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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nnobanker Jun 08. 2024

D+192) 매 순간 더 나은 결정 내리기

제품의 기능 하나를 추가하려고 할 때에도 개발자와 디자이너가 '왜?'라고 물었을 때 항상 뒷받침할 근거와 레퍼런스를 들고 갔듯이, 아기에게도 그런 고민 없이 무언가를 하게 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싶다.

아기가 모유나 분유만 먹으며 누워 있을 때가 가장 쉬울 때라는 말이 믿기지 않았는데 정말이다. 뱃속에 있을 때가 가장 편할 때라고 했을 때 반신반의 했는데 믿을 걸 그랬다. 요즘은 아침에 눈을 뜨면 시간대별로 정해진 아이의 수유 스케줄과 이유식 만들어 먹이고 치우기, 문화센터 일정에 살림까지 조금이라도 내가 게으름을 떨면 와르르 밀리는 일정을 소화해야 한다는 부담감에 다시 눈을 질끈 감는 날이 많아졌다. 도대체 복직을 하면 어떻게 이 많은 걸 돌아가게 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하루에도 몇 번씩 든다. 그런 부담감을 한층 더해주는 건, 아기의 깨어 있는 시간은 점점 더 늘어나는데 육아용품을 사거나 이유식 식단표를 짜는 등 엄마의 결정이 필요한 순간은 점점 더 많아져서다.


PM 혹은 기획자는 매 순간 결정을 내려야 한다. 버튼을 왼쪽에 둘지 오른쪽에 둘 지에 대한 작은 결정부터 이번 앱의 주요 기능을 무엇으로 할지에 대한 큰 결정까지 정말 매 순간이 더 나은 결정을 위한 싸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더 나은 결정을 내리기 위한 기준과 대원칙이 없으면 매번 결정을 내릴 때마다 어려움을 느끼고 시간도 오래 걸릴 수밖에 없다. 좋은 제품을 만들기 위한 나만의 기준과 대원칙을 가지고 (1) 회사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한 매출이나 고객 수 등의 목표를 먼저 세우고, (2) 고객이 필요로 하는 것을 캐치해서 목표를 가장 빨리 달성할 수 있는 프로세스를 앱에 만들어준다는 생각으로 일을 해왔다. 기획이 어떤 프로세스로 갈지에 대한 초안을 그려 오면 개발과 디자인팀 등이 모여서 함께 검증해 나간다. 작은 회의를 하더라도 기획자는 회의를 준비하고 안건에 대한 결론이 날 수 있도록 이끄는 역할을 한다.


육아를 해보니 많은 결정을 내려야 하는 피로감이 일할 때와 별반 다르지 않다. 이유식을 시작하니 아기에게 어떤 음식을 먹일지, 어떻게 조리할지, 어떤 조리도구를 사용할지 등등 결정해야 할 것이 매일 수십 가지는 된다. 내가 먹을 음식은 그날의 기분이나 냉장고에 남은 재료에 따라 정하기가 쉽다. 하지만 아기는 월령별로 먹이면 안 되는 음식도 수십 가지인 데다, 조리 방식도 월령별로 달라야 하고, 젖병을 떼는 연습도 동시에 시작해야 한다. 이제 아기 보기가 조금 익숙해졌다 싶으니 이유식 전쟁이 시작되어 또다시 검색 삼매경에 빠지게 되었다. 우리 엄마들 세대의 육아가 집안일을 하느라 아기를 놀아주지 못해 미안해하며 키웠다면 요즘 엄마들은 정보의 홍수 속에서 어떤 기준을 잡고 아이를 키워야 하는지에 대한 것이리라.


그뿐이랴. 나의 가치관만 있는 게 아니라 남편의 가치관도 고려해야 한다. 나는 아이가 너무 어릴 때는 굳이 약을 쓰지 않도록 최대한 청결하게 하고 면역력에 도움이 되는 음식을 먹이는 등 별도의 노력을 하자는 주의다. 반면 남편은 어릴 때부터 먼지도 좀 먹고 적당히 더럽게 키우는 게 더 좋다는 입장이다. 나는 엄마의 희생이 아이를 만든다는 생각을 갖고 있지만, 남편은 엄마 먼저 먹고 싶은 것 먹고 행복해야 아기도 행복하다고 생각한다.


아무래도 주 양육자인 엄마와 보내는 시간이 훨씬 많으니 아기가 나의 영향을 더 많이 받기는 하지만, 아기 아빠의 의견도 반영하려고 노력한다. 매일 하던 열탕 소독도 이제는 많이 양보해서 일주일에 두세 번만 하고 있다. 밥도 대충 때우고 이유식을 만들었었는데, 이젠 먹고 싶은 것이 있으면 나 먼저 챙겨 먹고 아기가 놀 때 이유식을 조금씩 만든다. 어느 것이 더 낫다고 단정 지을 수 없다. 어떤 기준을 가지고 아기를 키우느냐를 결정해야 하는 문제다. 엄마아빠 중에 신경 쓰는 게 많고 아기에게 더 많은 제한을 두는 쪽이 (주로 주양육자인 엄마가) 주로 무던한 쪽에 본인 기준에 맞추라고 잔소리를 하게 되면 부부 사이는 점점 멀어지게 된다.


아토피가 있는 아이의 이유식을 시작하면서 정말 많은 고민을 했다. 세상에 얼마나 다양한 먹거리가 있는데 알러지 유발 식품을 굳이 먹여야 할까? 제한한다면 언제까지 제한해야 할까? 아기가 피부에 음식을 묻히지 못하게 먹여야 할까? 앞치마를 두르고 자기주도식을 해야 할까? 등등.. 누가 이 주제를 가지고 임상 실험을 해서 결과를 논문으로 써놨다고 해도 결정은 엄마인 내가 내려야 한다. 모두 답이 없는 고민이다. 우리 남편 말마따나, 이렇게 하나 저렇게 하나 아기는 별 일 없이 잘 클 것이다. 하지만 양보하기 싫은 것들이 있어 고민을 하게 된다.


1. 아기가 불필요하게 힘들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 음식을 초반에는 최대한 오래 끓여서 먹이고, 알러지 테스트를 시간을 두고 천천히 진행한다.

2. 결과적으로는 남들 먹는 걸 어느 정도는 다 먹고 살았으면 좋겠다. : 알러지가 약한 재료는 시간을 두고 계속 다시 시도한다. 복직을 해야 하니 어린이집도 보내고, 유아식부터 시판을 적절히 섞어준다.

3. 유아식을 할 때까지 내가 이유식을 만들다 지쳐버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 큐브 이유식과 토핑 이유식, 밥솥 이유식, 아이주도 이유식을 단계별로 적절히 활용한다. 아기에게 맞추는 것도 좋지만 내가 마음의 준비가 되었을 때 이유식 횟수를 늘린다. 재료 고민이 너무 심하면 그냥 한 번 먹였던 재료를 다른 방식으로 조리해서 먹인다.


머리가 너무 복잡해서 이렇게 나만의 기준들을 쭉 적어서 그에 따른 세부 방안을 정리해 두었다. 아이는 하루가 다르게 커가기 때문에 내가 '이렇게 이렇게 해야지' 하는 것들이 한 달 후면 또 크게 바뀌어 있어 결정의 피로감을 더하기도 한다. 아이가 커가는 동안 일관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육아의 기준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자립심 있는 아이', '책상머리 공부보다 세상 돌아가는 것에 호기심이 많은 아이'로 키우기 등등..


이유식 하나만 해도 이런데, 정서적인 부분이나 미디어 노출, 약 복용이나 예방접종 등에 대해서는 더더욱 신중해지고 결정이 어려워진다. 스스로 내리는 결정에 아기가 잘 따라오기도 하고 좋은 영향을 받을 때마다 뿌듯하고 신이 된 듯한 기분을 느끼기도 한다. 반대로 잘못 내린 결정에 아이가 아프거나 안 좋은 영향을 받으면 죄책감이 상당하다. 이 크고 작은 결정들이 쉬워지려면 장기적이고 명확한 기준이 있어야 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러다 보면 인생에서 무엇에 중점을 두고 살아야 하나 하는 가치관의 문제에 또 봉착하게 된다. 남편은 성인이 된 이후에 일관된 삶의 방향성을 가지고 지금도 추구하고 있지만, 나는 살아가면서 경험하는 것이 크게 바뀌고 그에 따라 가치관도 크게 바뀌고 있는 상황이다. 육아를 하면서 의도치 않게 내가 살아온 길을 되돌아보게 된다. 20대 때 왜 그렇게 방황했을까, 조금 더 일찍 결혼해서 아이를 낳을 걸 하는 생각도 든다. 삶에 대한 가치관을 전반적으로 재점검하게 된다. 뭔가 거창한 것을 이루려고 버둥거렸던 시절도 있었고, 욜로나 소확행을 좇으며 작은 것에 만족하기 위해 노력했던 시절도 있었다. 조금 더 일찍 가치관을 재정립했다면 좋았겠다는 생각도 든다.


이렇게 작은 존재가 내가 살아온 길을 돌아보게 만들고 앞으로 살아갈 길을 또다시 고민하게 만드는 게 신기하다. 그 자체로 좋은 일이지만, 꼭 피하고 싶은 것이 있다. 내가 이루지 못한 걸 아기에게 강요하는 일이다. 예를 들어 내가 해외 유학을 다녀오지 못했기 때문에 애는 유학을 보낸다던지 하는 건 절대 하고 싶지 않다. 그보다는 아기가 하고 싶어 하는 걸 경험하게 해 주고, '왜?'라고 물었을 때 정말 합리적인 이유가 있는 것들을 해주고 싶다. 제품의 기능 하나를 추가하려고 할 때에도 개발자와 디자이너가 '왜?'라고 물었을 때 항상 뒷받침할 근거와 레퍼런스를 들고 갔듯이, 아기에게도 그런 고민 없이 무언가를 하게 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싶다. (부족한 수면 시간만 해결할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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