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상적인 영화리뷰 2024 - <추락의 해부>
작년 칸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하고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을 포함한 5개 부문 후보에 오르며 기대치를 한껏 높여 온 영화 <추락의 해부>는 한 가족 안에서 벌어진, 사고인지 사건인지 알 수 없는 일을 소재로 한 추리극 내지는 법정극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영화는 사실 그런 장르적 외관을 하고서 결혼과 가족을 둘러싸고 수없이 파고들어야만 하는, 사람의 수만큼 진실이 무수히 많을 수도 있는 삶의 명제를 이야기합니다. 팽팽한 긴장감과 능란한 스토리텔링이 더해져 결국 통렬한 깨달음으로 향하는, 극장에서 만난 올해 첫번째 걸작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독일인 작가 산드라(산드라 휠러)와 프랑스인 작가 사뮈엘(사뮈엘 테이스) 부부는 시각장애가 있는 아들 다니엘(밀로 마차도 그라너)과 함께 프랑스 산간지방의 외딴 별장에 거주하고 있습니다. 산드라는 자전적 요소를 녹여낸 작품들로 큰 유명세를 얻은 반면, 사뮈엘은 역시 작가의 꿈을 꿨었으나 지금은 거의 내려두고 다니엘을 보살피는 등 가사 일에 집중하는 듯 합니다. 어느날 산드라를 인터뷰하기 위해 한 문학 전공 학생이 별장을 찾아오는데, 화기애애하던 인터뷰 분위기는 위층에 있는 사뮈엘이 음악을 큰소리로 틀어대기 시작하면서 흐트러지고 이로 인해 산드라와 사뮈엘은 다시 갈등을 빚습니다. 한편 아들 다니엘이 반려견 '스눕'과 함께 인근에 산책을 하고 돌아온 사이, 사뮈엘이 별장에서 추락하여 죽은 채 발견됩니다. 사고인지, 자살인지, 살인인지 의심스러운 정황 속에서 당시 함께 별장에 있었던 산드라가 용의자로 기소됩니다. 그리고 1년 후 사건을 둘러싼 재판이 시작되고, 이를 다니엘이 지켜보게 되면서 눈 속에 묻힌 듯 감춰졌던 진실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추락의 해부>가 다루는 사건은 아빠가 피해자이고 엄마가 용의자이며 아들이 목격자인, 그야말로 관심이 동하지 않을 수 없는 사건입니다. 거기에 최초 목격자는 시각장애가 있는 아들과 말하지 못하는 동물인 반려견이라는 점에서, 정보의 제약이 불러오는 법정 공방 또한 불꽃 튈 것임을 예감케 하죠. 사건의 진상과 인물의 속내를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산드라가 오랜 친구이자 변호사 뱅상(스완 아를로)과 진술을 맞춰보는 단계부터 법정으로 넘어와 검찰 측과 변호인 측이 새롭게 드러나는 진실을 둘러싸고 벌이는 공방까지, 영화는 반전을 거듭하며 산드라가 진짜 범인일지 진실은 무엇일지 숨죽이고 지켜보게 하는 법정물 장르로서의 흡인력을 과연 제대로 발휘합니다. 한편으로는 사랑과 행복이 가득해야만 할 것 같은 집 안에 실은 아내와 남편 사이의 분노, 원망, 죄책감, 열등감 같은 감정들이 점철되어 있었다는 걸 깨닫게 되는, 법정물의 틀을 빌린 현대 가족에 관한 부조리극처럼 느껴지기도 하죠. 하지만 이야기는 아들 다니엘의 관점으로 옮겨지면서 예상했던 것보다 한층 깊고 씁쓸하고 슬퍼집니다. 가족이 필연적으로 품은 불확실성 속에서 일어난 비극, 그 비극의 잘잘못을 따지며 싹튼 서로를 향한 증오와 경멸의 도미노가 급기야 어린 아들에게까지 향했음을 목격하면서 말이죠, 부부, 가족이라는 관계 안에서 그 충돌의 파편은 어른들 안에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자신은 아빠를 죽이지 않았다는 엄마의 말을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그 기로에 선 다니엘은 어떤 쪽을 택할지 선택해야만 하는 상황에 직면합니다. 흔히 우리의 선택은 일반적으로 그게 맞다고 믿은 뒤에 이루어진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우리 삶의 꽤나 많은 부분은 '확신 없는 선택'에 의해 이루어져 있고 이는 결혼을 하고 부부가 되어 가족을 만드는 과정에도 예외없이 적용됩니다. 전혀 다른 세상을 살던 타인과 부부가 되고 가족을 이루겠다고 선택할 때 그 미래에 대해 확신하는 사람이 사실 얼마나 될까요. 비단 가족을 만드는 과정 뿐 아니라 타인의 마음은 물론 내 속내도 온전히 알지 못하는 세상에서, 확신의 여부 따위 개의치 않는 선택의 순간은 반드시 오게 마련입니다. 영화는 심지어 가장 안락한 울타리처럼 보이는 가족이라는 공동체마저도 그러한 확신 이전의 선택 후에 무수한 잠재 위험을 품은 채로 만들어질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설령 그 위험이 기어이 모습을 드러낸다고 해도,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는 세상 앞에서 선택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할 때도 있을 겁니다. 엄마, 아빠, 아들, 그러니까 온 가족이 어떤 형태로든 재판정에 오르게 되는 영화 속 재판정의 모습은 어쩌면, 그처럼 우리가 살면서 무수히 행해야만 했던 '확신 없는 선택'에 대한 심판을 은유하는 것이지도 모르겠습니다. 영화는 산드라와 다니엘의 모습처럼 나의 모든 선택이 심판대에 오를 때 우리는 떳떳할 수 있을까 묻는 듯 하면서도, 그게 떳떳하든 부끄럽든 나의 선택인 이상 피할 수 없으며 감당해야만 한다는 서글픈 진실을 상기시키기도 합니다.
자칫 빤한 가족 통속극으로도 비칠 수 있는 이야기에 이처럼 깊이 있는 비극성과 현실성을 함께 불어넣은 쥐스틴 트리에의 날카롭고도 대담한 연출이 놀랍습니다. 사랑만으로 살아갈 수 없는, 갖은 불편한 감정들이 뒤섞인 부부 사이의 공기를 긴장감 있게 그려내는 한편 그 자장 아래 있는 다니엘의 모습까지도 놓치지 않음으로써 얄팍한 폭로와 고발을 넘어서 진정성 있는 성찰에까지 이르게 되죠. 그처럼 관객을 롤러코스터에 태운 듯 심리적으로 뒤흔들어 버리는 영화의 에너지에는 주인공 산드라를 연기한 산드라 휠러의 열연 역시 큰 역할을 합니다. 이미 <토니 에드만>에서 보여준 대단한 연기를 알고 있지만, 그와 전혀 다른 결로 부부생활과 가족관계의 피할 수 없는 벽에 부딪힌 인간의 비애감을 때론 폭발적으로 때론 섬세한 터치로 그려내며 감탄을 자아냅니다. 더불어 영화에서 또 다른 중요한 방점을 찍는 아들 다니엘 역의 아역배우 밀로 마차도 그라너의 마음을 움직이는 호연도 극의 동력을 마지막까지 유지시키는 큰 역할을 합니다. 이와 함께 어쩌면 이들 못지 않게 영화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지도 모를, 반려견 '스눕' 역의 메시도 칸영화제 팜도그상(칸영화제 상영작 중 가장 뛰어난 연기를 선보인 견공 배우에게 수여하는 상) 수상에 빛나는 잊지 못할 연기를 보여줍니다.
<추락의 해부>가 이야기하는 '확신 없는 선택'이라는 화두는 관객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되어서, 역시 명쾌한 답을 주지 않은 채 사건의 진상이 어떤 것일지를 관객의 몫으로 남겨둡니다. 그 선택에 따라 달리 해석되는 이야기를 통해, 영화는 영광도 절망도 우리가 스스로 거머쥐고 감당해야 한다는 불가항력적인 삶의 진실을 목도하게 하죠. 우리 자신의 선택이 우리의 삶을 영광 혹은 절망의 순간으로 이끌고 곧 우리의 삶을 만들듯, 이 영화가 결국 어떤 이야기가 되는지도 삶과 세상을 향한 관객의 관점에 달려 있을지도 모릅니다.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에 따라, 이 영화가 어떤 이야기인지 완전히 달라질 것이라는 얘기입니다. 결국 영화의 마지막에 이르러 관객들까지 심판대에 세우고 마는 저력을 지닌 영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