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의 울타리를 뛰어넘어 지도 밖으로

인상적인 영화리뷰 2025 - <여행과 나날>

by 김진만
<여행과 나날>(Two Seasons, Two Strangers, 2025)


현재 일본 영화계에서 가장 주목받고 있는 감독 중 한 사람인 미야케 쇼 감독의 새 영화인 <여행과 나날>은, 제78회 로카르노영화제에서 최고상인 황금표범상을 받으며 공개 직후부터 호응을 얻은 가운데 특히 한국의 심은경 배우와의 작업으로 눈길을 모으기도 했습니다. 3년 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영화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이 상영되었을 당시, 영화를 무척 감명깊게 보았다는 심은경 배우와 영화를 연출한 미야케 쇼 감독이 스페셜 GV를 가졌었는데 저도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당시 서로의 역량에 대해 칭찬하며 감상을 나누는 두 사람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는데, 이렇게 시간이 흘러 두 사람이 감독과 배우로 만나 한 편의 영화를 완성했다는 것이 새삼 신기 합니다. 그런 만큼 <여행과 나날>은 묵묵히 바라보며 우리의 일상을 보듬는 미야케 쇼 감독의 손길과 일본에서 활약하며 일상의 맥박을 세심하게 짚어내는 힘을 더욱 잘 길러낸 듯한 심은경 배우의 연기가 만나, 여행의 복판에서 우리의 나날을 긍정하는 영화가 되었습니다.


일본에 사는 한국인 시나리오 작가 '이'(심은경)는 최근 여름 여행의 기억을 살려 쓰게 요시하루의 만화 '해변의 서경'을 원작으로 한 영화 한 편을 썼습니다. 영화는 도시에서 온 여자(카와이 유미)와 어머니의 고향을 찾아 온 소년(타카다 만사쿠)이 한적한 바닷가 마을에서 우연히 만나 겪는 잠깐동안의 교류를 그립니다. 말 없이 나란히 걷던 두 사람은 점차 대화를 주고 받고, 빗 속의 해변으로 뛰어들며 서로에게 소리치기에 이릅니다. 존경하는 교수의 강의에서 학생들과 함께 이 영화를 본 이는 소감을 묻는 질문에 자신이 한없이 부족한 것 같다며 자책합니다. 그러던 중 교수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고, 이는 교수가 남긴 많은 유품들 중 하나인 카메라 하나를 넘겨받고는 그 길로 설국과 같은 시골 마을로 홀연히 여행을 떠납니다. 계획없이 떠나왔으니 잠잘 곳 찾기도 마땅찮은 가운데, 이는 지도 바깥으로 나가서야 오래된 여관을 어렵사리 찾아냅니다. 그곳을 홀로 지키는 주인(츠츠미 신이치)는 손님이 귀찮은 것만 같은 태도로 일관하는 듯 하면서도 이가 글을 쓴다기에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말이라는 틀에 갇혀 있다고 생각했던 이에게 이 여행이 새로운 영감으로 이어질지 도피로 귀결될지는 알 수 없습니다.


<여행과 나날>(Two Seasons, Two Strangers, 2025)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 <너의 눈을 들여다 보면>, <새벽의 모든>, 그리고 이 영화까지 내놓으며 미야케 쇼 감독은 일본에서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 등과 더불어 차세대 젊은 거장 감독 중 한 명으로 꼽히게 되었습니다.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이 '대화의 액션'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밀도 높은 대화로 서사를 쌓아가는 데 탁월한 재능을 보여주는 데 반해, 미야케 쇼 감독은 들려주기보다 보여주기를 택하며 놓치고 있던 일상의 유의미한 순간들을 지어내기를 잘 합니다. 이번 <여행과 나날>에서는 그렇잖아도 없는 편인 그 말수를 더 줄이고 보여주는 데 집중합니다. 초반에는 이가 쓴 시나리오 속 여름의 풍경을, 중후반에는 이가 누비는 현실 속 겨울의 풍경을 말이죠. 특히 초반 여름 풍경에서는 아무 말 없이 인물들이 내딛는 곳의 풍경을 보여주는 데 집중하기 때문에 대단히 잔잔하고 고요할 수 있어서, 그 인물들을 따라 생소한 바닷가 마을을 따라가 본다는 마음으로 화면을 좇아가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이의 글에서 태어난 초반부의 여름 풍경은 당연히 계절처럼 온기를 한껏 머금었겠지만 어딘지 쓸쓸한 느낌입니다. 극중의 여자와 소녀는 잠깐의 대화로 교감하는 듯 하지만 여행지라는 곳이 다 늘 그렇듯 그들의 대화도 교감하여 머무르는 게 아니라 언제고 다시 자기 갈 길로 흩어질 것만 같습니다. 아마도 이 이야기를 이가 타국의 잠시 빌린 방 안에서 썼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여행과 나날>은 일본영화이지만 이의 심정을 나타내는 내레이션은 한국어로 흘러나옵니다. 이는 그가 일본어 영화의 시나리오를 쓴다는 것이 감정에 온전히 가닿지 못하는 작업일 수 있겠구나 짐작하게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짐작되는 이의 심정은 곧 '말이라는 틀에 갇힌 것 같다'는, 한국어로 흘러나오는 이의 내면으로부터의 목소리에서 확인됩니다.


그리고 책상을 박차고 나와 이가 떠나온 '설국'. 겨울이니 당연히 춥고 시리겠지만 이상하게도 어딘가 포근한 느낌이 계속 흐릅니다. 꼭 이가 우동집에 들러 안경에 김이 서려가며 뜨끈한 우동을 먹는 장면이 아니더라도 말이죠. (우리는 영화라는 형태로 지켜보고 있지만) 이의 이 현실 속 여행은 영화가 아니기에 말을 붙일 필요가 없고, 감정과 사건은 어떤 서사를 쌓지 않고서도 덜컥 일어나기도 합니다. 이가 홀로 내다보고 밟아보고 만져보며 느꼈던 계절의 품은, 괴팍한 성격의 여관 주인과 잠깐을 지내면서 겪은 난데없는 관심, 호의, 교감 그리고 작은 모험은 비로소 '말이라는 틀'로부터 벗어나 만나게 되는 세계를 이에게 보여주는 것만 같습니다. 이 모든 것들을 미야케 쇼 감독은 이번에도 주석을 붙이지 않고 그저 바라만 봅니다. 그 덕에 다른 무언가로 치환되지 않아도 그 자체로 영감이 되고 삶의 한 맥락으로 읽히는 것만 같습니다. 비단 타국에서 모국어가 아닌 언어의 영화 시나리오를 쓰는 이의 입장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우리가 비롯된 곳을 떠나는 순간부터 삶이 여행처럼 머무르지 않고 언제고 부유하게 되는 것을 느끼게 되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가 설국 안에서 만나는 형언할 수 없는 감각들, 희로애락으로 단정지을 수 없는 기묘한 감정의 경험들은 비단 여행자에게만, 이방인에게만이 아니더라도 어디로 가든 부유하고 있는 세상으로 우리를 이끕니다. 우리들과 같이 부유하는 그 세상은 언어가 명확하지 않아도 좋은 곳이고, 그렇게 우리의 고독은 덜어지는 것입니다.


<여행과 나날>(Two Seasons, Two Strangers, 2025)


미야케 쇼 감독은 늘 우리가 그저 스치고 마는 일상이 머금은 빛에 주목해 왔지만, 이번 <여행과 나날>에서 상상과 현실의 경계를 살짝 흩뜨리는 전개 속에서 그 지켜보는 시선을 더욱 깊고 넓게 뻗어나갑니다. 전작들만큼의 인물 서사나 사건 서사가 명확하지 않기에 보시기에 당혹스러울 수도 있겠지만, 이야기를 따라가는 관객이기보다 풍경을 따라가는 여행자의 마음으로 따라간다면 그 안에서 길어올릴 수 있는, 말의 경계를 넘어선 감흥의 스펙트럼은 한층 다채로울 것입니다. 그렇게 '말이라는 틀'을 박차고 나와 관찰하고 감각하며 세계를 써나갈 채비를 해 가는 작가 이를 연기하는 심은경 배우의 활약도 한층 원숙하게 장면장면을 채웁니다. 자신이 만들어 나가는 펜 끝의 세계 앞에서도 무감한 듯했던 작가가 여행을 거치며 비로소 느끼고 몰두하는 법을 알아가며 웃음까지 머금어 가는 모습은 미야케 쇼 감독이 영화를 통해 줄곧 보여주려는, 여행 속 나날을 들여다 보며 일상의 잠재된 아름다움을 긍정하는 태도를 체화시킨 것만 같습니다. 더불어 그 속내도 사연도 궁금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뾰족한 듯 따뜻한 면을 지닌 여관 주인 역의 츠츠미 신이치 역이 영화에 인간미는 물론 뜻밖의 유머까지 더하며 인상 깊은 모습을 보여줍니다.


<여행과 나날>은 여행을 소재로 한 영화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여행을 해봐야 인생과 세상을 안다'는 식으로 여행을 예찬하는 영화는 아닙니다. 오히려 여행을 통해 삶을 긍정하는 영화입니다. 남들 다 간다는 여행지나 맛집은 쏙 빼고, 지도 밖에 있어 현지인 말고는 아는 사람 없는 여관에 머물며 타인의 일상에 살짝 끼어드는 정도의 이벤트(?)만 일어날 뿐인 이 여행담은, 삶이 오히려 여행 같아 불안한 우리들에게 세상이 그저 여행으로 채워져 있는 것임을, 그러니 우리는 이 삶이라는 커다란 여행에서 마음껏 관찰하고 감각하면 된다는 것을 넌지시 보여주며 속삭일 따름입니다. 언제나 다른 세계를 내 세계인 양 누빌 각오를 하고 있어야만 하는 창작자에게도, 내 의지와 상관없이 펼쳐지는 세상도 내 것인 양 꾸려나가야만 하는 수많은 사람들에게도 이 속삭임은 힘이 되어줄 것입니다.


<여행과 나날>(Two Seasons, Two Strangers, 2025)



keyword