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하 작가의 '여행의 이유'를 읽었다.
김영하 작가를 몰랐다. 소설을 잘 읽지 않는 나는 그의 이름과 대표작의 제목만 아는 정도였다. 김영하 작가의 얼굴을 처음 보게 된 것은 TVN에서 방송한 여행 프로그램인 '알쓸신잡'에서였다. 조금 까다로워 보이는 인상에 약간 딴지를 건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 프로그램에서 유시민 작가는 미소도 많이 짓고 하고 있는 여행에 열정을 보이는 반면에 김영하 작가는 그 여행에 몰입하는 것 같아 보이지 않았다. 약간 거리감을 두고 다른 사람들의 말이나 행동을 관찰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재치있는 농담과 '의도적으로' 핀트를 벗어난 발언들에 매료되기 시작했다. 음.. 뭐랄까. 유시민씨가 지극히 옳고 도덕적이고 표면적인 발언들을 한다면, 김영하씨는 그 이면에 감춰진 다른 관점을 끄집어내어 과하지 않게 보여주는 느낌? 강하게 주장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상대편에 압도되지도 않으면서 자신의 시각을 견지하는 느낌이었다.
유시민씨가 인간에 대한 애정과 진보에 대한 열정을 아직도 갖고 있는 일종의 낭만주의자라면, 김영하씨는 모든 것에 일정 정도 거리를 둔 깍쟁이 같으면서도 뭔가 약한 구석이 있어보이는 사람이었다.
'저 사람의 저 비딱한 태도는 무엇일까? 어디서 저런 태도를 갖게 되었을까' 궁금했었다.
아마 그 의문이 이 책 <여행의 이유>를 구입하도록 이끌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책을 읽으면서 '김영하'가 어떤 사람인지 이해해나갈 수 있었다.
어린 시절에 수없이 이사를 다녔던 아이, 뚜렷한 '소속감'이 없는 사람, 냉정한 비관주의(순진한 열정과 반대되는), 불가지론을 믿는 사람, 인간의 의지와 노력으로 삶과 세상을 통제할 수 있다고 믿지 않는 사람, 한국 사회에 만연한 서열과 거대담론을 싫어하는 사람, 미래에 대해 희망을 품지 않는 사람.
틀렸을 지도 모르지만, 이것이 내가 '여행의 이유'를 통해 '김영하'라는 사람에 대해 갖게 된 느낌이다.
어린 시절, 가족의 사정으로 늘 삶의 터전을 옮겨다녀야 했던 그는 항상 거부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갖고 자랐다. 그 불안과 공포가 아직도 무의식중에 남아서 지금도 수시로 낯선 곳을 여행하고 호텔방에서 가장 편안함을 느낀다고 한다.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다. '오히려 여행을 싫어하고 한 곳에 정착해서 살아가야 하지 않을까?'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호텔은 돈만 내면 투숙객의 정체성이나 그동안 살아온 이력과 상관없이 누구나 환영해준다. 사람을 차별하지 않고 모든 손님을 정중하게 모신다.
그는 낯선 곳에 가서 호텔방에 들어설 때, 그 정갈하게 청소된 방에서 인공적인 향기를 맡고 순백의 시트 위에 누울 때, '아, 나는 이번에도 받아들여졌다'는 안도감을 느낀다고 한다. 그러면서 힐링이 시작된다고 한다. '이제 뭔가 제대로 해볼 수 있겠다'는 희망과 함께.
그는 '한국'이라는 국가에 대해 소속감을 갖고 있을까? 아마 '아무 조건 없이 선의를 주고 받는 평범한 사람들'에 대한 애정은 느끼고 있겠지만 누군가 목적을 가지고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국가'나 '민족' 같은 허상에는 연연해하지 않을 것 같다. 인간에 대한 연민과 애정은 갖고 있되, 소규모 '준거집단'은 없을 것이다.
흔히 어릴 때 많이 떠돌아다니며 큰 아이들은 '아웃사이더'로 클 확률이 높다고 한다. 나도 뼛속까지 아웃사이더 기질을 가지고 있고 그로 인한 고통과 내적 갈등이 얼마나 큰지 알고 있다. 내 아이들에게는 그런 고통을 물려주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큰 아이를 낳고 지금까지 20년 가까이 한 곳에서 살았다. '이사'가 나에게 그토록 큰 고통으로 다가오는 이유를 주변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이사 자체가 번거롭기도 하지만, '전학'과 관련된 내 어린 시절의 기억은 가끔 악몽을 꿀 정도로 끔찍한 것이었다.
새로 전학을 간 학교에서 교장선생님을 만나고 새 교실로 안내 받아 들어서는 그 순간, 나를 휘감았던 긴장과 불안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과연 아이들은 나를 환영해줄 것인가?' '내 짝은 좋은 아이일까?' '선생님은 무섭지 않을까?'
그런데 내 아이들은 이런 내 배려를 전혀 고마워하지 않는다. 그 아이들에게는 초등학교 6년간 같은 동네에서 같은 학교를 다니는 게 너무나도 당연한 기본 설정이다.
'한 곳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야 아이들이 모나지 않게 잘 클 수 있다'는 내 고정관념, 내지는 스스로 만들어낸 신념과는 달리, 아이들은 원래 성격대로 크고 있다.
외향적으로 태어난 아이는 환경을 옮겨도 새로운 아이들과 잘 어울리고, 내성적인 아이는 매일 다니는 학교, 매일 만나는 선생님인데도 매번 부끄러워하고 주저주저한다.
결국 한 인간의 모든 것은 환경의 영향도 크지만 기본적으로 그렇게 될 '천성', 내지는 '운명'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닌지... 15년이 넘는 동안 이사를 다니지 않음으로써 어찌 보면 경제적으로는 손해를 많이 보았는데도 후회하지는 않는다.
어쨌든 나는 하고 싶었고, 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일, 즉 '아이들을 안정적인 환경에서 키운다'는 일을 해냈다. 그리고 그 15년은 나에게 정신적 위로와 보상을 주는 시간이기도 했다.
김영하 작가의 '여행의 이유'를 읽었다.
김영하 작가를 몰랐다.
소설을 잘 읽지 않는 나는 그의 이름과 대표작의 제목만 아는 정도였다. 김영하 작가의 얼굴을 처음 보게 된 것은 TVN에서 방송한 여행 프로그램인 '알쓸신잡'에서였다. 조금 까다로워 보이는 인상에 약간 딴지를 건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 프로그램에서 유시민 작가는 미소도 많이 짓고 하고 있는 여행에 열정을 보이는 반면에 김영하 작가는 그 여행에 몰입하는 것 같아 보이지 않았다. 약간 거리감을 두고 다른 사람들의 말이나 행동을 관찰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재치있는 농담과 '의도적으로' 핀트를 벗어난 발언들에 매료되기 시작했다. 음.. 뭐랄까. 유시민씨가 지극히 옳고 도덕적이고 표면적인 발언들을 한다면, 김영하씨는 그 이면에 감춰진 다른 관점을 끄집어내어 과하지 않게 보여주는 느낌? 강하게 주장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상대편에 압도되지도 않으면서 자신의 시각을 견지하는 느낌이었다. 유시민씨가 인간에 대한 애정과 진보에 대한 열정을 아직도 갖고 있는 일종의 낭만주의자라면, 김영하씨는 모든 것에 일정 정도 거리를 둔 깍쟁이 같으면서도 뭔가 약한 구석이 있어보이는 사람이었다.
'저 사람의 저 비딱한 태도는 무엇일까? 어디서 저런 태도를 갖게 되었을까' 궁금했었다.
아마 그 의문이 이 책 <여행의 이유>를 구입하도록 이끌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책을 읽으면서 '김영하'가 어떤 사람인지 이해해나갈 수 있었다. 어린 시절에 수없이 이사를 다녔던 아이, 뚜렷한 '소속감'이 없는 사람, 냉정한 비관주의(순진한 열정과 반대되는), 불가지론을 믿는 사람, 인간의 의지와 노력으로 삶과 세상을 통제할 수 있다고 믿지 않는 사람, 한국 사회에 만연한 서열과 거대담론을 싫어하는 사람, 미래에 대해 희망을 품지 않는 사람.
틀렸을 지도 모르지만, 이것이 내가 '여행의 이유'를 통해 '김영하'라는 사람에 대해 갖게 된 느낌이다.
어린 시절, 가족의 사정으로 늘 삶의 터전을 옮겨다녀야 했던 그는 항상 거부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갖고 자랐다. 그 불안과 공포가 아직도 무의식중에 남아서 지금도 수시로 낯선 곳을 여행하고 호텔방에서 가장 편안함을 느낀다고 한다.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다. '오히려 여행을 싫어하고 한 곳에 정착해서 살아가야 하지 않을까?'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호텔은 돈만 내면 투숙객의 정체성이나 그동안 살아온 이력과 상관없이 누구나 환영해준다. 사람을 차별하지 않고 모든 손님을 정중하게 모신다. 그는 낯선 곳에 가서 호텔방에 들어설 때, 그 정갈하게 청소된 방에서 인공적인 향기를 맡고 순백의 시트 위에 누울 때, '아, 나는 이번에도 받아들여졌다'는 안도감을 느낀다고 한다. 그러면서 힐링이 시작된다고 한다. '이제 뭔가 제대로 해볼 수 있겠다'는 희망과 함께.
그는 '한국'이라는 국가에 대해 소속감을 갖고 있을까? 아마 '아무 조건 없이 선의를 주고 받는 평범한 사람들'에 대한 애정은 느끼고 있겠지만 누군가 목적을 가지고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국가'나 '민족' 같은 허상에는 연연해하지 않을 것 같다. 인간에 대한 연민과 애정은 갖고 있되, 소규모 '준거집단'은 없을 것이다.
흔히 어릴 때 많이 떠돌아다니며 큰 아이들은 '아웃사이더'로 클 확률이 높다고 한다. 나도 뼛속까지 아웃사이더 기질을 가지고 있고 그로 인한 고통과 내적 갈등이 얼마나 큰지 알고 있다. 그래서 내 아이들에게는 그런 고통을 물려주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큰 아이를 낳고 지금까지 20년 가까이 한 곳에서 살았다. '이사'가 나에게 그토록 큰 고통으로 다가오는 이유를 주변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이사 자체가 번거롭기도 하지만, '전학'과 관련된 내 어린 시절의 기억은 가끔 악몽을 꿀 정도로 끔찍한 것이었다.
새로 전학을 간 학교에서 교장선생님을 만나고 새 교실로 안내 받아 들어서는 그 순간, 나를 휘감았던 긴장과 불안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과연 아이들은 나를 환영해줄 것인가?' '내 짝은 좋은 아이일까?' '선생님은 무섭지 않을까?'
그런데 내 아이들은 이런 내 배려를 전혀 고마워하지 않는다. 그 아이들에게는 초등학교 6년간 같은 동네에서 같은 학교를 다니는 게 너무나도 당연한 기본 설정이다. 그리고 '한 곳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야 아이들이 모나지 않게 잘 클 수 있다'는 내 고정관념, 내지는 스스로 만들어낸 신념과는 달리, 아이들은 원래 성격대로 크고 있다. 외향적으로 태어난 아이는 환경을 옮겨도 새로운 아이들과 잘 어울리고, 내성적인 아이는 매일 다니는 학교, 매일 만나는 선생님인데도 매번 부끄러워하고 주저주저한다.
결국 한 인간의 모든 것은 환경의 영향도 크지만 기본적으로 그렇게 될 '천성', 내지는 '운명'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닌지...
15년이 넘는 동안 이사를 다니지 않음으로써 어찌 보면 경제적으로는 손해를 많이 보았는데도 후회하지는 않는다. 어쨌든 나는 하고 싶었고, 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일, 즉 '아이들을 안정적인 환경에서 키운다'는 일을 해냈다. 그리고 그 15년은 나에게 정신적 위로와 보상을 주는 시간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