기간 동안 신생아실에서 단체생활을 하며 엄마 품이 뭔지도 모를 거라 생각하니 퇴소 날이 다가올수록 마음이 불편했다. 더구나 간호사 선생님이 우리 아기는 이제 자다 깨면 가끔 눈을 말똥말똥 뜨고 놀기도 하며, 스킨십이나 말 걸어주는 걸 굉장히 좋아한다고 말씀해 주셨다. 생후 한 달은 엄마랑 껌딱지처럼 붙어 있어야 아기가 안정감을 느낀다는 것도 그때서야 알아 버렸다. 아기는 아무리 시끄러워도, 엄마가 아닌 다른 사람이 안아주어도 너무 잘 먹고 잘 자고 잘 컸다. 그래서일까, 나는 아기한테 더욱더 미안해지고 점점 더 아기가 보고 싶어졌다. 조리원에 낸 돈이 아깝기도 하고 집에 가면 잠도 제대로 못잘 걸 알기에 하루종일 데리고 있지는 못하고, 수유할 때 데리고 와서 다른 산모들보다 조금 더 길게 보다가 다음 수유 후 다시 데려다주곤 했다. 신생아실에선 여러 아기를 돌보느라 먹고 나서 트림을 안 시켜주고 눕혀놓는다는 걸 알게 되면서 아기를 방에 데려오면 최대한 정성껏 트림을 시켜줬다. 집에 가면 힘들 걸 알면서도 집에 가는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며 조리원 마사지기와 편함을 최대한 누렸다.
조리원에서는 시간이 남을 때마다 지인들에게 인사를 하기도 하고, 아기에게 필요한 물품들을 주문하고, 육아나 모유수유 관련한 영상과 글들을 봤다. 커피챗을 하기도 했다. 한창 모유수유로 인해 가슴이 아파서 극약처방으로 가슴을 모두 오픈하고 있으라는 지시를 받았는데, 정해진 시간에 통화를 해야 하는 커피챗을 한다고 가슴을 오픈하고 30분 정도 통화를 하고 나니 오한이 들었다. 몸이 정말 허약해졌구나 느끼면서, 이런 내 모습을 상대방이 전혀 모른다는 사실에 피식 웃음이 났다. 앞으로 그냥 요청을 받지 말까 하면서도, 잠깐의 시간 동안 내가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고 살아있음을 느꼈기에 행복했고 멈출 수 없었다. 그 외에 남는 시간에는 출산 직후 놓쳤던 뉴스들과 정보들, 지인들의 링크드인 소식 등을 따라잡으며 짧은 시간에 참 많은 것이 변했다고 느꼈다. ‘아기를 키우고 복직할 때쯤에는 많은 것이 바뀌어 있겠지’ 하고 생각했다. 그리고 퇴소를 하면 아기 방은 이렇게 세팅하고, 모유수유는 이렇게 해야지, 등등 머릿속의 계획들을 하나씩 적어 두었다.
둘째 생각이 있느냐고 묻는다면, 다시는 이 고통을 반복할 자신이 없다. 하지만 다시 임신했을 때로 돌아간다면 어떻게 할래? 라고 묻는다면, 아마 출산과 육아에 대한 공부를 정말 열심히 할 것 같다. 학교를 12년이나 다녔는데 왜 아기 키우는 건 가르쳐주지 않았을까? 성교육을 할 때 콘돔이 어쩌구 하는 것보다는 새생명을 캐리한다는 게 얼마나 소중하고 무거운 일인지 임신출산육아에 대해 상세히 알려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까지나 낳기 전엔 모르는 여자들만의 영역이 되어서는 남편의 육아참여도가 올라가기가 당연히 어렵지 않을까.
매일 집안일과 아기 돌보기 그리고 내가 먹고 자는 것의 시간 싸움에서 줄다리기를 하며 육아서적까지 읽기 위해선 결국 잠을 줄여야 하는데, 그러면 육아의 질이 떨어지게 된다. 아기 볼 힘이 없어 아기한테 '제발 자라 자라' 하게 되는 거다. 지금 초스피드로 따라잡으려고 노력하고는 있지만, 애초에 요리도 잘하고 운전도 잘하고 남편 내조도 잘하고 살림도 잘하고 아기 발달과정에 맞게 잘 놀아주는 퍼펙트한 엄마들과는 출발선 자체가 다르니.. 그냥 나만의 페이스 대로 최선을 다하련다. 쿠팡이 새벽배송을 해주는 시대에 아기 물품과 내일 먹을 식량 주문하는 데에도 허덕이는 내 자신을 토닥이며 오늘도 빨리 잠들기 위해 노력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