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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진만 Apr 05. 2016

사이다로 체증이 내려가진 않는다

<배트맨 대 슈퍼맨: 저스티스의 시작> - 잭 스나이더 감독

 

<배트맨 대 슈퍼맨: 저스티스의 시작> (Batman v Superman: Dawn of Justice, 2016)

                                                        

DC코믹스는 마음이 많이 급한 상황이었다. 2008년 <아이언 맨>을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영화 제작에 직접 뛰어들기 시작한 마블 코믹스는 여러 편의 솔로 히어로 무비의 안정적인 성공과 그들을 총집합시킨 <어벤져스>를 선보이는 (이른바 '페이스 1', '페이스 2' 등으로 불리는) 정기화된 시스템을 안착시키며 '마블 스튜디오'를 할리우드의 파워 스튜디오로 자리매김시켰다. 마블 사를 가족으로 맞이한 디즈니는 물론 일부 캐릭터의 영화화 판권을 나눠 보유한 이십세기폭스 사의 주머니도 채워주며, 마블 코믹스는 의심의 여지가 없는 할리우드의 파워 콘텐츠가 되었다. (물론 <판타스틱 4>와 같은 전대미문의 실패도 있었지만, 그마저도 마블 사의 성공가도에 걸림돌이 되긴 역부족이었다.) 이렇게 청사진대로 탄탄하고도 매끄럽게 마블의 시네마틱 유니버스와는 달리, DC 코믹스의 영화 프로젝트는 불안정성 투성이였다. 

<아이언 맨>이 나온 같은 해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희대의 슈퍼히어로 명작 <다크 나이트>를 내놓으면서 DC 코믹스의 시네마 유니버스 역시 불씨를 일으키기 시작했으나, 2억 불이나 들여 야심차게 내놓은 <그린 랜턴: 반지의 선택>이 흥행과 작품성 양면에서 비웃음거리에 가까운 대접을 받으면서 그 날개가 휘청거리게 된다. <슈퍼맨 리턴즈> 이후 침체되어 있던 슈퍼맨 캐릭터를 <맨 오브 스틸>로 살려내긴 했지만, 이마저도 전환점을 확실히 마련할 만한 대성공이라고 부르기는 힘든 마당에 DC는 <맨 오브 스틸>을 연출한 잭 스나이더 감독을 필두로 본격적인 DC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확장을 꾀하기 시작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슈퍼맨 리턴즈>을 연출한 브라이언 싱어 감독과 <그린 랜턴: 반지의 선택>의 주연배우 라이언 레이놀즈는 현재 마블 코믹스의 지붕 아래에서 빼어난 활약을 펼치고 있다.) 두번째 슈퍼맨 영화가 나온다거나, 배트맨 영화가 또 새로 나온다는 등 갖은 추측들이 난무하는 가운데 이 두 히어로가 함께 등장하는 영화가 DC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확장을 책임지는 선두주자 역할을 맡게 되었고, 이번에 나온 <배트맨 대 슈퍼맨: 저스티스의 시작>(이하 <배트맨 대 슈퍼맨>)이 그 결과물로 우리 앞에 나타났다. 솔로 무비가 아닌 콜라보 무비로 인해 마블에 뒤해 영화 분야 행보가 많이 뒤처진 DC의 조바심이 바깥으로 드러나진 않을까 하는 점이 우려되었었는데, 안타깝게도 그 우려는 현실화되었다. DC가 마음 급한 티를 좀 많이 냈다.                                      


<배트맨 대 슈퍼맨: 저스티스의 시작> (Batman v Superman: Dawn of Justice, 2016)

                                                                          

슈퍼맨(헨리 카빌)이 조드 장군(마이클 섀넌)과의 격렬한 전투로 메트로폴리스를 박살내던 당시, 브루스 웨인(벤 애플렉)도 그 난리의 피해자 중 한 사람이었다. 전투 과정에서 그의 회사인 '웨인 파이낸스' 사의 메트로폴리스 빌딩이 처참히 파괴되었고 그 과정에서 많은 직원들이 목숨을 잃거나 큰 부상을 입었기 때문이다. 이 사건으로 인해 슈퍼맨은 초인적인 영웅이면서 동시에 요주의 인물로 주목받게 되고, 세계 각지에서 활약할 때마다 그 여파로 인한 과도한 인명 피해로 언론과 정치계의 입방아에 오르내리길 반복하게 된다. 물론 그 누구보다도 배트맨인 브루스 웨인이 자신의 방식대로 악을 무찌르면서 슈퍼맨과의 정면 대결을 기다리고 있었다. 1년 반의 시간이 흐른 후 배트맨은 슈퍼맨을 향해 본격적인 도발을 시작하는 가운데, 슈퍼맨은 이런 상황이 우려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어디까지나 인간일 뿐인 배트맨의 도발이 일면 가소로워 보이기도 하는 모양이다. 그런 가운데 아버지의 재산을 물려받아 대기업 '렉스코프'의 CEO 자리에 오른 젊고 정신이 다소 바르지 못한 재벌 렉스 루터(제시 아이젠버그)가 그들 사이에 끼어들고, 한번 불이 붙게 된 슈퍼맨과 배트맨의 승부는 걷잡을 수 없는 판국으로 흘러간다. 

<배트맨 대 슈퍼맨>은 개봉 전부터 많은 매체에 엠바고를 철저히 당부하며 비밀유지를 했지만, 사실 마블 코믹스의 '어벤져스'와 대적할 만한 DC 코믹스의 슈퍼히어로 올스타 집단인 '저스티스 리그'를 들어본 사람이라면 제목만 봐도 결말이 이미 정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저스티스 리그'의 구성원에는 슈퍼맨과 배트맨이 포함되어 있는데 우리는 아직 이 공동체의 출범을 보지 못한 상황이니, 배트맨과 슈퍼맨의 대결은 곧 화해와 화합을 위한 대결이라는 걸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 있는 것이다. 영화사가 '저스티스 리그 프로젝트'를 준비하고 있다는 것이 빤히 알려진 상황에서, 관객들은 과연 '화해로의 결말이 정해져 있는 싸움'을 재미있게 볼 수 있는가. 배트맨과 슈퍼맨이라는 양대 빅 히어로들의 대결 자체로도 흥미를 돋우겠지만 제작진은 이 질문에 대해 꽤나 고민했으리라 짐작된다. 코믹스 팬이 아닌 이상 대부분의 관객들이 배트맨과 슈퍼맨 외에는 DC 세계관에 대해 사전 습득을 미처 못한 상황에서, 마블이 4년 걸쳐서 소개한 만큼의 히어로 인원들을 한 영화에서 효과적으로 소개하는 방법도 고민해야 했을텐데 말이다. 그만큼 <배트맨 대 슈퍼맨>에는 비슷한 성격의 <어벤져스>와 일대일로 비교되기에는 좀 억울하고 버거운 측면이 있었다. 그나마 무거운 고민을 좀 덜어내려면 역량 있는 프로듀서 또는 감독이 필요했을텐데, <배트맨 대 슈퍼맨>은 일단 그 부분에서 마블에 뒤처지고 말았다. 단도직입적으로 잭 스나이더는 DC 유니버스를 이대로 이끌기에는 역량이 부족하다.


<배트맨 대 슈퍼맨: 저스티스의 시작> (Batman v Superman: Dawn of Justice, 2016)

                                                                                                                                                                           

<어벤져스>의 조스 웨던 감독은 이미 개별 캐릭터들이 각자의 솔로 영화로 소개되어 정착한 가운데에서도 그들을 한 영화 안에서 조화시키는 게 무척 어려운 일임을 보여주면서, 그걸 또 용케 해냈었다. (물론 <어벤져스: 에이지 오브 울트론>에서는 그 능력이 기대에 살짝 못미쳤지만) 더불어 쉴드라는 조직에 닉 퓨리라는 총책임자가 있듯, 마블 시네마 유니버스에는 케빈 파이기와 같은 마블 사 기반의 든든한 프로듀서진도 존재한다. 마블 스튜디오의 영향력이 너무나 강해 감독 개개인의 역량이 제대로 발휘되지 못한다고 해도, 여러 편의 영화와 캐릭터들이 만드는 하나의 세계를 정립할 줄 아는 능력은 부정하기 힘들다. 그러나 DC의 경우는 이와 반대다. <맨 오브 스틸>에 이어 <배트맨 대 슈퍼맨>을 연출했고, 이후 <저스티스 리그> 연출도 예정되어 있는 잭 스나이더 감독 외에 존재감이 느껴지는 프로듀서가 보이지 않는다. (크리스토퍼 놀란이 <맨 오브 스틸>에 이어 이번에도 프로듀서로 참여했지만 존재감이 있는지는 의문스럽다.) 그렇다면 그라도 둘 이상의 슈퍼히어로들이 공존하는 세상을 조직하고 운영하는 데 만족스런 역량을 보여줘야 하는데, <배트맨 대 슈퍼맨>만 놓고 보면 아쉽게도 역부족이다. 잭 스나이더 감독은 히어로들 각자의 이야기를 하나둘씩 풀어내는데에 집중한 나머지, 그들을 조화시키는 데까지는 미처 신경을 쓰지 못한 모습이다. 2시간 반을 넘기는 긴 러닝타임도 충분치 못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배트맨과 슈퍼맨이라는 DC의 양대 빅 히어로가 맞붙는 가운데서도, 배트맨은 고담시에 살고 슈퍼맨은 메트로폴리스에 살며 두 도시의 분위기가 완연히 다르듯 두 히어로의 세계관도 철저히 분리된 느낌이다. 이 두 인물은 이번 영화에서만 이벤트성으로 잠깐 만났다가 끝날 것이 아니라 앞으로 같은 조직의 울타리 안에서 왕왕 만나며 화학작용을 일으켜야 한다. 궁극적으로 두 인물이 대립하는 원인은 정의에 대한 시각의 차이 때문이겠지만 관객들에게 설득력 있게 전해지지 못한다. 그보다는 한쪽은 사적인 복수심으로, 다른 한쪽은 그에 대해 공감하지 못하며 생기는 의문으로 서로 부딪히는 듯한 두 인물의 모습이 비칠 따름이다. 두 인물 간에 공유하는 문제의식이 희미해 보이는 것은 두 인물을 아우를 수 있는 하나의 포괄적인 세계가 영화 안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인 것도 한몫 한다. 미국의 정의로운 빛을 상징하는 메트로폴리스와 부패한 그림자를 상징하는 고담 속 두 히어로의 대립된 분위기를 조율할 수 있는 하나의 중립된 분위기가 있을 필요가 있다. 굳이 메트로폴리스나 고담 같은 공간적 배경을 만들지 않더라도 영화 스스로가 그런 태도를 유지할 필요가 있다는 얘기다. 그러나 영화의 톤 앤 매너부터가 메트로폴리스와 고담을 오가며 분위기를 손바닥 뒤집듯 바꾸기 일쑤다. 배트맨의 어두운 분노는 분노대로, 슈퍼맨의 정직한 고뇌와 사랑은 또 그것들대로 각자의 영역에서 싱글 플레이를 벌이는 것이다.                


<배트맨 대 슈퍼맨: 저스티스의 시작> (Batman v Superman: Dawn of Justice, 2016)

                                                                                                                                  

이렇듯 영화는 배트맨과 슈퍼맨의 세계를 하나로 품었다기보다 분절에서 나열하는 것에 가까운 전개를 보여준다. 그 결과 두 히어로가 맞붙는 순간 일어나야 할 화학작용의 임팩트도 기대치를 만족시키지 못하고 황급히 마무리되고 만다. 2시간 반의 러닝타임 안에 배트맨의 이야기와 슈퍼맨의 이야기가 차지할 지분을 정해놓고 그 안에 각자의 이야기를 황급히 채워넣는 인상이 강하다보니, 긴 러닝타임을 확보하고도 각 캐릭터의 깊이나 사건의 설득력을 보여줄 여지를 확보하진 못했다. <맨 오브 스틸>에 이어 슈퍼맨 역할을 이어가는 헨리 카빌은 슈퍼맨이 지닌 뜻밖의 면모를 언뜻언뜻 드러내며 선방한 듯 하나, 한편으로는 슈퍼맨이 전편부터 품어왔을 고뇌를 심화하거나 발전시키는 데 실패한 채 다소 얕은 변화에 머물고 만다. 벤 애플렉은 나이 들고 어느 정도 지친 중년의 배트맨을 사실 기대 이상으로 잘 소화해냈다. 과묵한 모습과 묵직한 하관이 잘 어울려 배트맨 역을 성공적으로 이양받았지만, 이번 편에서 그가 보여준 모습은 아직 힘과 분노 정도의 자주 봐 온 배트맨 이미지다. 더불어 자신의 기존 연기 스타일을 적당히 변용하면서 젊은 렉스 루터 역을 생기있게 연기해낸 제시 아이젠버그의 활약도 (다음 편을 위해 힘을 비축하는 건진 모르겠지만) 모호한 수준에서 종료된다. 말하자면 이 영화는 요즘 히어로물들이 곧잘 시도하곤 하는 '새로운 모습, 새로운 국면으로 새로운 화두 꺼내기'에 미처 이르지 못한 것이다. 

여기에 중후반부 등장하는 원더우먼을 비롯해 '저스티스 리그'의 일원이 될 다른 히어로들에 대한 떡밥들까지. 여유로운 조화 대신 캐릭터와 이야기의 다급한 나열로 흘러가다 보니, DC 코믹스의 히어로들답게 무게는 한껏 잡는 반면 이야기는 널뛴다. 또 비교해서 미안하지만, 대체로 쿨하고 경쾌한 분위기를 유지하는 마블 코믹스 영화였다면 어느 정도 양해될 수 있는 부분이겠으나, 진중하고 고전적인 이미지를 지니고 있는 DC 코믹스 영화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마블 영화의 경우 특유의 가볍고도 모던한 이미지 속에서 기대치 않았던 테크닉이나 이슈를 끄집어내며 관객들에게 뜻밖의 만족감을 주곤 했다. (<캡틴 아메리카: 윈터 솔져>가 그 좋은 예다) 반면 DC 영화는 반대로 진중하고 고전적인 이미지를 밀고 나가는데, 이 이미지가 슈퍼히어로물이 어느 정도 안고 갈 수 밖에 없는 비현실성과 만나면서 균열을 일으키는 것이다. <그린 랜턴: 반지의 선택>이 유난히 요란하게 망한 것도 이런 연유와 관련이 없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는 (코믹스 팬이 아닌 영화로 먼저 접한 일반인들이 봤을 때) 마블과는 완연히 다른 노선을 택한 DC가 짊어지고 가야 할 굴레와도 같은 부분으로, 좀 억울할 수도 있겠다 하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또 <다크 나이트> 3부작 같은 걸 만들어낸 놀란 감독을 생각하면 또 잭 스나이더 감독을 두둔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배트맨 대 슈퍼맨: 저스티스의 시작> (Batman v Superman: Dawn of Justice, 2016)

                                                                              

잭 스나이더 감독이 영화의 조율에 있어서 또 하나 논란의 여지를 남긴 부분은 바로 액션 연출이다. <맨 오브 스틸>에서 보여준, 감질날 틈도 없이 바람처럼 휘몰아치며 부수고 때리는 '강강' 일변도의 액션은 <배트맨 대 슈퍼맨>에서도 여전히 적용된다. <맨 오브 스틸>의 경우 외계인 대 외계인의 싸움이라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힘의 한도를 벗어난 규모의 파괴를 보여주며 이번 영화 속 갈등의 원인 제공을 하는 웃지못할 상황을 연출하기도 했는데, 이번 <배트맨 대 슈퍼맨> 역시 웬만한 액션신마다 힘을 강하게 주는 경향을 유지하면서도 그 장면들이 어지럽지 않고 나름 명확하게 자기 자리를 잡고 배치되어 있다. 영화 초반 브루스 웨인, 즉 하늘을 날 수 없는 인간의 시점에서 바라본 슈퍼맨과 조드의 결투신이 기대 이상으로 임팩트 있었고, 카체이싱이나 육탄 격투신, 불빛이 쉴새없이 오가는 마지막 하이라이트 결투까지 각 액션 시퀀스마다 포인트를 차별화한 것도 인상적이었다. 완급 조절이 좀처럼 없는 잭 스나이더식 액션 연출이 부담스러운 관객도 있을 것이다. (특히 후반부 둠스데이와의 대결신은 보면서도 이 정도면 좀 질려할 관객들 여럿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개인적으로는 같은 '강강' 식 연출로 비교해봤을 때 불꽃놀이 같은 마이클 베이 식 액션보다는 회오리바람 같은 잭 스나이더 식 액션이 취향에 맞았다. 부산하게 들이닥치는 캐릭터와 이야기의 행렬로 생긴 체증에 그래도 사이다를 부어주는 역할이랄까. 뭐 그렇다고 사이다가 체증을 없애주진 않지만 말이다.

다만 이처럼 논란과 아쉬움으로 점철된 <배트맨 대 슈퍼맨> 속에도 좀처럼 호불호가 갈리지 않는 애정어린 시선을 받을 요소가 있으니 바로 저스티스 리그의 일원으로 새롭게 등장하는 원더우먼(갤 가돗)이다. 스파이 무비 속 팜므파탈 같은 모습으로 궁금증을 유발하다 후반부에 전용 테마 BGM까지 깔리며 펼쳐지는 원더우먼의 활약은, DC 내부적으로만 봐도 <캣우먼>의 굴욕을 흔적없이 씻어낼 만한 전기를 마련함은 물론 마블과 DC를 통틀어 모든 여성 히어로들 중 가장 우수한 수준의 카리스마와 에너지를 뿜어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스갯소리로 부제가 '저스티스의 시작'이 아니라 '원더우먼의 시작'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이 영화에서는 후속편으로 향하는 가이드라인 정도로 소개되었지만 그 기대치는 한껏 드높여 놓았다. 배트맨과 슈퍼맨의 각 솔로영화 전망은 어떻게 될지 구름 속이나, 적어도 원더우먼 솔로영화는 앞날이 창창할 것으로 예상된다. 그런데 또 생각해 보면 이것도 이 영화가 마냥 자랑스럽게 내세울 요소는 못되는 것 같다. 배트맨과 슈퍼맨이 엄연한 주인공인 영화에 후반부에 맛보기로 활약하는 원더우먼이 가장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는 건, 바꿔 말하면 그만큼 역시 캐릭터 연출의 완급 조절에 성공하지 못했다는 얘기일테니 말이다.


<배트맨 대 슈퍼맨: 저스티스의 시작> (Batman v Superman: Dawn of Justice, 2016)

                                                                                                                                      

사실 이런저런 아쉬움들을 토로했지만, 그렇다고 <배트맨 대 슈퍼맨>을 마냥 '망작'이라고만 칭하기도 어렵다. 이야기는 정신없는 한편, 슈퍼맨의 캐릭터를 진지하게 구축하느라 이야기가 지지부진했던 <맨 오브 스틸>보다는 서스펜스와 반전이 한결 좁은 간격으로 심어져 있다. 저스티스 리그를 책임질 새로운 히어로들에 대한 단서, 캐릭터 저마다에게 의미심장한 역할을 하는 사물이나 장소 등 코믹스와 영화 팬들을 설레게 할 만한 떡밥들도 다량으로 함유되어 있다. 후반부 슈퍼맨-원더우먼-배트맨 삼각대가 가열차게 진용을 갖추는 장면에서는 '스크린에서 드디어 이런 장면을 보는구나'하는 생각에 왠지 모를 전율이 일기도 한다. 하지만 이 영화가 그 자체로서의 가치를 존중받기보다 DC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다음 행보를 향한 좋은 떡밥으로서 평가받는다는 것, 그리고 이런 평가가 세계관의 단서를 전략적으로 배치하는 데 실패하고 단순명료하게 쏟아부음으로써 생긴 결과라는 것이 두고두고 아쉬울 따름이다. 마블이 8년째 뚜벅뚜벅 체계적으로 유니버스를 구축하는 와중에, DC의 세계관을 구축하기 위해 출범된 이번 프로젝트는 급한 시간과 넘치는 의욕, 넣을 내용에 비해 그 솜씨가 정교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도 일단은 섣불리 수저를 내려놓기보다 다음에 나올 음식에 대한 기대를 붙들고자 한다. 여름에 등장할 <수어사이드 스쿼드>가 비로소 체증을 내려가게 할 소화제로서, 기대감을 심어줌은 물론 입맛까지 돌게 할 반전 카드가 되길 바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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