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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줄라이 Sep 08. 2018

미스터 션샤인의 세 남자 중 한 명을 선택한다면?

유진 초이, 구동매, 김희성 중에서 누구를 선택할까?

요즘 김은숙 작가의 '미스터 선샤인'이 인기다. TV를 잘 보지 않지만 나도 가끔 보고 있다. 드라마를 보면서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젠틀하고 인간에 대한 예의와 애정을 아는 유진 초이, 거칠지만 가슴이 뜨거운 구동매, 부모의 죄가 무거워 한량 행세를 하는 양심적인 지식인 김희성, 이 세 사람 중에서 한 명을 결혼 상대로 택한다면 나는 누구를 선택할까?

5분 정도 생각하니 답이 나왔다. 내 선택은 '유진 초이'다. 드라마 속에서는 구동매가 좋지만 현실에서는 아니다. 김희성은 온화하지만 나약한 지식인 같아서 제일 먼저 탈락이다. 나는 머리로만 고민하는 지식인은 질색이다. 남자든 여자든 생활력 있는 사람이 좋다.



유진 초이는 어쨌든 혼자 힘으로 세상을 버텨낸 사람이다. 험한 꼴을 많이 겪었지만 인간에 대한 애정을 간직하고 있고 그 애정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안다. 티 나지는 않지만 옆에 있는 사람들에게 묵묵히 잘해주는 타입다. 게다가 은근 유머 감각도 있다. 대화를 이어나가는 재미가 있을 것 같다.


구동매는 매력적이지만 위험하다. 자기감정에 휩쓸리면 다른 사람의 감정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 그 감정이 대상에 대한 애정에서 나온 것이라 하더라도. 그 깊은 속마음을 모르고 당하는 사람은 매번 황당할 것이다.



오해하지 말자. 나는 사실 구동매 때문에 이 드라마를 본다. 극 중에서는 열렬한 구동매 팬이다. 유진 초이는 주인공으로서 매력적이지 않다(내 기준에서). 드라마 속의 인물을 현실로 데려왔을 때, 1시간짜리 판타지가 아니라 몇십 년을 전제로 한 계약이 될 때 나의 선택은 달라진다는 뜻이다.


나에게는 특이한 남성 콤플렉스가 있었다. 아빠는 다정했지만 무능해서 가족들을 힘들게 했고(커서는 다정함을 가장한 폭력 같이 느껴졌다), 한 살 위 오빠는 대놓고 폭력적이었다.


주변 남자들의 무능함과 폭력성에 진절머리가 난 나의 선택은 무조건 '생활력 있되 착한 남자', '부지런하고 내 말을 잘 듣는 남자', '위험하지 않은 남자'였다. 현실 속에서 강한 남자를 보면 경계했고 멀리했다.


하지만 남성성이란 기본적으로 거칠고 강하다. 착한 남자를 찾는 나의 억눌린 욕망은 판타지 속에서는 강한 남자, 외로운 늑대, 츤데레 형 서브 주인공에 대한 선호로 나타났다.


동매는 명백한 츤데레다.


아끼는 마음이 있어도 그 마음을 굳이 밝히지 않는다. 오히려 비딱하고 거칠다. 주변 사람들에게는 다정한 모습도 보이면서 '사랑하는 그녀' 앞에서는 불친절하다. 전형적인 츤데레이자 반항적인 서브 남주다.


현실에서 강한 남자들은 나를 좋아하지 않았다. 나는 외모는 강해 보이지 않지만 알고 보면 고집이 꽤 세다. 그래서인지 현실에서 나에게 관심을 보이는 남자들은 하나같이 성격이 유순한 타입이었다.


하지만 나의 중간 껍질인 '센 고집'을 또 한 번 들춰보면 그 안에는 무른 속살이 있다. 그 약한 마음을 보호하기 위해 중간에 강한 껍질을 갖게 된 것이다. 사람들 눈에 보이는 외모야 내가 결정한 것이 아니니까.


그래서 나는 환상의 세계에서는 강한 남자를 좋아한다. 아직도 잘 판단이 안된다. 내가 강한 남자를 경험해보지 못해서 드라마나 영화 속에서 그런 인물을 좋아하는 것인지, 아니면 내 사회적 페르소나가 대놓고 강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거칠고 강한 캐릭터에 끌리는 것인지. 아마 둘 다 일 것이다.


우리가 환상 속에서 어떤 캐릭터를 좋아할 때는 자신이 되고 싶기도 하고 그런 사람과 만나고 싶기도 해서일 것이다. 현실에서 그런 캐릭터와 산다면 아마 재미없고 매일 부딪치느라 지옥일 것 같지만.


지금은 말이 통하고 대화가 끊이지 않고 운동이든 공부든 뭐든 같이 할 수 있는 사람이 좋다. 한마디로 친구 같은 남자가 좋다. 나이가 들어 여성호르몬 분비가 줄어들면서 이성에게서도 동성 친구를 찾게 됐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나는 남녀를 떠나 즐거운 시간을 함께 보낼 수 있는 사람이 좋다.


참, 이제 나는 드라마 속 인물을 좋아하더라도 폐인은 절대로 되지 않는다. 나의 폐인 생활은 끝났다. 애정을 갖고 지켜본 서브 주인공이 고통을 당하든, 소금밭을 뒹굴든 나는 TV를 끄고 아주 편안하게 내 할 일을 다 한다. 한마디로 즐기고 땡이다.


드라마란 원래 그런 것이 아니냐고? 예전에는 그렇지 못했다. 애정을 준 드라마 속 주인공이 힘들어하면 나도 왠지 우울했다. 그래서 드라마 폐인들의 심리를 너무 잘 이해한다.


너무 현실적이 된 것 같아 서운하기도 하지만 이것을 좋은 현상으로 받아들이려고 한다.


더 이상 판타지 속에서 대리만족을 꿈꾸지 않는다는 뜻일 것이다. 이제는 '현실의 나'를 받아들이고 인정한다는 뜻이 아닐까?


씁쓸하지만 어떤 사람도 완전하지 않고 알고 보면 한없이 약하고 이기적이고 어느 정도는 속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어떤 사람도 찬양하지 않게 되었다. 


어쨌든 요즘은 관심의 포커스는 남이 아니라 '나'다. 그것이 건강한 '관심 쏟기'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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