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상적인 영화리뷰 2023 - <보스턴 교살자>
3월 17일(금) 디즈니+ 단독 공개된 영화 <보스턴 교살자>는 1960년대 미국 보스턴 일대를 공포로 몰아넣은 악명높은 연쇄 살인사건을 소재로 한 실화 영화입니다. 3년여에 걸쳐 13명의 희생자를 낳은 이 사건은 지금까지도 미제로 남아 사람들 사이에서 회자되고 있죠. 이 영화는 이 논란의 연쇄살인사건을 남성 형사가 아닌 여성 저널리스트들의 관점에서 그리며, 사건의 양상을 쫓고 범인의 정체를 밝히는 데 머물지 않고 사건 뒤에 숨은 진실과 사건의 의미를 추적하는 데에 집중합니다. 그럼으로써 영화는 단지 범죄 스릴러로서의 긴장감만 자아내는 걸 넘어, 잡히지 않고 남아있는 범인의 흔적처럼 반세기가 지난 현재까지도 여전히 그 영향을 끼치고 있는 사건의 무게와 그 뒤에 숨은 세상의 불편한 진실을 묵직하게 전합니다.
'로레타 매클로플린'(키이라 나이틀리)은 1962년 보스턴의 일간지 '레코드 아메리칸'에서 생활부 기자로 재직하고 있습니다. 신상품 리뷰 같은 일상 친화적 기사들이 맡겨지는 와중에도 로레타는 사건 취재에 대한 의지를 불태우며 매일의 특종 기사를 수집하고 있죠. 그러나 사건 취재는 늘 그렇듯 남성 기자들의 전유물일 뿐입니다. 그러던 어느날 보스턴에서 고령의 여성들이 잇따라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하고, 이를 포착한 로레타는 취재 의지를 피력하지만 데스크에서는 '일반인의 죽음'은 기삿거리가 안된다며 취재를 반대합니다. 홀로 사는 여성들이 타겟이고 교살이 살해 수법이며 마치 장식하듯 리본 모양의 매듭을 남긴다는, 살인간의 공통점을 제시하며 로레타가 취재의 필요성을 설득한 끝에 다행히 기사는 빛을 봅니다. 그러나 그간 사건에 미온적이던 보스턴 경찰서에서 로레타가 사건을 들쑤시고 다닌다는 빌미로 강력한 항의가 들어오고, 후속 기사가 불투명한 상황에 놓입니다. 그러나 이에 아랑곳않고 또 다른 살인사건이 발생하고, 로레타는 사건 취재 경험이 풍부한 동료 기자 '진 콜'(캐리 쿤)과 함께 파트너를 이루어 미궁에 빠진 사건의 실체를 추적합니다.
미궁에 빠진 연쇄살인사건을 다룬다는 점에서 '살인의 추억'과 '조디악'을, 집요하지만 신중한 저널리즘을 다룬다는 점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떠올리게도 하는 영화 <보스턴 교살자>는, 연쇄살인사건을 기자의 관점에서 추적한다는 점에서 일반적인 범죄 수사물과는 결을 달리 합니다. 현재까지도 미제로 남아 있는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하고 있긴 합니다만, 기자를 주체로 삼아 영화가 조명하는 것은 범인의 정체나 사건의 진상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사건이 지니는 사회적 의미로까지 나아갑니다. 사건이 얼마나 충격적인가보다 그 사건의 의미와 사건을 추적하는 이들의 노력을 그리는 데 집중하기 때문에, 사건에 대한 묘사 역시 극히 절제되어 있습니다. 벽 너머 들리는 희생자의 비명이나 충돌음으로 사건 발생 당시의 공포를 간접적으로 표현하죠. 실제 사건 기록을 참고한 세트 디자인으로 당시 보스턴의 분위기를 사실적으로 재현한 것에서도 알 수 있듯, 영화는 그 유명한 연쇄살인사건의 자극성보다 그 사건에 생기를 빼앗겼던 당시 보스턴의 분위기를 전하는 데 집중합니다. 그 덕에 관객은 단지 살인사건을 넘어 더 넓은 시야로 '살인의 그림자 아래 놓인 세계'를 둘러보게 됩니다.
보통 이런 범죄 추적 스릴러 장르의 영화를 보다 보면 추적의 단계를 밟아갈수록 진실에 가까워지고 범인의 윤곽이 드러날 것이라 기대하게 됩니다. 그러나 <보스턴 교살자>는 그런 기대를 빗나갑니다. 사건을 추적하는 데 걸린 3년 이상의 시간동안 희생자는 늘어만 가고, 활동 영역은 보스턴에만 머물지 않는데다, 범인은 잡힐 듯 잡히지 않으며, 이런 연쇄살인사건을 추적함에 있어 가장 중요한 단서인 살인 간의 공통점 역시 어째 점점 희미해지면서 진실은 갈수록 갈피를 잃습니다. 그러나 이 가운데에서도 거의 유일하게 뚜렷해지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연령대를 불문하고 모든 여성들 사이에서 팽배해지는 생존의 공포입니다. 그 공포는 사건을 추적하는 로레타와 진에게도 심리적인 위협으로 다가옵니다. '여자가' 이런 위험한 사건을 취재하는 것에 대해 세상은 압박 섞인 우려를 표하고, 취재에 절실히 임하는 태도에 대해 남편은 '가정을 내팽개치는 행위'로 규정하려 합니다. 범인의 정체조차 불확실한 미제 사건을 다루는 만큼 영화는 살인범의 실루엣을 동일인이 맞는가 싶게 다소 모호하게 처리하는데, 이처럼 지역과 타겟에 따라 얼궁를 갈아끼우는 듯한 살인범의 뒤에는 이처럼 두 기자를 비롯한 여성들의 숨통을 조여오는 세상이 버티고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두 기자는 이처럼 사회 전체에 팽배한 위협을 몸소 느끼고 있기에, 비로소 이 사건이 시대에 어떤 의미로 남게 되는지를 제대로 짚어내는 것이죠. 이처럼 <보스턴 교살자>는 '진실'이라는 개념을 살인사건에만 국한하지 않고 그 살인이 벌어지는 장이라고 할 수 있는 당대 사회에 관한 것으로 확장하며, 외적으로 충격적인 만큼 내적으로도 묵직하고 풍부한 사건의 함의를 발견하게 합니다.
리들리 스콧 감독이 제작에 참여한 만큼 완성도와 진정성, 깊이를 갖춘 이야기 속에서 믿음직한 배우들의 연기 호흡이 극에 임팩트를 더합니다. 아카데미 후보에도 두 차례 오르며 연기력을 인정받은 키이라 나이틀리는 특유의 직감으로 사건에 불같이 뛰어드는 행동파 기자 로레타 매클로플린 역을 단단한 연기로 그려내며 극을 이끌어갑니다. 첫 사건 취재, 그것도 매우 위험한 사건 취재가 가져다주는 불안감과 위기 속에서도 저널리스트로서의 사명을 놓치지 않으려는 뚝심을 담백하게 표현합니다. 한편 '나를 찾아줘', '고스트버스터즈 라이즈' 등 다양한 장르의 영화에서 인상적인 연기력을 보여 온 캐리 쿤은 풍부한 현장 경험을 바탕으로 치밀하고 계획적으로 사건에 접근하는 기자 진 콜 역을 안정되고 세심한 연기로 보여줍니다. 로레타의 취재를 지원하면서 동시에 경험자로서 이끌어줄 수 있는 부분은 이끌어주는 묵직한 선배의 모습으로 신뢰감을 주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오리무중이라 더 위험한 사건 앞에서 또렷이 대비되는 캐릭터의 두 기자가 파트너를 이룬 덕에 그들의 취재 행보가 더 입체적으로 전개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극중에서 두 기자는 '보스턴 유령'이라는 별명으로 언론이 신비화하려던 연쇄살인범에게 '보스턴 교살자'라는 섬뜩하지만 명료한 별명을 붙입니다. 정체를 알 수 없다고 하여 신비화할 수 있는 자가 아닌, 폭력적이고 불합리하게 여성들의 숨통을 조여오고 공포를 심화시키는 상징적 존재로서 이 '보스턴 교살자'가 활개를 치는 와중에도 두 기자가 취재를 멈추지 않고 끝내 진실을 세상에 알릴 수 있었던 것은, 미궁에 빠진 사건 앞에서도 분명 저널리즘의 역할이 있음을 알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범인이 누군지를 밝히는 일 이전에 이런 사건이 벌어지고 있는 세상이 어떤 곳인지를 밝히는 일이 그것입니다. 영화 <보스턴 교살자>는 그 출구 없는 두려움 속에서도 이런 세상의 모습을 기어코 깨닫게끔 목소리를 낸 기자들의 노력을 담담하지만 진진하게 보여줍니다.
영화 <보스턴 교살자> 예고편 : https://youtu.be/Wfl6Y57fv4U
** 본 글은 월트디즈니컴퍼니코리아로부터 소정의 원고료를 지원받아 작성되었으며, 내용은 주관적인 의견을 바탕으로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