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경험을 무시하면 일어나는 일

여름에 태어나 죽는 벌레에게 겨울의 얼음을 이야기한들 소용없는 일이다.

by Innobanker

나아가야 하는 방향과 하고 싶은 일에 집중하다 보면 내가 어떤 길을 걸어왔는지 잊을 때가 있다. 생각해 보면 주변에서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일이다. 평생을 상사가 시키는 일만 하며 살다가 퇴직금으로 난생 처음 해보는 사업이 대박나길 바라는 사람이 너무 많고, 예적금만 가입하던 사람이 갑자기 큰돈을 주식에 넣으면서 한방에 높은 수익이 나기를 기대한다. 사람들은 대부분 지금보다 나은 삶을 원하지만 그 방법에 있어서 스스로가 어떤 경험을 해 왔는지 고려해서 다음 스텝을 밟는 게 훨씬 더 성공률을 높인다는 당연한 사실을 간과하고 살아간다. 나에 대한 성찰이 부족한 상태에서 대담하게 이직한 결과 나 또한 너무 큰 갭에 많은 고통을 겪었다.


절대 그 경험에 쓴 시간이 아깝지도 않고 가고 싶은 곳과 운명이 데려가는 곳이 항상 일치 하지만은 않기 때문에 실망도 크지 않다. 다만 여행에서 시간 여유가 있으면 구비구비 샛길로 가면서 경치도 감상하고 뜻밖의 에피소드도 겪으며 즐거울 텐데, 서른세 살에 아이 한 명당 3년의 육아휴직을 버려 버리고 아기 생각은 당분간 접어 버리겠다는 각오로 이직 하자 마자 구비구비 샛길로 걸어가는 기분에 하루하루 목이 타들어 갔던 건 사실이다.


"금융"에서 "금융"이 아니라 선순위가 거의 없는 담보대출만 취급하는 - 아직은 오프라인 영업에 더 익숙한 회사에서 이미 거절 당했거나 규제로 막힌 사람들을 위한 후순위 대출을 소프트웨어 기술을 통해 좋은 조건에 제시하는 곳으로 온 거다. 당장 내일 결과물이 나오지 않더라도 망하지 않는 회사에서 나의 하루하루가 매출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회사로 옮긴 거고 말이다. "기획"에서 "기획" 이 아니라 오퍼레이션과 직원 응대가 50%, 사업기획 및 업무개선이 40%, 외부 제휴가 10% 인 업무를 하다가 커뮤니케이션과 문제정의-해결방안 도출이 99%인 "프로덕트 오너" 를 하겠다고 온 것이었다. 입사 동기가 몇백 명인 - 인상과 인성 보고 뽑는 - 순혈주의 영업 조직에서 컨설팅 출신과 각종 산업에서 다양한 경력을 쌓은 정예부대로 온 것이었고, 연간 단위로 계획을 짜고 과장님-부부장님-팀장님-부장님을 거쳐 어떨 때는 부행장님 행장님까지 결재를 받고 실행을 하던 곳에서 말 한마디가 결재요 30분 단위로 숨가쁘게 움직이는 스타트업으로 온 게 정확한 상황 인식이었다.


이건 정말 빼도박도 못하고 명백하게, 분석이 부족했다.

난 뭘 잘하는 사람이지? 질문이 틀렸다.


"난 뭘 해봤던 사람이지?"


를 뒤늦게 정리하고, 다시 분석하고 재구성해서 사람들에게 설명하는 시간이 있었다. 영원 같던 그 시간들을 거쳐서 얻은 결론이 이직할 때 나에 대해 생각했던 내용과 180도 달랐던 건 말해 뭐해.


나는 은행에서 오프라인으로 다양한 고객을 만나고, 영업 목표를 탁월하게 달성했으며, 눈에 보이지 않는 금융 상품의 컨셉을 쉽게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다. 숫자가 팔할인 금융 전산업무를 직접 처리해 보았으며, 비효율적 이거나 단순 반복적인 업무를 개선할 아이디어를 끊임 없이 제시하고 내 손으로 개발 계획까지 그려서 실행하고 비용절감과 수많은 성과를 만들어 냈다. 뿐만 아니라 각종 금융 자격증을 취득해서 기관에서 필요로 하는 라이센스도 10개 넘게 가지고 있고, 아파트 한 채의 분양권 대출을 거의 혼자서 담당하며 거친 조합원들, 건설사, 입주자와 대출상담사 그리고 일반 창구업무까지 주말 불사하고 감당해 낸 센 사람이다. 그 빡센 경험을 통해 부동산에 대한 깊은 관심이 생겼고 시장 트렌드를 공부해서 부동산 앱서비스를 기획해 사내벤처에서 내 생각을 정리하고, 많은 사람들 앞에서 발표하고, 서비스의 사업성을 인정받아 입상도 했었다. 뿐만 아니라.. 뿐만 아니라..............기타 등등.. 기타 등등..


잘한 것만 있을까? 정말 난 실수의 여왕이었다. 내가 해 본 실수가 은행에서 10년에 한 번 나오는 실수라는, 영광 아닌 영광도 있었다. 하지만 실수가 100번에서 10번으로, 10번에서 1번으로 줄어드는 동안 나는 어느새 후배들이 머리가 나쁘거나 이해를 못해도 이해해줄 수 있는 사람이 되었고 휴먼 에러를 줄이는 자동화 방식을 고안해 내는 기획자가 되어 있었다.


무려 8년을 한 직장에서 온 몸이 부서져라 일했는데, 이 뿐이랴! "넌 잘하는게 뭐야?" 라고 하면 당연히 사람이 말문이 막힌다. 기본적으로 "잘한다"는 기준도 사람마다 다르고, 내가 나 자신에 대해 잘한다고 말하긴 뭔가 쑥쓰럽다. 왠지 잘한다고 했다가 못하면 안될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어떤 경험을 했는지를 말하라고 하면 누구라도 술술술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낼 수 있다.


그래서 지금은 내가 알아듣는 말이 그래도 60% 이상은 되는 일을 하며 조금씩 감을 다시 찾아가고 있다. 그래서 그 다음은 뭐냐고? 나는 이 모든 걸 경험해 본, 지금보다 더 멋진 사람이 되는 거다. 그 경험 안에서 나만의 선택을 통해 또 더 나은 무언가를 해낼 거고.


요즘 매일 사람들에게 묻고 다닌다. "어떤 일을 겪어 보셨나요?"


질문은 계속 발전하고 있다. "전 직장에서 어떤 일을 하셨나요?" "여기에선 어떤 에피소드가 있었나요?" 나의 부족함에서 새로운 경험이 탄생하고 그 경험 안에서 내가 한 선택으로 인해 새로운 인식이 열렸다. 그 인식은 타인에게서 배우고 싶다는 마음까지 절로 만들어낸다. 그냥 길을 떠났을 뿐인데, 우연히 관광 명소가 아닌 멋진 장소를 만난 것 같이 또 길을 잃고 싶어진 것처럼. 이래서 인생은 여행이라고 하나 보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탓' 하기 전에 충분히 '노력'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