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나를 힘들게 하는 건지, 남이 나를 힘들게 하는 건지 헷갈릴 때 -
이직을 하고 2개월이 훌쩍 갔다. 입사하자 마자 코로나 확산세가 가속화 되면서 비대면 회의에 Slack, Notion 등을 읽으며 2주 정도를 보냈고 드디어 얼굴을 보며 식사하고 함께 일할 수 있게 되었을 때 얼마나 기뻤던지!
'2주나' 팀원 분들과 인사할 타이밍을 놓쳐서일까. 아무래도 입사 2주 후 첫 인사는 많이 어색했다. 나름대로 이미 성장한 스타트업에 합류하면서 소프트 랜딩을 기대했건만, 이직도 처음인 데다 스타트업도 처음이고, PO 도 처음이라 너무 많은 변화를 한꺼번에 감당하기엔 벅찼던 걸까. 어느새 코로나로 인해 2주 정도 짧아진 온보딩 기간에 기대고 싶은 마음이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다.
나는 '탓'할 것이 참 많은 사람이다. 학생 때부터 은행에서 일할 때까지 줄곧 환경 탓을 습관처럼 해왔다. 언젠가부터 내가 '탓'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게 되어 버렸다. 아니, 어느 순간부터 주변에서 내가 '탓'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지 않기 시작했다. 사회 초년생 때 '탓'하기를 포기할 기회를 잃어버린 것이다. 분명히 나를 아끼는 많은 선배 분들이 조언해 주셨는데 그 '탓'하고 싶은 마음을 끝까지 놓지 못했다.
솔직히 너무 힘들었다. 그 때 그 마음을 내려 놓기에는 내가 당장에 감당해야 할 개인사가 너무 컸다. 그래서 지금의 나는, 과거의 나를 완전히 이해하고 용서하기로 한다. 다만 글로 정리하고 싶은 마음이 든 건, 지금 당장 감당하기 어려운 현실로 인해 '탓' 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이 글을 읽고 조금이라도 빨리 상황을 객관적으로 인지할 수 있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자세한 이야기는 책 10권으로도 모자란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고 이제는 '탓'을 80% 정도 줄이기에 성공한, 아직도 매일 매일 무언가를 '탓' 하는 자신에 놀라며 고쳐나가고 있는 사람이 '탓'의 세 가지 기준에 대해 말해 보려고 한다.
'안다'고 말할 수 있는 기준
'노력했다'고 말할 수 있는 기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탓' 하면 안 되는 영역
안다고 말하려면, 정말 끝까지 알아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가령 내가 은행 지점에서 근무할 때에는 '대출 금리'에 대해서 적금 가입, 신용카드 개설 등의 우대 금리를 5가지 충족하면 1%를 우대해주는 것이라고 알고 있었다. 본사에 가니 '대출 금리' 는 예대마진을 확보할 수 있도록 최대한 높아야 하지만 은행은 준 공공기관이니 금융 소비자의 권익을 위해 너무 많이 올려서는 안 되는 것이라는 점을 알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CFA 공부를 하면서는 이자 수익이 은행 회계 계정의 어느 부분에 들어가는지를 배웠다. 이렇게 '대출 금리가 뭐야?' 라고 물었을 때에 대답의 수준은 천차만별이다.
회사에서 일을 할 때, 대학교에서 학문을 탐구할 때, 나만의 비즈니스를 할 때.. 모든 분야에서 '안다'고 말할 수 있는 기준은 사람마다 아주 큰 차이가 있다. 그렇다면 업무 담당자로써 "제대로 일하려면", 등록금을 "뽕 뽑으려면", 비즈니스 "경쟁자를 제치려면" 도대체 어느 정도 수준으로 알아야 하는 걸까?
정답이 이거다, 라고 하기 어렵긴 하다. 하지만 질문에 답이 있다고 생각한다. 나의 경험상으로 "같이 일하는 동료들 이상으로" 알면 리더의 자리에 있을 가능성이 높고, "같이 공부하는 학생들 이상으로" 알면 A+를 받을 가능성이 높고, "경쟁사 대표보다 많이 알면" 투자를 받거나 시장 점유율이 올라갈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그걸로 충분할까? 여기서 부터는 한정된 에너지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나에게 평생 동안 주어진 에너지가 100 이라고 해 보자. 그러면 나는 죽을 때까지 그 100의 에너지를 잘 배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젊을 때 90을 다 써 버리면, 노후에 끙끙 앓다가 갈 수도 있다는 것이다. 두말 할 것도 없이 "회사 대표만큼 아는 신입사원", "업계에서 가장 많이 아는 대표", "교수님만큼 잘 아는 학생"이면 그 직급이나 역할에서 요구하는 수준을 훨씬 뛰어넘어 "인물"에 등극될 것이다.
다시 말하면, 평범한 누구라도 평균 이상으로만 노력을 한다면 '최고'는 아니더라도 '작은 탁월함' 정도는 성취할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가 된다. 이런 이야기가 자기계발서에 분명 굉장히 많을 것 같다. 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말인 -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다 - 에 따라 정말 나의 개인적인 경험에 충실해서, 조금 더 구체적으로 어떻게 평범한 사람이 평균 이상으로 노력할 수 있는지 풀어서 설명해 보고 싶었다.
나는 평범한 사람도 어떤 것에 대해 (1) 겉에 보이는 현상 요약 (2) 매커니즘 (3) 영향 의 관점에서 모두 생각해 보고 남에게 설명할 수 있으면, '안다'고 할 수 있다 라는 결론을 내렸다.
(1) 겉에 보이는 현상 요약
⏺ 은행 창구에 대기 시간이 1달 전 대비해서 10분 이상 늘었다.
(2) 매커니즘
⏺ 이번 달에 지점 수를 10% 이상 줄였다.
⏺ 대면 거래 고객이 5% 이상 감소했다.
⏺ 거래 고객의 대부분은 고령층 및 금융 소외 계층으로, 고객 1명의 평균 업무 처리 시간이 20% 이상 증가했다.
(3) 영향
⏺ 창구 직원의 정신적 피로도가 증가하고 악성 민원이 10% 이상 증가했다.
⏺ 은행에 수익을 가져다 주는 거래가 5% 이상 줄어들었다.
8년 간 은행에서 일했던 사람이라 아무래도 예시가 너무 은행원 스럽긴 하다. 좀 더 세밀하게는 모든 것을 수치로 바라봐야 하고, 100가지의 사실이 있더라도 그 중에 중요도 순으로 2~3개를 추려낼 수 있어야 하긴 하다. 하지만 큰 틀에서 이 정도를 파악했다면 '은행 창구의 대기시간 증가'의 '원인, 영향' 을 파악한 것이니 이제 '단기적인 대처방안'이나 '근본적인 개선 방안', '경쟁사 현황' 등은 자연스럽게 생각할 수 있게 된다. 이런 틀을 가지고 체계적으로 정리를 한 후, 상사에게 가서 '저 이러이러하게 조사를 했는데, A안으로 할까요 B안으로 할까요?' 라고 한다면 싫어할 사람이 있을까?
최근에 내가 조금 더 현상을 빠르게 파악할 수 있게 된 것이 어떤 노력에 의해서 였을까를 역으로 생각해서 정리해 봤다. 어떤 회사에서 일을 하든, 어떤 집안일을 처리하든, 어떤 인간관계를 분석하든 이 틀을 적용해볼 수 있을 것 같아서 '이 정도면 안다고 해도 되겠지?' 하고 고민하시는 분들을 위해 조심스레 제안해 본다.
'안다고 말하고 싶은 마음' 에 비해 '아는 것'이 부족하면, 그건 '모르는 것'이 되어 버린다.
위의 다방면으로 파악해 봐야 비로소 '안다'고 할 수 있는 것에 더해서, '노력했다' 고 말할 수 있는 기준에 대해서도 고민해 봤다. 이건 내가 할 수 있는 노력이 10가지 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20가지 였더라, 하는 이야기다.
엑셀로 하루면 뽑을 수 있는 업무를 받아 본 적이 있다. 그 간단한 숙제를 2달을 끙끙대며 밤을 새 보고, 엑셀 책을 뒤적여 봐도 해결이 되지 않았다. 많이 혼나고 많이 울었다. 그땐 정말 왜 그랬을까?
결국에 그 일은, 일을 주었던 당사자가 처리하고 고민했던 90%의 부분을 내가 몰라서 10%를 채울 수 없었던 일로 판명이 났다. 당시에는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탓'을 하고 끝냈던 게 못내 아쉽다. 다시 그 때로 시간여행을 할 수 있다면... 일을 준 사람에게 '이건 1시간 동안 고민해 봐도 답이 없어요' 라고 1시간 만에 물어봤을 것 같다. 그 때 그러지 못했던 건, 알량한 나의 자존심과 억측 때문이었다.
'사수가 나에게 이 일을 준 건 나를 괴롭히려고 그런 걸 거야. 그게 아니고서야 왜 이렇게 어려운 일을 주겠어?' 하는 억측. 그리고 '사수한테 물어보면 내가 엑셀 못하는 게 탄로나잖아! 나는 엑셀을 못하는 사람이 아닌데! 물어보기 너무 창피해.' 하는 알량한 자존심. 구글도 100번 넘게 검색해 보고, 심지어 다른 회사에 지인까지 동원해서 VBA까지 알아봤는데 너무 많은 개인정보를 포함하고 있어서 보여줄 수가 없었다.
둘 다 쓸데 없는 거였다. 사수가 날 괴롭히려고 그 일을 준 게 아니라 사수가 맡은 중요한 업무가 너무 너무 많아서 나에게 가장 쉽고 손이 많이 가는 일을 준 거였다. 사수가 엑셀 함수를 모두 시도해 보고 안 되는 부분을 2번 3번 확인한 후 준 일이었던 것이다. 내가 물어보면 사수는 기쁘게 알려줄 마음이 있었다. 혹은, 사수가 '이것도 못해?' 라고 모질게 말했다고 해도 정말 그게 쉬운 일이라는 힌트일 수도 있었다. '저한테는 너무 어려워서 어떻게 하면 잘할 수 있는지 알려주세요.' 라고 말해볼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래도 알려주지 않으면, 사수의 사수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도 있었다. 외부의 지인에게 부탁할 일이 아니라 내부의 모든 리소스를 총동원 해서 방법을 찾으면 되는 거였다. 그래도 해결이 안 되면, 그 때는 정말 내 노력 밖의 일인 거다.
'내가 원하는 나'와 '내가 하는 노력' 이 불일치하면, 내가 원하는 나의 모습과 실제 나의 괴리로 인해 실망을 한다. 내 자신을 돌아보기는 쉽지 않아 외부 '탓'을 하게 된다.
요즘 SNS에 올린 글들을 출간하면 불티나게 팔린다. 그런 산문집을 읽어 보면 '자존감'이라는 단어가 참 많이 등장한다. 위에서 환경 '탓'과 남 '탓'을 하기 전에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 했는데 '내탓'을 하면 안 되는 영역이 분명히 존재하는 것 같다.
그건 바로 내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내 자신을 내가 잘 알아주는 것이다. '탓' 이라는 것도 결국은 '나'의 상황과 변명을 '남'이 들어 주기를 바랄 때 하는 것 같다. 내가 나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게 또는 나의 에너지 한도 내에서 정말 최선을 다했다면, 또는 내가 최선을 다할 수 없는 성격임을 인정한다면, 또는 내가 만족할 수 있는 정도로는 했다면 '내탓'을 하지 않아도 된다.
'내가 원하는 것' 이 있기에 '탓'도 있는 것이다. '내가 원하는 만큼'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해서 습관적으로 외부 요인을 탓하는 것은 정말 버려야 한다. 하지만 '원하는 게 있는 나' 자신이 그 자체로 훌륭하다. 그런 내 자신을 내가 몰라주니까 자꾸 남에게 알아달라고 하소연 하는 것 같다.
이런 생각을 기특하게 혼자 해냈으면 참 좋았을 텐데 자동으로 되진 않아서, 내가 원하는 것과 그걸 이루기 위한 내 행동이 괴리를 보여 힘들 때는 심리 상담을 정말 많이 받았다. 개인적으로 신앙이 있어 기도도 많이 했다. 어렸을 땐 잔소리로 들렸던 말들이 상담을 진행하면서 좀 더 객관적으로 다가왔고 사수에게, 동료에게, 친구에게 인정받고 싶은 내 마음이 보였다. 그 마음을 상담사 언니가 (상담료를 받고) 잘 들어 주셔서 해소가 되었다. 그리고 내 스스로 '괜찮아. 내가 행복하기 위해서는 욕심을 줄이거나 행동을 하자.' 라고 다독여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 그래서 난 기승전상담을 주변에 많이 권하는 편이다. 친구에게 가족에게 하소연 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상담을 받자. 그리고 내 자신을 다독여주자. 욕심을 줄이고, 용기를 내고. 행동을 하고. 노력을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