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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줄라이 Nov 09. 2018

노희경 드라마에서 발견한 2개의 은밀한 판타지

'계산 없는 관계 맺기'와 '결핍을 채우는 사랑' 

드라마는 작가의 판타지다. 동시에 시청자의 판타지다. 작가와 시청자의 환상이 만나는 지점에서 그 드라마의 인기가 결정된다. 자신의 환상보다는 대중의 환상에 집중하는 작가도 있지만 그런 경우에는 '아티스트'라는 명함을 얻지 못한다. '아티스트' 명함을 얻는 드라마 작가, 영화감독, 소설가들은 자신의 판타지와 시청자나 독자의 환상이 만나는 확고한 지점을 발견한 사람들이다. 


작가들의 작품에서 내 환상을 발견하는 일은 재미있는 경험이다. 우리는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서 맨 정신으로는 도저히 찾아낼 수 없는, 나도 모르는 나의 환상을 찾아낼 수 있다. 랜덤해 보이는 드라마 시청 경험에서도 어떤 특정 패턴이나 취향과 맞닥뜨리곤 한다.  

개인적으로 최근에 노희경 드라마를 몇 편 보면서 내가 은밀하게 품고 있는 두 종류의 판타지를 확인했다. 

하나는 사람을 대하는 자세,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이상적인 관계에 대한 환상이다. 노희경 드라마가 다른 드라마와 구별되는 지점은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노희경 드라마에서 등장인물들은 종종 사회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재산, 사회적 지위, 가족 배경, 지적 수준에 대한 고려 없이(때로는 아예 무시하고), 따뜻하고 인간적인 관계를 맺는다.

몇 번의 몸 부딪힘(농구, 축구, 물장난)을 거치면서 금세 말을 트고 사소한 계기로 자신의 속내를 연다. 장애를 가졌든, 살아온 이력이 구질구질하든 관계없이 한 식구로 맞아들여(주거와 식사를 공유한다는 의미에서) 또 다른 가족을 이룬다. 여기에는 '이 사람과 관계를 맺으면 나에게 이익이 될까? 불이익이 돌아오지는 않을까?'라는 고려가 없다. 오히려 나에게 조금도 현실적 이익이 되지 않는 관계임이 분명한데도 따뜻하게 공감하고 위로를 주고받는다.

이 이상적인 관계. 이것이 성별과 사회적 지위를 불문하고 사람들이 노희경 드라마에 끌리는 하나의 이유가 아닐까? 나는 그런 관계 맺기가 부럽다. 머리로는, 가슴으로는 되는데 현실에서는 익숙하지 않은 그런 관계. 나는 상대방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지에 대한 두려움, 사람의 선한 본성에 대한 신뢰 부족, 안전에 대한 지나친 조심성 등으로 쉽게 그렇게 하지 못한다.

이것은 거대한 환상이다. 바라지만 쉽게 도달하지 못하는 이상향이기 때문이다. 옳다고 생각하고 맞는다고 생각하면서도 그 길을 쉽게 가지 못한다. 그러면서도 마음속으로는 이상향을 꿈꾼다. 나는 현실에서 결여된 그런 관계를 드라마와 영화에서 보면서 행복한 기분에 젖고 대리 만족한다.

두 번째는 조금 더 복잡한 판타지다. 

노희경 드라마뿐 아니라 많은 드라마에서(요즘은 그런 경향이 더 두드러지는데) 남자들은 여자의 구원의 대상이거나 상호 구원의 대상이다. 남자는 겉보기에는 모든 것을 갖고 있고 멋져 보인다. 그러나 내면에는 강한 결핍이 존재하는데, 이 결핍은 주인공을 파멸에 빠뜨릴 만큼 강력하다. 남자 주인공은 여자 주인공에게서 그 결핍을 채우고 그녀를 미친 듯이 사랑하고 필요로 하게 된다. 여자 주인공은 남자 주인공을 구원하고 어떤 면에서는 서로를 구한다. 이것은 명백한 여성만의 판타지다.

그렇게 단언하는 이유는, 내 경험에 비추어볼 때 남자들은 전혀 다른 판타지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보다 열등한(체력적으로) 존재인 여성을 통해 구원받기를 원하지 않는다. 현실에서는 원할지 모르지만 판타지로서는 매력적이지 않다. 남자들이 원하는 것은 어떤 계기로 자신의 감춰진 능력을 인정받고 그 부수적인 결과로 많은 여성들의 동경/구애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강호의 은둔형 고수나 슈퍼히어로물이 이들의 욕망과 판타지가 집중 투영된 결과물이다. 여성들에게도 자신의 가치를 알아주기를 바라는 판타지가 있지만, 이들은 단 한 사람이 알아주어도 만족한다. 반면에 남성들은 세상이 공개적으로 알아주기를 바란다. 안 좋게 말하면 폼 나게 보이고 싶은 것이고, 좋게 말하면 자신의 가치를 많은 사람들이 알아주었으면 하고 바라는 것이다.

물론 여성들도 이런 욕망에서 자유롭지 않다. 하지만 경험상(편견일지도 모르지만) 여성 판타지는 남성 판타지에 비해 조금 더 복잡하고 미묘한 것 같다. 자신을 구원하고 자신이 구원할 그 남성은 '일부 약점'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는 강하고 매력적이어야 한다. 나의 가치를 세상이 직접적으로 알아주기보다는 나를 사랑하는 한 남자의 가치에 의해 간접적으로 인정받기를 원하는 것 같다. 

따라서 내가 구원하는 남자는 '전적으로' 못난 인물이어서는 안된다. 이것이 흔히 말하는 '평강공주' 신드롬인지도 모른다. 노트르담의 꼽추는 정말로 못난 인물이지만 미녀와 야수에서 야수는 사실 왕자였다. 노트르담의 꼽추 버전보다는 미녀와 야수 버전이 지속적으로 소구되고 작품화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을까? 

남성 판타지가 무협물/슈퍼히어로/액션물이라면 여성 판타지는 크게 2가지 버전이 있다. 하나는 신데렐라물이고 다른 하나는 미녀와 야수 버전이다. 

신데렐라 버전은 여성들 사이에서도 호불호가 갈린다. 어떤 여성들은 사랑의 유일한 근거가 '타고난', '의지와 관계없이 주어지는 외부 조건인' 미모인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착한 마음씨'도 주어진 것은 아니지만 현대 여성들에게는 그다지 매력이 없다. 나를 포함한 많은 여성들은 사랑의 근거가 '여성의 능력/여성이 노력해서 얻은 고유한 특성'이기를 바란다. 

노희경 드라마 '괜찮아 사랑이야'에서는 남녀 주인공 간의 밀당(밀고 당기기)에서 이런 여성의 복잡한 심리가 잘 드러난다. 개인적으로 여주인공의 심리에 많이 공감했다. 

내가 사랑하고 나를 사랑하는 남자는 능력이 있어야 하지만 그것 때문에 내기 피곤해지는 것은 싫다. 결혼으로 구속받고 싶지는 않지만 '내 남자'는 결혼을 원할 만큼 나에게 강하게 사로잡혀 있어야 한다. 

물건을 살 때 남자의 생각을 묻지만 그 의견을 무시하고 내 취향대로 고른다. 그것은 남자가 나에게 관심이 있어야 하지만 나는 그 관심에서 자유롭고 싶은 욕망이자 그 관심을 무시하고 내 취향을 고집함으로써 그 남자에 대한 나의 '은근한 지배력'을 확인하고 싶은 욕망이다. 

물론 드라마에서 남자 주인공은 이런 여자의 태도에 어이없어 한다. 여자가 옷이나 물건을 살 때 남자의 의견을 묻지만 결국에는 자신의 취향에 따라 결정하는 모습, 이것은 현실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다. 
  
결국은 모두 '자기애'다. '나는 남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우월한 존재다' 라는 생각을 인정받고 싶은 것이다. 여성의 경우는 보다 복잡하고 남성의 경우에는 조금 더 단순하게 나타난다. 

영화나 드라마는 시청자의 대리 만족의 대상이다. 특히 특정 타입의 영화나 드라마를 반복적, 지속적으로 본다면 그 사람의 내면에는 특정 유형의 판타지나 내적 욕구가 강하게 자리 잡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최근 본 노희경 드라마에 강하게 공감했다는 사실에서 나는 내가 관계에 대한 두 가지 판타지에 사로잡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그리고 노희경 작가도 그 판타지를 공유하고 있다고 살짝 추정해본다. 만약 그렇다면 보는 사람과 쓰는 사람 사이에 행복한 접점이 만들어진 셈이다.

내 남편이 10살 아들과 함께 주말마다 각종 슈퍼히어로 영화를 멍하게 보고 있는 모습을 많이 본다. 그리고 그것을 이해하려고 한다. 우리는 각자의 판타지를 간직하고 즐길 권리가 있다. 나에게도, 그들에게도 환상은 필요하다. 현실이 복잡하고 다층적이기 때문에 우리는 현실에서 모든 욕망을 다 실현할 수 없다. 일정 부분은 판타지의 몫으로 남겨둘 필요도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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