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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진만 Jul 14. 2024

세계를 부수고 자아를 깨우는 사랑의 아드레날린

인상적인 영화리뷰 2024 - <러브 라이즈 블리딩>

<러브 라이즈 블리딩>(Love Lies Bleeding, 2024)


최근 열린 제28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개막작으로 상영된 영화 <러브 라이즈 블리딩>을 보았습니다. 믿고 보는 제작자 A24 제작으로, 데뷔작이었던 호러 영화 <세인트 모드>로 호평을 받은 로즈 글래스 감독이 세간의 주목 속에 만든 이 영화는 의외로 로맨스 영화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로맨스 장르의 편한 공식 안에서 노는 영화는 절대 아니고, 반대로 로맨스 장르의 폭넓은 감정적 자장 안에서 어디로 튈지 알 수 없는 전개로 기이한 에너지를 내뿜는 영화입니다. 보디빌딩을 소재로 퀴어 로맨스였다가, 범죄 스릴러였다가, 종내에는 바디 호러의 범주에까지 이르는 장르의 합종연횡 속에서도 영화가 내내 멈추지 않는 것은 사랑을 향한 예찬입니다. 옥죄어 오는 세계를 부수고 억눌려 있던 자아를 꺠우는 사랑에 관한 예찬이죠.


1989년, 라스베이거스에서 멀지 않은 미국 어딘가. 운동인들의 아드레날린이 한껏 분출하는 헬스장에서 루(크리스틴 스튜어트)는 허드렛일을 하는 스태프로 무료한 일상을 보내고 있습니다. 자신이 일하는 헬스장을 내내 채우고 있는 그 뜨거운 에너지가 마치 남의 일 같았던 루의 앞에 어느날 보디빌더 지망생 재키(케이티 오브라이언)가 나타납니다. 라스베이거스에서 곧 열릴 보디빌딩 대회에 출전하기 위해 이곳에 머물게 된 재키에게 루는 암암리에 거래되던 스테로이드 약물을 매개로 가까워지고, 눈이 마주치자마자 불꽃 같은 사랑에 빠집니다. 함께 지내며 둘의 사랑과 재키의 대회 준비 모두 뜨겁게 이어지던 중, 굳이 이야기하지 않았던 루의 감춰진 진실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 진실이란 동네 사격장을 운영하면서 숱한 살인과 범죄에 발을 담근 루의 아버지 루(에드 해리스)에 관한 것, 그리고 루의 언니 베스(지나 말론)에게 날마다 가혹한 폭력과 가스라이팅을 가하는 형부 JJ(데이브 프랭코)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사랑의 힘인 건지 약물의 힘인 건지 진실을 알게 된 재키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해 돌이킬 수 없는 사고를 저지르고, 루는 벌어진 일을 수습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면서도 사랑하는 재키를 자신의 가족이 해할까 두렵습니다. 과연 사랑의 폭주는 그들을 어디까지 데려갈 것인지. 


<러브 라이즈 블리딩>(Love Lies Bleeding, 2024)


<러브 라이즈 블리딩>에서는 시작부터 내내 좀처럼 제어되지 않고 들끓는 아드레날린이 고스란히 느껴집니다. 1989년이라 하면, 할리우드만 봐도 아놀드 슈워제네거, 실베스터 스탤론 같은 근육질 액션스타들이 한창 자웅을 겨루던 때였으니까요. 운동에 심취한 사람들의 땀냄새가 잔뜩 느껴지는 그런 1989년을 배경으로 흐르는 이 기묘한 에너지는, 당대의 미국을 휘어잡던 마초이즘의 중심에 근육질의 남성들이 아닌 여성들만을 오롯이 내세운다는 점에서 특별합니다. 영화는 첫 장면부터 사내들의 들끓는 힘이 전시되는 헬스장의 풍경을 연쇄적인 이미지들로 보여준 후, 그 이미지들과 철저히 먼 거리에 있는 듯한 루가 뒤치다꺼리를 하는 장면으로 바로 전환합니다. 뒤이어 재키가 들어와 운동에 몰두하지만, 주변의 다른 회원들에게 재키는 같은 운동인이라기보다 작업 걸 만한 이성에 더 가까워 보입니다. 이렇듯 영화는 헬스장이라는 공간을 통해 당대의 세계를 주름잡던 '힘의 이미지'에서 소외되거나 주변인으로 머물러 있던 여성의 모습을 의미심장하게 보여줍니다. 그러더니 영화는 루 시니어가 운영하는 사격장으로 대표되는 총기, 루의 언니 베스가 얽힌 가정폭력 등의 요소를 통해 그렇게 시대를 주름잡던 남성의 힘이 누군가를 희생양 또는 방관자 삼아서 과시되던 현실로 나아갑니다. 이런 현실에서 남성의 힘을 보여주기 위한 희생양 또는 방관자 역할의 다수는 여성들이 해야 했음을 보여주는 것이죠. 그러나 루와 재키는 당당대 남성의 것이었던 힘과 폭력의 전시를 위치를 바꿔 그들 자신이 보여줌으로써, 그런 세계의 폭력적인 흐름에 맞선 저항자로서 중심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루와 재키로 하여금 그런 저항자가 되게끔 하는 에너지의 원천은 무엇보다도 사랑입니다. 약물을 맞고 흡사 재키의 근육 구석구석이 흡사 헐크라도 된 것마냥 자극되며 펄떡이는 모습은, 한편으론 폭력적인 세상을 압도하는 사랑의 광기어린 힘을 상징하는 것도 같습니다. 그러나 사랑이 그들을 언제나 옳은 방향으로 데리고 가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혼란으로 이끌 때가 더 많을 겁니다. 이성으로 주체할 수 없는 에너지에 그들의 행로를 때로는 엇갈리게 하기도 하고요. 하지만 영화는 사랑이 언제나 옳은 방향으로 인도한다며 예찬하지 않고, 어떤 방향으로 이끌든 그 모든 방향으로 뿜어내는 사랑의 에너지 자체에 대해 예찬합니다. 한쪽이 통제 불가능한 에너지로 폭주하며 피를 보게 할 때, 다른 한쪽은 난처한 표정을 지으면서 그 흩뿌려진 피를 열심히 닦으려 합니다. 양쪽의 행위 모두 사랑하는 서로를 지키기 위한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이며, 때문에 양쪽의 행위 모두 벼랑 끝에 몰린 서로를 구원하는 결과에 이르게 되죠. 서로 엮이지 않았다면 각자 알아서 평화롭지만 무료하게 이어졌을 삶이, 서로 엮이게 되면서 위태롭지만 서로가 아니면 안되도록 간절하고 뜨겁게 질주하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내 인생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라는 어느 영화 속 대사처럼, 이들의 사랑은 특유의 아드레날린에 힘입어 여성을 희생양 삼아 힘을 공고히 하던 세계를 파괴하면서 동시에 스러져 있던 자아를 다시 일깨우고 일으켜 세우는 드라마를 만들어 냅니다.


<러브 라이즈 블리딩>(Love Lies Bleeding, 2024)


오롯이 여성들로부터 그 끓어오르는 힘을 표출해내는 영화로서,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가는 이야기를 너끈히 이끌어가는 배우들의 에너지는 단연 강렬합니다. 루 역의 크리스틴 스튜어트는 혼돈스럽고 폭력적인 진실로부터 무력하게 도피해 있던 인물이 점차 각성하고 해방을 갈망하게 되는 과정을 특유의 정제되지 않은 호흡과 힘으로 활기 넘치게 보여줍니다. 이런 혼란과 해방의 청춘을 연기하는 대명사로서 이제는 확실히 입지를 다지며 믿고 볼 만한 배우로 자리잡았음을 다시금 실감합니다. 한편 재키 역의 케이티 오브라이언이 보여주는 피지컬 연기 또한 다른 영화들에서 볼 수 없는 개성 넘치는 에너지를 보여줍니다. 실제 보디빌더 경력이 있는 그는 영화의 근간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랑의 힘'을 이미지적으로 가장 강렬하게 보여주면서, 솟구치는 힘을 제어할 수 없는 불안감을 사랑에 의지하며 해소해나가는 이의 감정 표현 또한 섬세하게 보여줍니다. 이 밖에도 남편의 폭력에 익숙해져 구원도 미처 구원인 것을 알지 못하는 루의 언니 베스를 인상적으로 보여주는 지나 말론, 루를 연모하는 또 한 사람으로서 극에 긴장감을 부여하는 데이지 역의 안나 바리시니코프, 폭력을 남자다움이라고 착각하는 극하남자의 모습을 옹졸하게 표현하는 JJ 역의 데이브 프랭코, 다소 우스꽝스러운 헤어스타일마저도 결코 웃음이 나지 않게 하는 카리스마를 보여주는 루 시니어 역의 에드 해리스까지 어디로 튈지 모르는 서사의 긴장감을 잃지 않게 하는 배우들의 탄탄한 호연이 영화를 뒷받침해 줍니다. 


<러브 라이즈 블리딩>이 보여주는, 1989년의 생생한 공기에서 출발해 뒤로 갈수록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넘나들며 흘러가는 이야기를 혹자는 이른바 '뇌절'이라고 평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이런 평가도 틀리지 않는 게, 영화는 인간에게 갖가지 한계를 두는 현실을 너끈히 돌파하고 마는 에너지 자체에 주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에너지의 근원은 사랑이며 그렇게 사랑으로부터 무한히 뻗어 나가는 힘은 더 이상 남성의 전유물이 될 수 없음을, 영화 속의 강력한 여성들이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성별과 연령대를 불문하고 여느 로맨스 영화에서 좀처럼 볼 수 없었던 고유의 아드레날린으로 질주하는 영화를 가장 잘 즐길 수 있는 방법은 관객도 다같이 그들이 내미는 손을 맞잡고 힘껏 내달리는 것일 겁니다.


<러브 라이즈 블리딩>(Love Lies Bleeding,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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