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상적인 영화리뷰 2023 - <에어>
나이키의 그 유명한 농구화 브랜드 '에어 조던'의 탄생기를 그린 영화 <에어>는 아카데미 작품상 수상에 빛나는 벤 애플렉의 새로운 연출작이자 맷 데이먼과의 세번째 협업작으로, 간단히 말해 재미있고 감동적입니다. 불세출의 농구 스타 마이클 조던의 일대기도 아니고 그를 모티브로 한 스포츠 브랜드의 런칭 과정이 영화적으로 재미있을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을 가뿐히 날려버릴 만큼 영화는 흥미로운 80년대 스포츠 마케팅의 세계와 개인의 성장과 도약에 관한 이야기가 잘 맞물려 있습니다. 스포츠 자체만큼이나 치열한 스포츠 마케팅 승부의 현장을 유머와 에너지 가득한 태도로 탐험하는 동시에, 단순한 상업적 접근 이상으로 인간적인 믿음과 끈기, 이해와 애착이 어우러졌기에 가능했던 신화를 이야기하는 영화입니다. 영화가 그리는 실화의 디테일에 감탄하며 재미를 느끼다가도, 이런 이야기로부터 이런 비전을 끌어내는 영화의 안목에 감동하게 됩니다.
누구나 다 아는 스포츠 브랜드 나이키는 1984년 매우 어려운 상황에 있었습니다. 러닝화 시장은 끄떡없지만, 농구화 시장이 문제였죠. 당시 농구화 시장에서 나이키의 점유율은 17%. 1위인 컨버스가 54%였고, 2위인 아디다스도 29%였으니 1위의 반의 반 수준이었던 셈입니다. 농구 분야 전문가로서 브랜드와 함께 할 선수를 스카우트하는 중책을 맡고 있는 소니 바카로(맷 데이먼)의 어꺠는 무겁습니다. 이대로면 농구화 사업 부문이 아주 날아갈지도 모를 상황에서, 바카로의 눈에 든 루키는 다름 아닌 마이클 조던. 그러나 지명순위 3위 안에 드는 그는 나이키의 브랜드 입지로서는 언감생심이고, 설상가상 그는 아디다스만 선호한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그러나 어디가 끝일지 알 수 없는 조던의 가능성에 강한 확신을 가진 바카로는 창립자이자 CEO 필 나이트(벤 애플렉)의 조바심에도 아랑곳않고, 중간급 선수 3명에게 투자하라는 돈을 조던 1명에게 올인하기로 하는 한편, 에이전트를 건너뛰고 조던의 부모를 만나러 가는 모험까지 저지릅니다. 조던의 의사 결정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고 알려져 있는 어머니 들로리스(비올라 데이비스)의 관심을 얻는 데는 성공하지만, 이미 시장에서 '짜친' 이미지로 인식되고 있는 브랜드의 한계를 뛰어넘으려면 독보적인 카드를 내밀어야만 하는 상황.이에 바카로가 묘수를 내미니, 조던을 단순한 브랜드 앰버서더로 내세우는 게 아니라 신발이 곧 조던 그 자체가 되는 브랜드를 런칭하자는 것입니다.
농구에 대해 문외한인 저같은 사람이라도 나이키의 '에어 조던'은 모르는 이가 없을 만큼 큰 성공을 거둔 브랜드임에 틀림없습니다. 신발만 봐도 '에어 조던' 고유의 점프하는 로고 이미지와 함께 이 신발을 신은 마이클 조던의 이미지가 저절로 떠오르는 브랜드의 마법이 실현되죠. 이처럼 '에어 조던'은 브랜드와 인물의 스토리텔링이 합일되는 거의 최초의 시도로, 세계 스포츠 마케팅의 판도를 바꾼 역사적인 사례입니다. 마케팅에 좀 관심이 있다면 익히 유명한 사례입니다만, 이게 상업영화 소재로서 재미가 있을 거라곤 예상하기 어려운데 이 영화는 그걸 해냅니다. (어쩌면 연기력보다도 더) 연출력에서 인정 받아 온 벤 애플렉 감독은 이번 영화를 그의 가장 유쾌하고 재미있는 영화로 만든 듯 합니다. 전작들에서 느껴졌던 묵직하고 긴박감 넘치는 분위기 대신 속도감을 동반한 유쾌하고 따뜻한 분위기가 영화 내내 이어지죠. <에어>의 이야기는 크게 산업과 개인이라는 두 개의 축에서 전개되는데, 산업적 측면은 재미를 보장하고 개인적 측면은 감동을 보장합니다. 일단 현재의 관점에서 '쿨하지 못한 브랜드'로 인식되던 1984년 당시 나이키의 위상을 지켜보는 것부터가 흥미롭습니다. 지금은 누가 입고 신어도 힙하고 쿨해 보이는 브랜드지만 당시에는 마이클 조던이 '다른 브랜드는 신어도 나이키만은 안 신겠다'고 고집을 피우던, 그래서 지금과는 판이하게 다른 경쟁 구도 속에서 분투할 수 밖에 없었던 나이키의 과거사를 영화는 자조 섞인 유머로 훑습니다. 여기에 농구 시즌이 돌아올 즈음 저마다 주목받는 루키를 선점해 브랜드의 성장에 박차를 가하려는 스포츠 마케팅의 불꽃 튀는 일면이 탁월한 안목과 감각을 지닌, 다만 운이 자주 따르지 않을 뿐인 소니 바카로의 시점에서 유머러스한 터치와 빠른 페이스로 전개됩니다. 이런 기반 위에서 우리에게 '마이클 조던은 과연 어떻게 나이키의 손을 잡게 되었는가'라는 화두는 결말을 이미 알고 있기에 더더욱 초미의 관심사로 다가오며, 끝까지 주목을 놓을 수 없는 몰입감을 자아냅니다.
<에어>가 인상적인 것은 지극히 상업적이고 자본지향적일 이야기를 지켜보며 인간적인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한다는 점입니다. 그것은 아마도 이 무모한 프로젝트가 완주할 수 있도록 한 동력원에 사람과 사람 사이 두텁게 쌓이는, 가능성에 대한 확신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바카로가 조던을 단순히 쟁쟁한 선배 선수들의 뒤를 잇는 브랜드 앰버서더로만 활용하는 것에 머물지 않고 그의 성장과 도약의 스토리를 브랜드 스토리에 그대로 적용시켜 스토리를 넘어선 '히스토리'를 만들기로 결심하는 데에는, 조던이 단지 새로운 스타가 되는 것을 넘어서 유일무이하고 독보적인 '아이콘'이 될 것이라는 강한 확신이 깔려 있습니다. 불안 요소들이 많은 환경에서 신중하고 조심스러울 수 밖에 없는 나이키 내부에서 바카로의 이런 추진력은 조바심이 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그간의 경험과 안목을 바탕으로 굳건해진 확신을 따라 바카로는 아랑곳않고 필 나이트를 필두로 마케팅 담당 롭 스트래서(제이슨 베이트먼), 선수 관리 담당 하워드 화이트(크리스 터커), 디자이너 피터 무어(매튜 메이허) 등 동료들을 향한 어필을 멈추지 않고, 결국 동료들 역시 바카로의 뜻을 인정하고 지지하며 각자의 역량을 전력으로 쏟아 붓습니다. 여기에 자신의 아들이 실력이 특출나다는 이유로 어디에서도 이용당하지 않고 오롯한 입지에 우뚝 설 것이라는 가능성을 확신하는 조던의 어머니 들로리스까지, 그 모든 확신들이 맞물려 도박이 아닌 도전과 도약을 낳고 그렇게 '에어 조던'이 탄생했음을 보여줍니다. 더불어 어느 임계점에 다다랐을 때 논리나 데이터에 기대기보다 '까짓거 하자'며 결단을 내리는 순간은 자칫 전형적일 수 있어도, 나이키의 그 유명한 슬로건인 'Just Do It(그냥 해)'와 오버랩되며 새삼 그 순간의 빤하지 않은 의미를 곱씹게 됩니다. 규칙을 깨고 혁신의 도약을 이루기 위해서는 어느 순간 합당한 근거에 따른 설득과 무관한 결단이 반드시 필요하게 됨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에어>가 무척 편안하게 다가오는 것은 강렬한 인상을 심기보다 캐릭터 속에 녹아든 배우들의 생활연기 덕도 큽니다. 극을 이끌어 가는 소니 바카로 역의 맷 데이먼은 선수들에 대한 안목과 브랜드에 대한 감각이 뛰어나지만 늘 실적이 되진 않아 한편으로는 압박에도 시달리는, 영화 주인공이 되기 좋은 능력자인 동시에 평범한 직장인인 인물의 현실감을 잘 살려냅니다. '제이슨 본' 시리즈에서는 날아다니던 배우가 한껏 넉넉해진 비주얼로 러닝조차 어려워 하는 모습에선 웃음을 자아내는 한편, 마이클 조던에 대한 확고한 믿음에 기초해 설득의 힘을 보여줄 때에는 마음을 움직이며 일순간 벅차게까지 하는 너른 연기 폭을 보여줍니다. 괴짜 기질이 다분하면서도 독선적이기보다 전문가를 신뢰하는 '유쾌한 CEO' 필 나이트 역의 벤 애플렉 또한 기대 이상의 재미를 주며, 바카로와 일로는 떄로 부딪혀도 인간적으로는 더없이 가까운 마케팅 담당 롭 스트래서 역의 제이슨 베이트먼 역시 인간적인 연기를 보여줍니다. 경륜으로 만든 넉살을 자랑하는 선수 관리 담당 하워드 화이트 역으로 긴 작품 텀을 꺠고 모처럼의 입담 활약을 선보이는 크리스 터커, 바카로의 도발에 귀가 어지럽도록 폭풍 분노를 시전하는 조던의 에이전트 데이비드 포크 역의 크리스 메시나는 적잖은 웃음 지분을 담당합니다. 여기에 조던의 가치를 그 누구보다도 잘 아는 이로서 살벌한 스포츠 마케팅 분야의 전문가들 앞에서도 눈 하나 깜짝 않고 맞서는 강하고 진실한 어머니 들로리스 역의 비올라 데이비스까지, 알고보면 바카로와 무작정 대립하거나 반목하도록 그릴 수도 있는 캐릭터들까지도 납득 가능한 주관과 인간적인 유대를 입체적으로 보여주는 배우들의 열연 덕에 영화는 더욱 기분 좋게 에너제틱해졌습니다.
톡까놓고 말해서 <에어>가 잘 빠진 '나이키 PR 영화' 아니냐는 반박에 부인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브랜드 안에서 일어나는 도전과 혁신의 이야기가 영리하게는 물론 심지어 인간적으로까지 그려졌으니, 영화를 다 보고 나면 나이키가 정말 대단한 브랜드라는 걸 다시금 깨달을 수 밖에 없는 강력한 '나이키 PR 영화'임을 인정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에어>는 각기 다른 가능성을 지닌 사람들 사이에서 형성되는 '믿음의 벨트'가 불러오는 거대한 효과를 실감케 하는 경쾌하고 온기 어린 진심의 드라마이기도 합니다. 다만 그 의미 있는 사람들이 모인 배경이 공교롭게도 나이키라는 브랜드이고, '에어 조던'의 천문학적 성공은 그들이 모여 만들어낸 거대한 성과의 단적인 일면일 따름일지도 모르죠. 이렇듯 <에어>는 도달점이 부든 명예든, 결국 그 출발점엔 '불확실한 가능성을 향한 확실한 신뢰'라는 인간 고유의 미덕이 있음을 보여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