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가 조금 컸다고 나를 향해 활짝 웃어주거나 폭 기대어 안길 때 마음의 상처가 아무는 느낌이 든다. 내가 특별히 아기에게 잘해준 게 없는 것 같은데 아기는 내 존재만으로 행복해하기 때문이다. 마음공부를 할 때, 바로 그 마음이 나 자신에게 느껴야 할 마음이라고 했다. '자존감'이라고 흔히 부르는, 나 자신을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이다. 엄마를 향한 아기의 조건 없이 해맑은 웃음이 나로 하여금 자존감을 연습하게 한다.
어릴 적 엄마가 아닌 할머니 손에 큰 나는 언제나 항상 사랑에 갈급함을 느꼈다. 부모님의 이혼 전에는 어린이집에 종일 맡겨졌던 적도 많고 초등학교 적에는 장기간 외할머니 댁에 맡겨져 바글바글한 사촌들 틈바구니에서 묻어서 키워졌던 적도 있다. 그래서인지 아무리 할머니 품에 파고들어도 사랑이 모자라게 느껴졌다. 밑 빠진 독처럼 사랑을 받아도 받아도 모자라다고 느끼다 보니 선생님한테 예쁨을 받기 위해 공부에 지나치게 매진하기도 했다. 할아버지와 사별하시고 미용실을 하며 사 남매를 홀로 키워내신 할머니. 요리를 참 잘하시던 할머니. 늘 꼭두새벽에 일어나서 집을 쓸고 닦으시던 할머니. 할머니가 돌아가신 지도 벌써 8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지만 아직도 힘들고 외로운 기분이 들 때면 할머니가 보고 싶고 어린애처럼 응석을 부리고 싶다.
이렇게 애정결핍을 가지고 살아가는 나는 남편에게도 항상 부모님과 같은 보살핌을 받고 싶어 하는 마음이 불쑥 솟아오르는 게 참 어렵다. 아기를 낳고 결혼에 대한 생각이 많이 바뀌었는데, 다양한 형태의 가정이 있지만 - 부부가 아기를 낳기로 결정했다면, 서로 동등한 어른들이 힘을 합쳐서 새 생명을 책임지는 과정인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나는 남편에 비해서 아직 해결해야 할 마음의 숙제가 남아있는 상태에서 출산을 해서 혼자만의 사투를 벌이고 있다. 원래는 이런 마음의 어려움을 어느 정도 해결한 뒤에 아기를 가지려고 했었는데 그전에 아기가 태어나면서 육아를 하면서 해결해야 하는 내면의 숙제를 던져 줬다. 지금 뒤돌아보면 너무 다 해결하고 나서야 아기를 가질 수 있다고 생각했던 과거의 내가 귀엽다. 이런 류의 성장은 한 번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계단식으로 평생에 걸쳐 완성되는 것임을 이제는 알기 때문이다.
아이가 어리다 보니 육퇴 후에 해야 할 일이 많다. 이유식 공부도 준비도 해야 하고 장난감 소독과 매트 청소 등등.. 남편은 하루 종일 일하느라 스트레스를 받아서 피곤에 절어 있는 상태로 집에 오고, 나는 그런 남편을 강아지처럼 기다리다가 막상 남편이 와서 조금이라도 쉬려고 하면 그렇게 아쉽고 원망스러운 마음이 솟구쳐 오른다. 저녁 식사를 포기하기는 했지만 나는 아기 잘 때 낮에 잠깐이라도 눈을 붙였는데, 남편은 집에 와서도 업무 연락에 쉴 새가 없다. 그럼에도 나만 긁느라 깨는 아이를 케어하느라 밤잠이 끊기고 낮에 피곤한 것에 대한 억울함이 먼저 내 마음을 지배한다. 그리고 남편이 피곤한 건 알지만 아기도 봐주고 살림도 도와주고 나도 좀 달래 주었으면 하게 된다.
생각해 보면 내가 엄마이기 때문에 당연한 일들이 많은데 그렇게나 억울하고 속상하다. 남편의 육아참여도가 높아지는 건 맞벌이 부부가 많아진 요즈음 새로 생긴 사회 풍조인데 남들이 하니까 당연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생긴다. 반대로 생각해 보면 내가 남편의 마음을 달래주거나 남편의 일을 덜어준 적은 거의 없다. 남편은 항상 묵묵히 힘들다는 내색이 없다. 그냥 피곤해 보이면 그런가 보다 하곤 한다. 남편은 많이 피곤해도 잠깐씩 짬 내어 아기를 안아 준다. 출산휴가가 시작되고부터 살림을 내가 최대한 하고는 있지만 남편에게 내가 정신적인 의지가 되는 존재는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반대로 나는 남편에게 안전이나 세상물정 등에 심리적으로 많은 부분을 의지하게 된다.
동등하고 독립적인 어른으로 파트너로 아기엄마의 역할도 밝게 해내면서 남편과 말동무도 되어주고 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부부라는 걸 머리로는 알고 있다. 하지만 현실은 나의 내면과 싸우느라 그럴 겨를이 없는 게 사실이다. 다행히 모성애가 무척 강해서 아기가 힘들게 할 때 짜증을 내거나 엉덩이를 팡팡 때리지는 않는다. 다만 모성애로 꾹꾹 눌러 가며 참고 있는 사랑받고 싶은 마음이 남편에게 표출될 때가 문제다. 나는 살림과 육아, 남편은 업무로 부부가 서로 바쁘고 여유가 없다 보니 육퇴 후에도 할 일을 각자 해치우고 차분히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는 게 함께 대화를 하거나 영화를 보는 것보다 더 절실하기 때문이다. 누가 누구를 돌봐줄 겨를도 여유도 없다. 둘 다 혼자만의 시간이 턱없이 부족하기에 육퇴와 퇴근 후에는 그냥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누워서 쉬고만 싶다.
엄마의 존재가 가정에서 얼마나 중요한 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될 정도다. 엄마가 흔들리면 집안 전체가 흔들리는 법이다. 그런데 요즘 들어 내가 이런 상황과 성장과정에서 얻은 애정결핍이 맞물려 심각한 산후우울증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요한 증상을 보니 피곤하고, 식욕이 감퇴하고, 아기와 나의 건강에 집착하게 되고, 남편이 미워 보이고(!), 집중력이 떨어지고, 소화가 잘 안 되는 등 딱 내 얘기여서 놀랐다. 얼마 전에 영양제를 먹기만 하면 매번 체해서 소화제를 며칠간 먹었던 기억이 난다. 이 모든 게 호르몬의 영향으로 더 증폭되는 거라고 한다. 그래서 약물로 치료가 가능하다고는 하지만, 약을 먹어서 해결하고 싶지는 않았다. 더 근본적인 원인을 찾고 싶었다. 남편에게 이렇게 저렇게 나를 보살펴달라고 하는 대신 내 마음을 찬찬히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아직 사랑을 받는 법도 주는 법도 모르는, 작고 웅크린 여자아이 하나가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내 안의 애정결핍을 해소할 수 있어야 아기도 안정적인 정서를 형성할 수 있기에 아기를 위해서라도 내가 많이 노력해야겠다고 다짐하게 되었다. 남편에게 돌아가던 화살이 일단은 한풀 꺾였다. 정말 감사하고 신기한 건, 아기와 24시간 부대끼며 지내다 보니 사랑에 갈급한 나의 마음이 조금씩 옅어져 간다는 것이다. 강력한 모성애 덕분에 아기의 얼굴만 봐도 시간이 그럭저럭 잘 가는 나는, 아기가 조금 컸다고 나를 향해 활짝 웃어주거나 폭 기대어 안길 때 마음의 상처가 아무는 느낌이 든다. 내가 특별히 아기에게 잘해준 게 없는 것 같은데 아기는 내 존재만으로 행복해하기 때문이다. 마음공부를 할 때, 바로 그 마음이 나 자신에게 느껴야 할 마음이라고 했다. '자존감'이라고 흔히 부르는, 나 자신을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이다. 엄마를 향한 아기의 조건 없이 해맑은 웃음이 나로 하여금 자존감을 연습하게 한다.
가장 두려운 건 불안정한 나의 마음에 영향을 받아서 아기가 불행한 아이로 자라기라도 하면 어쩌나 하는 거다. 아기의 천사 같은 미소를 보며 '엄마는 절대 널 떠나지 않을 거야. 그리고 언제나 행복한 엄마가 되려고 노력해 볼게.' 어느새 내가 받지 못했던 사랑을 아기에게 주고 있다는 게 느껴진다. 아토피로 고생하는 아기가 스트레스를 덜 받도록 이유식 먹일 때도 장난을 치며 재미있게 해 주려고 노력하고, 하루에 한 번씩은 꼭 웃음보가 터질 정도로 웃겨준다.
한편으론 살림과 육아를 완벽히 해야 한다는 압박감을 내려놓기 위해서 노력 중이다. 열탕 소독 한 번 더 할 시간에 아기와 눈 한번 더 맞추자 라는 게 요즘의 생각이다. 요즘 아기가 앉고 기려고 엎드려서 엉덩이를 높이 들 때가 많은데 정신 차려보면 못 했던 동작을 하고 있다. 완벽주의에 매몰되어 아기의 경이로운 성장의 순간을 놓치기라도 하면 후회가 막심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육아에 대해 너무 높은 내 기준을 만족하지 못하는 남편의 행동이 싫어지고 미워지게 된다. 내가 체력이 좋아서 원하는 만큼 바쁜 걸 감당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하면 되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조금만 아기를 봐도 힘들기 때문에 그 잣대를 남편에게 돌리는 것 역시 좋지 않다. 내려놓는 훈련이 잘 된다면 복직 후에도 업무에 대한 완벽주의를 일정 부분 내려놓고 더 중요한 일을 가려내어 집중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남편이 육아에 참여하는 정도는 각 가정마다 천차만별일 것이다. 남편이 나 대신 아기도 돌봐 주고 살림도 다 해주고 돈도 벌어온다면 엄마인 나의 역할은 남는 게 없을지도 모른다. 자꾸 SNS를 보며 다른 가정의 좋은 면만 보고 남편과 비교하다 보면 행복은 멀어질 수밖에 없다. 이렇게 오늘도 아기와 함께 시간을 보내며 사랑받고 싶은 애어른의 마음을 조금씩 채워 가고 있다. 한 뼘 더 성장하게 해 준 아기에게 오늘도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